1. 생각의 역사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생각하는 사람들의 결론들을 모아 놓은 역사, 말하자면 철학사나 윤리교과서 따위에 있는 역사입니다. 다른 하나는 생각하는 방법의 역사, 즉, 나와는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이라는 동일한 조건 속에 처해 있었던 사람들이 경험한 생각의 모험을 다시 경험하려는 관점입니다.
2. 서로 다른 전공을 한 사람들이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글을 써 보자는 이 “잡담” 기획에서, 우리는 맨 처음으로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기로 하였습니다. 근대 철학의 원점에 있는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제일철학에 대한 성찰, 여기서 신의 현존 및 인간 영혼의 불멸성이 증명됨(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in qua Dei existentia et animae immortalitas demonstrantur)>입니다. 보통 “제일철학에 대한 성찰”, 혹은 “성찰” 까지만 불러 주니 서구에서는 보통 <Meditation>이라고 불렀고, 일본 학자들에 의한 번역 제목이 <성찰록省察錄>, 한국에서는 이걸 따라 <성찰>이라고 불르고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성찰>에 대해서 흐느적흐느적 주절주절 잡담을 하는 것이 목적인 이 글의 제목은 “데카르트적 명상”입니다. 사실 이것은 에드문트 후썰Edmund Husserl의 글인 “Méditations cartésiennes (Cartesian Meditations)”의 제목을 그대로 따온 것입니다. 보통 이 제목은 “데카르트적 ‘성찰’”로 옮깁니다. 하지만 나는 “성찰”이라는 번역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반성하고 살핀다는 의미에서 성찰은 충분히 좋은 번역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한국어 속에서 “명상”이 가지는 의미, 즉 내면의 의식과 경험적 세계, 그리고 그 너머의 초월에 모두 관여하는 뉘앙스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생각한 결과의 역사”와 “생각을 경험하는 역사”를 대비시킬 때, 데카르트를 보는 관점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전자의 경우, 데카르트는 근대적, 합리적 이성인 코기토cogito를 철학의 제일원리로 삼았으며,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확립한 사람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후자의 관점으로 보면, 데카르트는 자기 시대의 위기를 모든 선입관을 배제하고 해체하는 통찰을 통해 돌파하려고 했던 사람이 됩니다.
실제로 현대의 위기를 돌파하려고 시도한 20세기의 사상가들은 데카르트로 돌아가는 일이 많았습니다.그건 데카르트가 성찰한 결과를 받아들이거나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데카르트처럼’ 세계를 보는 자연적 태도를 넘어 세계의 실상을 파악하고자 한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만 들겠습니다.
후썰을 비롯한 현상학자들은 데카르트가 “방법론적 회의”라고 불렀던 것을 더 세련화해서 “현상학적 환원”이란 걸 합니다. 데카르트가 오성에 명석판명하게 떠오르는 확실한 것 이외의 것을 의심하고 지워버렸다면, 이들은 그런 것들에 “괄호”를 치거나, “판단을 중지”해서 투명하게 만듭니다. 그랬더니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데카르트의 시도를 끝까지 몰아갔더니, 데카르트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납니다.
데카르트는 자신을 속일 가능성이 있는 외적 감각을 의심하면서 물질적 기계인 신체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코기토에 도달합니다. 그런데 현상학자인 메를로퐁티Merleau-Ponty는 감각도 몸의 운동을 통해 이루어지고 주관 역시 몸을 가지고 이루어진다는 걸 발견합니다. 같은 자리에서 출발했는데, 데카르트는 “순수한 생각(코기토)”을, 메를로퐁티는 “상황 속의 몸”. 마치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한 것처럼 보입니다.
현상학자들이 데카르트의 시도를 끝까지 밀고 갔다면, 데리다Derrida는 데카르트가 무엇을 기획했느냐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데카르트는 단순히 확실한 걸 찾으려고 한 게 아니라, 생각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뛰어넘어 무한한 것을 향했다는 점에서 해체론의 모범이라는 거지요. 데카르트는 현상학의 모범이기도 하고,해체론의 모범이기도 하네요.
4. 철학전공자가 아닌 내가 데카르트의 철학사적 의미를 더 쓰는 건 틀릴 가능성만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본래 하려고 했던 잡담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잘 짜인 글의 “주제”와 잡담의 “화제”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제”는 처음에 던진 문제이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이야기가 모이는 지점입니다.한편 잡담은 “화제”라는 원을 둘러싸고 이야기를 놀게 합니다. 이 잡담의 화제는 데카르트가 시도한 걸 우리 각자의 시각에서 어떻게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좀 더 유연하게 말하자면, 술자리에서 데카르트 얘기를 하고 논다면 우리는 무슨 얘기를 할까? 하는 거지요.
데카르트는 많은 거짓된 것들이 참된 것으로 착각되고, 그 위에 세워진 학문도 의심스러운 걸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걸 무너뜨리고 처음의 토대에서 새로 시작하려는 기획을 합니다. 잘 알려진 <성찰>의 첫 부분입니다.
데카르트가 확실한 토대를 찾고자 하는 마음을 먹은 것은 몇 해 전의 일이지만, 그는 이 일을 오랫동안 미루어 뒀습니다. 이걸 적절하게 실행할 수 있는 “성숙한 나이”가 되기를 기다렸다는 거지요. 그러다 “다행히 오늘 내 정신은 모든 근심에서 벗어나 있고, 은은한 적막 속에서 평온한 휴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갖고 있던 모든 의견을 진지하고 자유롭게 전복시켜 보겠다”면서 글을 시작합니다.
데카르트의 의심이 흥미로운 것은 크게 세 가지 가설 때문입니다. 하나는 “광인의 가설”, 다음은 “꿈의 가설”, 마지막으로 “악령의 가설”이지요. 감각은 의심하기 어려워 보이지만, 광인들은 감각을 엉뚱하게 착각하고 우겨댑니다. 그리고 꿈을 꾸는 동안에는 모든 사람이 마치 광인처럼 엉뚱한 것을 감각하면서 그게 꿈인지 아닌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물질적인 것, 장소, 시간 등은 모두 적어도 의심해 봐야할 것이 됩니다. 한편 일반적인 것을 다루는 대수학이나 기하학 같은 것들은 확실해 보이지요. 과연 수학은 진리가 될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데카르트의 마지막 가설인 “악령의 가설”이 등장합니다. 데카르트가 사는 시대에서 의심해 볼 수 있는 마지막 의견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계를 창조한 신이 존재한다는데, 만약 이 신이 선하고 완전한 존재가 아닌 “유능하고 교활한 악령(genium aliquem malignum)"이라면? 이를 테면 우리가 2+3=5라고 생각하거나, 사각형의 변이 네 개라고 생각하는 등도 모두 착각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합니다. 혹 “악령”이 “꿈”을 만들어 내가 “광인”처럼 세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는 거지요. 이렇게 하면 참된 걸 인식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거짓된 것에 동의하는 일은 없어진다는 겁니다. 하늘도 땅도, 자신의 몸, 감각기관도 모두 환상이라고 믿어 보는 거지요.
첫 번째 성찰은 이렇게 끝납니다만, 데카르트는 두려움에 빠집니다. 이 세 가지 가설을 계속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든 일입니다. 조금만 긴장이 풀어져도 “일상적인 생활 태도” 혹은 “달콤한 환상”으로 돌아올 것이고, 자신을 진리로 이끌지 어떨지도 모르는 가정을 가지고 악령의 세계 속에서 살아야 하니까요.
5. 첫 번째 성찰을 정리한 앞의 절에서 나는 의도적으로 잘 정리된 교과서적 방법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보통 잘 언급되지 않는 첫 부분과 끝 부분을 강조했습니다. 데카르트의 의심은 마치 빨간약을 먹은 매트릭스의 탈주자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떤 시스템이 만든 달콤한 환상을 가정하는 거니까요. 데카르트는 영지주의적 신비주의자나 불교적 유식사상가가 아니지만, 마치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된 척 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의 악령은 마치 영지주의자의 데미우르고스나 매트릭스처럼 보이거든요.
석가모니가 마라의 방해를 받거나 예수가 사탄의 유혹을 받은 것은 일상적/사회적 삶의 자리에 있을 때가 아니라, 보리수 아래거나 광야, 즉 외부세계와 단절된 고행의 자리였습니다. 데카르트는 고행을 하지는 않았지만, “은은한 적막 속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할” 필요는 있었습니다. 외부세계나 사회적 관계(데카르트는 “근심”이라고 표현합니다만)에서 분리되려 했던 것이지요. 인간을 무지와 착각 속에 빠트리는 원리로서의 “악령”에 대한 모티브가 데카르트에게서 이처럼 독특한 방식으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감히 신을 악령이라 불러놓고도 데카르트는 이 글을 소르본느 대학의 신학자들에게 보내면서 이 책을 인정해 주고, 자기를 보호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는 사실 이 글은 신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며, 신의 현전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바탕으로 모든 학문을 정초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성찰>에서는 “행위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니까 아무리 불신해도 상관없다”고도 하지요. 그래봤자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6. 데카르트의 의심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의심은 “확실한 것”을 발견하기 위한 “방법적”인 거였지요. 조금이라도 확실하지 않은 것은 소거해 가면서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를 보는 거지요. 그렇게 기억도, 감각도, 물체도, 형태도, 연장도, 운동도, 장소도 모두 사라져 갑니다. 그러자 단 하나의 참인 명제가 남습니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부터 데카르트가 나아가는 곳은 논리적 연결보다는 일련의 발상 전환입니다.
① 이 유일한 참의 명제를 나는 어떻게 아는 것인가? 신이나 그런 비슷한 것이 있어서 나에게 이런 생각을 주는 것인가?
② 아니, 왜 내가 신이 그랬을지 모른다는 가정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 자신이 이런 생각들을 만든 게 아닌가?
③ 그렇다면 나는 적어도 “무언가”이지 않을까? 그런데 난 이미 감각기관이나 신체를 다 부정했잖아?
그리고 데카르트는 잠시 주춤합니다.
④ 혹시 나는 신체와 감각기관에 묶여 이것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건 아닐까? 근데 난 이미 세계에는 하늘,땅, 정신, 물체가 없다고 “나”를 설득했잖아? 이때 “나” 역시 없다고 나를 설득한 거 아닐까? 아니지. 내가 나에게 뭔가 설득했다면 설득당하는 내가 있었겠지.
⑤ 또 어떤 기만자(악령이든 뭐든)가 있어서 나를 계속 속이고 있는 거라고 쳐. 그럼 걔가 속이는 나는 역시 존재하는 거잖아? “나는 있다”고 생각하면 기만자는 절대 나를 무無로 만들 수 없어.
그렇게 해서 나온 명제가.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ego sum, ego existo)"라는 겁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이 명제는 내가 발언할 때마다 항상 참입니다.
7.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겠다는 이 글에서 엉뚱하게도 “나의 존재”를 증명한 것입니다. 사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이 증명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만 해도, 데카르트가 발견한“나”는 육체에 대한 거울이미지에서 유래한 상상적 자아이며, 실재적 주체 역시 내가 발언할 때마다 오히려 언어 속에서 분열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프로이트를 몰랐습니다. 무의식적 주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지요.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확실히 존재한다고 본 “나”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마찬가지로 그는 의심하면서 확실하지 않은 건 지워나갑니다. 나는 무엇인가?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것은 데카르트 이전부터 있었던 말입니다. 그러나 이건 복잡한 개념인 “이성적”, “동물” 등이 무엇인가를 다시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신 데카르트는 자신의 자연스런 경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나”를 소거해 나갑니다. 먼저 얼굴, 손, 발 등으로 되어 있는 기계, 즉 “신체”. 이건 시체에도 있는 겁니다. 다음으로 밥 먹고, 걷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 이건 “영혼”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에게는 마지막 가정, 즉 전능한 기만자인 “악령”이 있습니다. 몸이 있다는 게 착각이라면? 몸이 없다면 밥 먹는 거, 걷는 거, 느끼는 거 다 착각이 됩니다. 꿈은 몸과 관계없이 느끼지만, 이거 사실 느낀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이 바로, “생각”입니다.
데카르트의 의하면, “생각”만이 나와 분리될 수 없는 무언가입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동안 분명히 존재합니다. 속이면 속일수록, 속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나의 존재는 오히려 더더욱 확실해집니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외칩니다. “무엇이든 나를 속이려면 얼마든지 속여 봐라. 내가 생각하는 한, 나는 존재한다!”
8. 데카르트는 적어도 생각하는 나(코기토)는 확실히 증명했다고 믿었습니다. 정확히는 “나는 생각”입니다. 그럼 이제 코기토라는 확실한 토대 위에 지금까지 의심하고 소거했던 세계들을 다시 쌓아가기만 하면 되는 걸까요? 당장 비교적 확실한 지식처럼 보였던 대수적, 기하학적 지식들은 믿어도 되는 걸까요? 데카르트는 이제 신을 증명하기로 합니다. “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속이는 악령”이라는 가정에서 해방되면 이제 세계에는 믿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여기서부터 명백하게 자기 시대의 한계에 부딪힙니다. “나”를 발견할 때까지 데카르트는 모든 선입견을 제거하고 끊임없는 물음표를 던지면서 사고의 극단까지 모험을 합니다. 그런데 코기토를 발견한 후로는 명백하게 증명되지 않은 근거들을 동원합니다. “자연의 빛”이 나에게 명시해 준다는 이유로요.
“자연의 빛”은 데카르트에 의하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이성에 의한 직관입니다. 그는 이성의 힘에 의해 너무나 확실하게 증명된 코기토의 발견에 감탄한 나머지, 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를 남용하기 시작합니다. 신의 관념을 증명하는 부분을 보겠습니다. 그에 의하면 관념들 사이에는 위계가 있습니다. 이 스펙트럼의 한편은 “형상적인 실재”이며 다른 한편은 “표상적인 실재”입니다.좀 더 형상적인 관념에서 표상적인 관념이 나옵니다. 형상적인 관념일수록 원인이고 표상적인 관념일수록 결과입니다. 게다가 형상적인 관념은 표상적인 관념보다 더 크고, 완전하고, 우월합니다.
데카르트가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 눈치 채셨을 겁니다. 데카르트가 인식하기로, 신은 전지전능하고, 나를 만든 원인이며, 영원하고, 무한하며, 여튼 “나”라는 관념보다 훨씬훨씬 크고, 대단하고, 더 “형상적”인 관념입니다. 그러니까 “나”가 “신”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신”이 “나”를 만들어야만 한다는 거지요. 그러니 확실히 존재하는 “나” 안에 “신”의 관념이 있으니, 신도 확실히 존재한다는 거지요. 그리고 궁극적인 원인인 신의 관념이 내 안에 있는 것은 신이 나를 창조할 때 내 안에 그 관념을 심어놓은 게 분명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당연히 신은 기만자, 즉 “악령”이 아닙니다. 기만은 뭔가 부족한 사기꾼들이 하는 짓인데(이 역시 “자연의 빛”이 알려줍니다) 신은 완전무결하기 때문에 나를 기만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토록 철저하게 의심을 해 놓고는, 좀 싱겁다 싶은 신 증명. 이걸로 데카르트의 의심은 끝이 납니다. 분명히 존재하는 생각하는 내가 지식과 지혜를 모두 지니고 있는 참된 신을 관상하고 있습니다. 이제 나머지 모든 사물을 인식하기만 하면 됩니다. 서구정신사의 전환을 이룬 이 지점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황홀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것에서 도출되는 다른 진리를 고찰하기 전에, 나는 여기서 잠시 머물러 이 완전한 신을 명상하고 그의 속성을 음미하며, 황홀감에 눈을 먼 정신이 그 힘이 닿는 데까지 이 비할 수 없는 장대한 빛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찬양하며 숭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장엄한 신의 명상 속에 내세의 더할 나위 없는 지복이 있음을 우리가 신앙을 통해 믿듯이, 이와는 비할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런 성찰을 통해 현세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을 누리고 있음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이런 고백을 신비주의자들에게서 발견합니다.
9. 실제로 데카르트는 신학교 시절에 꾼 세 차례의 신비로운 꿈을 기록하기도 하고, 군복무를 하던 젊은 시절 독일에서 비밀결사인 장미십자회(Rosenkreuzer)와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신비주의자라고 규정하기는 힘든 사람입니다. 그는 단순히 모든 인식의 기반이 될 확실한 것을 찾아 의심스러운 것들을 지워가다가 그야말로 우연히 신비적 직관에 도달한 것입니다.
우선 그의 신 증명은 오류투성이입니다. 우리는 <성찰>의 원래 제목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를 “신 증명을 한 사람”이 아니라 “코기토를 발견한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이 증명은 이전 시대의 토마스 아퀴나스나 안셀무스의 증명보다도 허술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틀린 지점들을 검토함으로써 우리는 그의 성찰-명상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전지전능하고 무한하며 영원하고 완전하며 모든 것을 만든 원인인 신”이란 관념은 그의 생각과는 달리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는 관념”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라는 전통 속에서 축적되고, 공유되며, 재생산되는 문화적인 관념입니다. 다른 문화권, 그리고 현대 사회에 이런 관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는 매우 많습니다.
한편 데카르트는 우리와 같은 종이며 지구라는 행성에 살았던 인간입니다. 사고를 위한 하드웨어도 같으며, 문화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많은 면에서 우리와 대단히 유사한 세계에서 살았던 인물입니다. 자신의 일부라고 믿어지는 신체적, 정신적 요소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면서 영원한 실재를 경험하는 실천은 대단히 일반적인 인간 현상입니다. 힌두교와 도교의 체계화된 수행법들을 보면 이런 현상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전통에 축적된 언어를 통해 이름 붙였을 뿐, 그의 황홀감은 분명 자신이 속한 문화를 초월해 있습니다.
어쩌면 데카르트가 발견한 것은 경험적인 세계를 뛰어넘은 초월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무한일 수도 있습니다. 노군이 자세히 검토하겠으나, 무한은 일상적 언어로 표현하면 뭔가 일그러지고 헝클어지는 묘한 기표입니다. “초월”이나 “무한”, “신” 등은 언어나 경험, 혹은 그런 것들로 인식되는 세계를 벗어나 있는 것에 대해 붙인 가상의 이름들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것에 대해 이름을 붙일 수 없는데, 이름을 붙이는 것, 개념화하는 것은 상징의 세계 속에 무언가를 제한하여 고정시키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초월적인 것을 논의하기 위해 “초월”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말하는 순간 그것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도덕경道德經>의 첫 문장은 “도를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게 된다(道可道 非常道)”이며, 불교에서는 아예 이름 붙이길 포기하고 “비었다(空)”고만 말한 겁니다. 마찬가지로 “신 관념”은 없습니다. 관념이 되는 순간 신은 사라지는 까닭입니다. 실제로 모세 앞에 나타난 신은 이름을 말하길 거부하였습니다. 야훼, 혹은 여호와라 읽는 YHWH란 사실 유대교 전통에서는 발음할 수 없는, 하나의 기호였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신이 어떻게 생겼냐는 아테네 시민들의 물음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에게 바쳐진 빈 제단을 가리켰습니다. 나는 편의상 이 “불가능한 이름”을 ( )라는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데카르트가 확신한 “나”의 존재방식이 정확히 그 반대라는 겁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내가 존재한다고 발언할 때마다”, “얼마동안? 내가 생각하는 동안”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생각을 멈춘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나”라고 하는 관념은 생각하거나, (그 자신을 포함한) 관념이 떠오르거나, 그 이름이 발언될 때 존재합니다. 한편 ( )은 사실 그 관념을 떠올리거나 발언하는 순간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결국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결국 데카르트적 언어에서의 “신”은 “나”의 원인이 아니라, “나(생각)”의 역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라캉은 진정한 주체, 실재를 표현하기 위해 데카르트의 명제를 뒤집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지만, 라캉은 “나는 생각하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는 곳에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 겁니다. 데카르트는 실제로 코기토를 초과하는 ( )로의 침잠을 경험했지만, 그것을 하나의“관념”으로 제한하면서 실제로는 신의 존재가 아니라 “신이라는 이름”의 존재를 증명하고 만 것입니다. ( )은 데카르트가 붙잡고, 의지하고, 그것만은 의심하지 않으려고 전력을 다했던 “나의 존재”라는 선입견을 포기하는 순간 절대적인 “비어 있음” 속에서 진정으로 자기 모습을 드러냅니다.
10. 데카르트의 명상을 따라가면서 주절거린 이 잡담을 통해, 나는 데카르트의 언어를 재구성하기보다는 데카르트의 경험을 재현하려고 했습니다. 눈치 채셨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데카르트의 “의심”에는 뛰어들어 참여하였고, 데카르트의 “확신”에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의심을 멈추고 확신으로 넘어가는 간극에서 그가 시대적 한계 때문에 발견하지 못한 것을 드러내 보려고 하였습니다.
글을 함께 읽으면서 나는 노군에게 “(의심하는) 데카르트는 미친 놈 같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광인의 가설”, “꿈의 가설”, “악령의 가설”을 가지고 자기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의심하고 부정하는 데카르트는 확실히 어떤 의미에서는 광기를 보이고 있습니다. 데리다 역시 <글쓰기와 차이> 속의 푸코론에서 비슷한 주장을 합니다. “광인”은 데카르트의 첫 번째 가설에서 잠깐 등장했다 사라지지만, 사실은 성찰의 주체 속으로 내면화하여, 마침내 그 내재적 광기로부터 이성적 사유가 구성된다는 겁니다. 이런 광기 내지 과장을 통해서 마침내 철학자는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것들,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들, 그리고 자신의 세계마저 초월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후설과 데리다의 공통된 의견은 데카르트가 그런 엄청난 기획을 세워 놓고는 철저하게 추구하지 못하고 자기 시대의 벽에서 멈춰 섰다는 겁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데카르트는 자기를 구성하는 신체를 모두 부정하고, 영혼에 속하는 요소들도 하나하나 소거해 갔지만, “나”를 모두 없애진 못했습니다. 사실 코기토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광기가 구성한 하나의 결과물이며 고정점입니다. 만일 그것마저 부정했다면 그는 그 너머의 말할 수 없는 진리에 다다르거나, 그대로 정신이 붕괴되었을 겁니다. 결국 그는 그 너머의 영역에 다다르기 위해 “코기토”라는 옷으로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코기토”라는 옷은 관념이기 때문에, 규정될 수 없는 ( ) 역시 “신 관념”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 ). 지금 막 시작하는 이 팀 블로그의 이름은 두 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제안한 “잡담”이고, 다른 하나는 노군이 제안한 “발광”입니다. “잡담”은 특정한 분과학문의 관심영역이나 글쓰기 방식에 갇히지 말고, 자유롭게 얘기를 나누면서 공부해 보자는 취지입니다. 주제와 목적을 가진 학문적 글쓰기와는 달리, 화제만을 두고 놀아보자는 마음으로 하는 글쓰기는 서로 다른 분야를 공부하는 우리들(그리고 앞으로 더 참여할 사람들)에게 자극적인 시도입니다.
“발광”은 원래 發光이었습니다만, 이 첫 잡담을 하는 동안 發狂이라는 의미가 들어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데카르트가 시도한 자기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유의 모험, 그것은 일종의 광기입니다. 그 야생적 광기를 마음껏 언어화할 수 있는 게 바로 잡담이라는 방식이라고 봅니다. <성찰>이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같은 글은 논문과 같은 제도적 글쓰기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여전히 그건 빛을 발하는 일입니다. 나는 물리학적 발광현상이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의미 있는 상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만, 데카르트의 길잡이였던 “자연의 빛”과 같은 빛이 광기에 사로잡혀 모험하는 방랑자들을 인도해 줄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두 가지 의미 모두에서) 발광할 겁니다.
제 1주제에 대한 글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다른 글은 여기 - http://luminescence.tistory.com/3를 참고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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