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흉흉할 때 이런저런 괴담이 도는 건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기록적인 기근을 겪고 있던 1671년 겨울 어느 날, 조선에서는 남관왕묘의 관우상이 피눈물을 흘리고 홍제동의 돌미륵이 저절로 움직였다. 지금 홍제역 뒤에 있는 홍제동 돌미륵은 석상이 아니라 돌벽에 부조된 마애불이다. 그러니까 불상 위치가 조금 바뀐 정도가 아니라 학교 괴담에 흔한 '움직이는 초상화'처럼 꼼지락거렸다는 말이 되겠다.
관우상이 피눈물 흘렸다는 얘기는 처음 봤는데, 즉각 연상된 건 세계 각지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성모상이었다. 요즘 유교의 신상(神像)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학자들의 논쟁에만 주목했는데, 물질로서의 신상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도 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유교에서의 성상(聖像) 파괴 논쟁에 대해 글 하나 쓰고 있다. 성상 파괴 논쟁이라니까 뭔가 기독교적인 냄새가 나는 것 같지만 사실 '성상'이라는 단어는 동아시아에서 계속 써 왔다. '불상'이 부처의 상이듯이 '성상'은 성인의 상,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공자의 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고려 때까지는 왕들도 누드상을 만들어서 거기에 옷을 입혀 제사했다고 하고. (북한 개성박물관에 있는 '왕건불상'이 그런 거다)
의외로 '우상(偶像)'이라는 말도 동아시아에서 쓰던 말이더라.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 사례는 별로 없고 그냥 사람의 모양을 본떠 만든 상이다. 태평어람에도 항목이 하나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널리 쓰던 개념이니까 성서 번역할 때도 이걸 참고로 했을지도.
이런 신상이 비판받은 건 송나라 이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도학자들 중에는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신들을 사람 모양으로 꾸며놓는 것을 싫어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주희는 공자의 상을 없애고 위패로 대신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1530년 명나라 가정제에 의한 대대적인 의례 개혁이 있을 때까지 국가제사에서 공자상은 계속 남아있었던 거 같다. 그런데 조선은 조선 초에 이미 문묘의 공자상을 제거하고 위패만 쓰고 있었다. 조선에서 주자학을 FM대로 실행하려고 했던 건 의례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던 듯.
이런 신상이 비판받은 건 송나라 이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도학자들 중에는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신들을 사람 모양으로 꾸며놓는 것을 싫어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주희는 공자의 상을 없애고 위패로 대신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1530년 명나라 가정제에 의한 대대적인 의례 개혁이 있을 때까지 국가제사에서 공자상은 계속 남아있었던 거 같다. 그런데 조선은 조선 초에 이미 문묘의 공자상을 제거하고 위패만 쓰고 있었다. 조선에서 주자학을 FM대로 실행하려고 했던 건 의례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던 듯.
2012년 10월 15일
다른 자료 찾다가 우연히 조선 초 불상에 금을 쓰지 못하게 규제하자는 상소문을 찾았다. 여길 보면 조선 초의 사람들은 부처의 얼굴이 '노랗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그리고 '석씨'의 얼굴이 노란 것은 세상에 까만 사람도 있고, 흰 사람도 있는 것처럼 그냥 인종에 따른 차이일 뿐으로 특별히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평도 하고 있다.
1828년에 청나라로 간 사신 일행 중 한 명이 쓴 일기에서 재미있는 기록을 보았다. 그는 우연히 연경에 있는 러시아 교회에 들어가서 십자가와 성화들을 보게 되었다. 십자가상이 흘리는 피에 대한 묘사가 잔혹한데, 필자는 그것을 진짜 피로 착각하고 있다. '이민족의 사교'에 대한 혐오감이 감각까지 지배했던 것일까.
歷覽至一所。扁鎖謹嚴。使之啓鑰而入。外間有隔障。皆以異木雕刻
<두루 구경하고 어떤 곳에 이르자, 문이 근엄하게 잠겼기로 자물쇠를 열게 하여 들어가니, 외간에 가로 막은 칸막이가 있는데 모두 특이한 나무로 조각을 하여 만들었고, 칸막이마다 모두 산발한 사람을 그렸다. 방 안은 구부정하게 사방을 벽돌로 높이 쌓았으며, 둥근 창문이 서로 비치는데 모두 유리를 사용하였다.
그 칸막이를 열고 안 칸으로 들어가니 주벽(主壁)에 죽은 사람 하나를 걸어 놓았다. 대체로 벽 위에 십(十)자로 된 나무 판자를 붙이고 사람의 두상과 사지(四肢)에 모두 쇠못을 박아 내걸어, 마치 거열(車裂)하는 형상과 같은데 완연히 옥골(玉骨)인 사람이었다. 피부와 살, 손톱과 털이 꼭 산 사람과 같은데 온몸이 나체로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으나, 머리에서 발까지 쇠못 자리에서 붉은 선혈이 쏟아져 뚝뚝 떨어지는데, 그 면목을 보니 방금 죽어 식지도 않은 것 같아 현기증이 나서 바로 보기 어려웠다.
또한 방 안에는 침향(沈香)ㆍ단향(檀香) 재목을 많이 사용하여 향기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고, 또 한 점의 바람도 들어오지 않아 음습한 기운이 냄새가 되어 피비린내가 완연하니 속이 메슥거리며 안정되지 않아서, 우연히 오게 되었지만 후회스러웠다.
마두가 그 연유를 물으니, 관의 오랑캐가 말하기를,
“옛날 야소(耶蘇)가 바로 서방의 신명한 성인으로서, 도학이 고명하고 영험한 변화가 헤아릴 수 없었는데, 요망하고 허탄하다고 죄를 삼아 이 같은 형벌을 받아 죽으매, 서양 사람들이 슬퍼하며 사모하여 사당에 모시되 형상대로 소상(塑像)을 만들었습니다. 이 뒤로부터 서양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풀어뜨리고 맨발을 하여 풍속이 되었소.”
하였다. 그리하여 사학(邪學)하는 무리들이 형벌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진실로 이 때문임을 알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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