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서문에서 라스무센은 “상징이 철학적인 상상력 및 해석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신칸트주의와 논리적 실증주의가 지배하는 방법론 속에서 상징의 의미는 축소되었다. 저자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적절한 철학적 방법론을 모색하고자 한다. 우선 상징은 그 자체의 규칙과 특성을 가진 특수한 언어 형태로 간주되어야 한다. 여기서 고려되어야 할 것은 상징의 정의, 그리고 상징의 해석이다. 그의 예비적 정의에 의하면, 상징은 논리적이기보다는 심미적, 개인적이기보다는 문화적, 과학적이기보다는 상상적인 언어이다. 한편 초기 현상학자들과 신칸트주의자들은 상징이 의식의 행위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고 보았지만, 라스무센은 상징은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해석되어야 할 어떤 것이라고 본다.
우선 기호와 상징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기호는 상식적인 의미의 세계, “문자 그대로의 것”을 의미하는 언어이다. 그러나 상징은 사물의 명료성을 소거하고 상식적인 이해를 혼란스럽게 한다. 현대 상징 해석의 경향은 상징을 기호로 환원해 상징이 지니는 상식적인 의미에 도달하고자 한다. 이런 관점에서 상징은 그릇된 것으로 규정되고,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자기가 소통하는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또한 신화와 상징은 “사회 조직”이나, “원시적인 과학적 탐구와 분석”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 된다.
상징의 해석에는 두 가지 난점이 있다. 첫째, 모든 해석은 전前 이해를 수반한다. 우리는 다른 문화의 상징을 해석할 때에도 자기 경험의 관점에서 유형화/범주화한다. 낯선 건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구체화하거나 아예 무시해버린다. 둘째, 상징에 대한 해석이 얼마나 타당성을 가지는가 하는 검증의 문제다. 자연과학적 검증이나 상징의 창출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등 경험적 방법은 불가능하거나 부적절하다.
따라서 상징 해석에는 인간학적인 검증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해석을 위한 철학적 토대를 구축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이론적 기반이 해석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징이 인간 의식의 필연적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토대가 필요하다. 라스무센이 구축하려는 철학적 토대는 “상징은 하나의 언어적 형태”라는 것이다. 상징은 단순한 언어 현상이 아니지만 언어를 통해 전달된다. 상징은 고유한 규칙과 특성을 가진 언어 현상의 현현이다. 그러므로 다의성을 가진 상징과 일의성을 가진 기호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상징을 언어형태로 보려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상징은 소통의 객체이면서 주체이다. 상징이 개인적 경험을 넘어 공적인 것이 될 때, 언어는 소통을 위한 일차적 수단이 된다. 또한 상징은 이해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상징이 소통된다는 것은 상징의 창출자와 수신자가 상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이해능력은 곧 언어능력이다. 마지막으로 상징은 사유를 낳는다. 상징은 반성, 즉 언어와 사유 사이의 상징관계를 통해 의미 있게 구성되는 언어적인 것이다.
1. 1장은 그러한 언어 이론을 구축하는 글이다. 상징은 언어 내에 있다. 그리고 상징 언어는 그 상징 형태의 규칙과 특성을 고려하면서 설명되어야 한다. 저자는 우선 현상학적 의식이론을 통해 의미가 어떻게 구성되는가 하는 문제를 제시한다. 전 반성적 생활 세계는 잠재적 의미의 세계이다. 또한 이 잠재적 의미는 의식되지 않으며, 문화적으로 주어진 유산의 일부이다. 이 잠재성의 영역에는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역할, 경험을 질서지우는 유형화, 보존된 과거의 시간인 기억 등이 기능하고 있다.
가능성의 영역으로서의 이 잠재적인 의미는 의식의 흐름 안에서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는 해석과 선택의 과정을 통해 현실화된다. 현실화된 의미는 인간 주체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현실화 과정은 분화를 동반한다. 현실화된 의미 세계는 동시적인 여러 수준, 즉 특수 의미 세계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는 분화의 양태로서 과학의 세계, 상식의 세계, 상징적 의미의 세계가 제시되었다. 상징적 의미 세계는 의미의 궁극적 기반을 탐색하고자 하며, 그 주의의 양식은 감정 이입과 상상이다.
이어서 라스무센은 이러한 특수의미세계의 구성을 언어의 구성과 연관시킨다. 어떤 수준에서도 “언어”와 “경험의 전체성” 사이의 동일성은 있을 수 없지만, 반성적인 수준에서는 “언어”와 “의식” 사이의 동일성이 존재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을 언어와 관련짓는 일이 되므로, 반성의 차원에서 언어는 의식과 동형이다. 그러므로 의식이 기능하는 방식에 대한 모델은 언어에도 적용할 수 있다.
앞의 의식 모델에서 잠재적 의미가 문화적으로 주어졌듯, 전체성으로서 언어는 근본적으로 사회적이며 전반성적인 의미 세계를 구조 짓는다.(첫 번째 계기) 의식이 특수의미세계로 현실화되듯이, 언어 역시 구체화, 현실화의 과정을 통해 특수 언어로 파악된다.(두 번째 계기) 이와 같은 모델을 통해서 몇 가지 오류들이 수정될 수 있다. 먼저 구조주의는 구체화 이전의 문법적 언어만을 다루기 때문에 언어에서 주체를 배제한 행태주의적 결론에 이른다. 또한 언어를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주체가 언어를 의도하는 방식에 따라 언어가 분화한다는 관점은 특정한 특수 언어의 해석틀을 다른 영역에 잘못 적용하는 환원주의를 피하게 해 준다.
특수언어로서의 상징 언어는 구체화의 과정에서 다의성을 가진다. 상징 언어는 실재의 여러 수준을 결합함으로써 독특한 의미 세계를 창조한다. 한편 이 현실화된 의미에는 여전히 문법적 언어의 규칙이 적용되고 있으며, 다른 의미 영역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 주체는 구조주의에선 무시당합니다만, 여기서는 의미를 구성하는 주체가 특수 언어로서의 상징을 구체화시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상징의 구성 역시 무의식에 의해 구조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비판할 수 있겠습니다. (전 그런 애 아닙니다만)
2. 엘리아데는 현상학적 동기와 구조적인 동기를 종합한 해석학을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아데의 주된 해석학적 문제는 상징, 신화, 성현의 출현으로부터 그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그는 우선 환원주의를 배격한다. 종교적인 형태는 그 자체의 구조에 맞는 해석학적 수단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스무센은 엘리아데가 환원주의를 초래하는 이론을 거부하면서 대상과의 “상호 주관적” 관계를 통해 나타나는 해석학을 설정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우선 엘리아데는 성聖의 환원 불가능성을 말하며 성을 이해하기 위해 성의 지향 양식을 포착한 점, 그리고 성스러운 양태가 지닌 지향적 특징을 포착하기 위한 원리인 “성속의 변증법”에 주목한다. 해석학에 대한 엘리아데의 업적은 “문제는 인식론적으로 제기되었지만, 그 해결은 구조적”이라는 점이다. 엘리아데에게 이해는 근본적으로 상상적 재구성이며, 그 재구성은 구조주의가 제공하는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상상적 재구성을 통해 성스러운 양태의 지향성이 드러나고, (현상학적인) 본질 직관적 재통합을 통해 이해가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 구조주의는 의식이나 주관성에는 무관심하다고 여겨졌으나, 엘리아데에게 있어 구조주의는 현상학을 보조해 주고 있다. 재통합을 주된 과업으로 하는 해석학은 환원주의와 정반대이다.
라스무센은 이러한 엘리아데론을 통해 구조적 해석학을 철학적 해석에 응용할 방법을 모색한다. 첫째, 상징과 신화가 철학적 성찰에 대한 전반성적 근거를 제공해 준다. 둘째, 이는 구조적, 형태론적 원리에 따라 현상에서 의미로, 지각에서 이해로 이행되어야 한다. 셋째, 상상적 재통합 과정은 본질 직관적 재통합 과정에 따라야 한다. (여기까지는 엘리아데의 반복) 넷째, 철학적 해석은 상징과 신화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에 대한 준거점으로서의) 인간학적 검증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 엘리아데에 대한 대단히 긍정적인 평가인 셈인데, 엘리아데의 형태론에는 역사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구조주의와 현상학을 종합한 엘리아데의 해석학에 역사성을 도입하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됩니다.
3. 라스무센이 리쾨르의 해석학을 검토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상징과 신화와 같은 특수 언어에는 인간학적 필연성이 있는가? 리쾨르의 철학적 인간학은 총체적인 시각을 목적으로 하는데, 현상학적 방법론은 변증법적 구조를 가진 의지에 속한 경험적 측면을 배제한다. 리쾨르는 방법론상의 문제를 세 번이나 개정하는데, 여기에서 특수 언어의 필연성이 제기된다.
인간학의 문제는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자유와 본성간의 변증법적 관계로 표현된다. 리쾨르의 지향성 이론은 의식을 일종의 투사로 바라본다는 특징이 있다. 여기에는 결정 과정(의지의 투사와 결단), 행동 과정(투사에 신체가 참여), 승인 과정(투사와 실행에 대한 “필연성의 승인”)의 세 가지 기본적 계기가 있다.
리쾨르는 <<의지의 철학>>의 <자유와 본성>에서 의지의 작용을 본질 직관적 방법을 사용하는 방법론상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를 통해서 “본성에 의해 알려지고 제한된 자유”라는 역설 밝혀지지만, 본질 직관의 중성적인 역설로는 악에 대한 실제 경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이어서 <오류적 인간>에서는 실존적 기술 방법을 통해 “오류와 결부된 자유”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법은 모두 자유가 가진 실제적인 한계, 즉 “실제적인 악”을 취급할 만큼 구체적이지 못하다. <악의 상징>은 이러한 현상학적 사고에서 나타나는 한계를 언어에 대한 고찰, 악의 경험이 담긴 신화와 상징 등 특수 언어에 관한 분석으로 넘어간 시도이다. 철학적 언어는 추상적 개념을 추구하지만 상징-신화 언어는 구체적이다. 상징은 기호와는 달리 이중적 지향성을 가지며 양극적이다. 또한 신화는 상징 해석을 위한 문맥을 제시한다. 상징-신화 언어는 중심적인 철학적 문제를 보완시켜주면서 철학적 사고의 기반을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상징과 신화야말로 악과의 갈등 속에 있는 인간이 지닌 자유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이런 시각은 상징과 신화라는 특수 언어의 해석학을 통해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특수 언어는 인간학적 필연성을 가진다. 이건 리쾨르가 상징-신화의 특수 기능을 인간학적 맥락을 통해 검증한 것인데, 인간 자유의 한계와 변증법은 악에 대한 신화와 상징을 통해 가장 철저하게 언표된다. 또한 악의 상징은 다른 양식의 담론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독자적인 언어이다. 이런 (논리적이 아닌) 인간학적 검증을 통해 철학적 사고의 영역에 신화와 상징을 재결합시키는 작업이 가능해진다.
⇨ 리쾨르는 직접 읽어본 적이 없지만 방법론에 대한 검증과 개정을 통해 총체적인 해석으로 나아가는 방식이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단 그 검증의 준거인 “인간학적”이라는 개념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4. 4장에서 라스무센은 엘리아데, 리쾨르, 레비스트로스에게서 얻은 통찰을 통해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통합하는 신화에 대한 이론적 접근을 모색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 해석과 관련해 19세기의 진화론적 전제를 구조적으로 전환하였다. 이 전환에 따라 신화는 진정한 언어 형식으로 간주되게 된다. 그러나 구조적(문법적) 모델은 무의식적인 사회적 행동 유형만을 한정지어 해석함으로서 한계를 보인다.
이러한 행태론적 가설은 구조와 해석을 연결시키는 시도를 통해 엄밀성을 회복할 수 있다. 즉 신화의 구조에 적합한 원리를 통해 신화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다. 오토가 종교적 선험성 개념을 통해 이런 접근을 처음 인식했으며, 엘리아데는 이런 원리를 대단히 풍부하게 논하고 있다.
신화는 일차적 의미를 배제하는 대신, 그것을 신화가 지닌 의미의 문자적 구현으로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의미가 파악된다. 해석자는 먼저 신화를 처음 믿었던 사람들처럼 그 일차적 진술을 경험해야 한다. 여기에서 추상적인 언어용법과 구체적인 언어 용법이 구분된다. 문법적인 차원에서는 이항대립과 같은 기호의 상호 관련성이 다루어진다. 한편 해석학적인 차원에서는 기호와 의미화 사이의 지향적 관계를 다루면서 신화의 일차적 형태와 그것을 정교하게 다듬은 이차적 형태 사이의 상관관계를 성립시킨다.
이것은 리쾨르에게는 문자적 의미와 상징적 의미를 상호 관련시키는 작업으로, 엘리아데에게는 문자적인 형태가 일차적인 의미망을 구성하여 이로부터 이차적인 의미양식이 나온다는 논의로 나타난다. 이어 라스무센은 고대 사회에서 신화가 기능하는 방식을 우주 창생 신화의 기본구조를 통해 서술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저자는 상징을 나타내는 형식인 신화의 해석의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의식과 연결된 언어의 맥락에서 볼 때, 신화는 다른 담론 영역에 의해 대치될 수 없는 그 자신의 독특한 규칙과 특성, 즉 그 자신의 구조를 지닌 특수 언어를 구성한다.
⇨ 신화 언어를 그 자체로 경험하고 그로부터 이차적 의미를 끌어내야 한다는 관점에는 동의하지만, 다른 시대, 다른 문화의 신화가 행하는 일차적 진술을 그걸 믿었던 사람이랑 같은 방식으로 경험하는 게 과연 언제나 가능할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신화가 언어라면 내적인 맥락만이 아니라 역사적-지리적 맥락에도 놓여 있는 거니까 콘텍스트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다면 일차적 의미부터 오해하기 쉬울 거 같아요.
5. 이어서 라스무센은 상징의 문학적 역할을 분석하고 문학적 담론과 종교적 담론을 연결시키는 작업을 시도한다. 종교언어의 범주인 신화는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철학적 범주에서 문학적 담론은 감성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들을 현상학적 언어 이론의 입장에서 보면, 각각은 궁극적 의미를 지닌 인간 경험의 특수한 영역을 나타낸다. 언어가 실제화 될 때, 언어는 개인의 특수 경험에 알맞은 특정 양식의 담론이 된다.
이런 이론은 인간 주체에 의한 의식의 구성에 대한 훗설의 현상학적 기반을 활용한 것이다. 초기현상학은 의식이 다양한 차원으로 드러나는 영역 개념을 통해, 다양한 차원에서의 “엄밀학”을 추구하였다. 한편 하이데거, 메를로-퐁티와 같은 후기 현상학자들은 구체적인 면에서 불충분했던 훗설을 비판하면서 의식이 언어에 반영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라스무센은 이 경향을 따라 언어가 의식처럼 인간 주체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에서 “의식 영역 이론”을 “언어 영역 이론”으로 전환한다.
인간 주체에 의해 형성된 언어는 잠재성에서 실제성으로 옮겨오면서 인간 주체에 의해 형성된다. “언어란 무엇인가?” 하면, 잠재성으로서의 언어는 스스로 연결된 기호의 체계로서 하나의 커다란 담론체이다. 한편 인간 주체에 의해 실제로 사용된 언어는 특수 언어로 구성되며 영역성을 가진다.
시적 담론, 종교적 담론, 과학적 담론, 정치적 담론 등의 특수 언어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표현될 수 없고 생각될 수 없는 언어 양태와 연결된 경험 때문에 씌어졌다.” 문학적 담론과 종교적 담론 사이에는 잠재적인 연관성이 있다. 이들 담론은 공통적으로 상징성을 가진다. 해석학은 시와 종교와 같은 상징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기반을 둔다. 해석학적 방법에 의하면, 불분명하지만 풍부한 의미를 가진 상징은 명백하고 자명한 것을 나타내는 “개념”과는 구별된다. 또한 상징은 하나의 단어나 대상에 여러 의미를 결합시키며, 리쾨르에 의하면 이중적 지향성을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상징은 인간 경험의 독특한 일면을 나타내며, 다양한 경험적 측면을 하나의 설명으로 연결시킨다. 시적, 종교적 상징은 문학과 종교가 각각의 언어 속에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며, 양자의 연결은 상징을 기반으로 한 해석학의 발전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 언어이론은 1장 논의의 반복이고, 상징을 기반으로 문학 담론과 종교 담론이 연결될 수 있다는 건 새로운 아이디어입니다. 한편, 문학 담론과 종교 담론, 이를 테면 시와 신화가 표현하는 경험 사이의 차이가 뭔지 궁금하네요. 우선 그걸 알아야 양자를 연결시키는 게 의미가 있을 테니까요.
6.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그 동안 상징의 논의에서 배제된 사회 정치적 현상으로서의 상징의 변혁적 역할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변혁 의도는 문자적, 일상적인 것보다는 상징적인 구성에 관련된다. 먼저 라스무센은 도구적 이성과 변증법적 이성의 갈등에 대한 신마르크스주의자의 분석을 다룬다. 마르쿠제에 의하면 일차원적 사고나 테크놀로지적 합리성으로 구성된 언어는 억압양태로서 기능하고, 정의와 같은 보편 개념을 구체화한 언어는 사회 변화를 위해 기능한다. 라스무센은 보편 대 특수라는 마르쿠제의 논의를 언어의 “문자적 용법”과 “상징적 용법”을 구별하는 방식으로 개정한다.
유토피아적 상징체계는 상징체계가 사회적 변혁에 기여하는 점을 잘 보여준다. 고대적인 동시에 보편적으로 상상되는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와 모순된다. 또한 유토피아적 수사가 실천되거나 구현될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반역사적이다. 그러나 유토피아의 상징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동기화의 기반을 마련해 준다.
통시적 관점에서, 유토피아적 가정을 채택하면서 상징은 해당 사회 집단의 잠재적 투사가 된다. 사회는 상징의 노선을 따라 스스로 분해되면서, 인식되지 않는 현재 상태에서 궁극적 목표에 대한 고양적 인식으로 변화한다. 변혁의 첫 단계인 “기층 인식의 단계”에서 사람들은 현재의 상태를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변혁의 두 번째 국면인 “반성의 단계”에서는 이런 무의식적 상황에 상징이 부여된다. 이 의식화의 부정적인 면은 일상의 상식적 성향을 투사된 이상과 대립시킨다. 한편 긍정적인 면에서 상징은 특정한 사회 집단이 변혁의 목표를 향해 자기를 투사하게 한다. 변혁의 세 번째 단계인 “결정의 단계”에서는 상징이 선택 가능성을 제시한다. 한편 상징은 특정 집단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유토피아적 상징체계를 선택하여 그 실현을 향해 자기를 투사하는 집단은 반대되는 대안의 상징을 택하는 집단과 갈등 관계에 놓인다.
이 “집단 결정”에 대한 확장된 논의를 위해 저자는 사르트르가 말하는 군집성에서 집단 형성에 이르는 변혁의 개념을 도입한다. 군집성은 현대 생활의 전형적인 범례로서, 군집적 집단으로 모인 개개인은 소외화, 객체화된다. 군집적 관계였던 피착취 집단은 내면적 요구와 특히 다른 집단으로부터의 위협을 받으면 일체감을 가진 집단이 된다. 이 집단 형성 과정에 매개체가 되는 것이 상징이다. 저자가 든 60년대 미국의 “블랙 파워 상징”과 같이 상징은 의식을 변혁하여 새로운 집단 정체감을 이루려는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상은 사회 정치적 변혁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상징의 통시적 모델이다. 한편 이 문제를 상징의 동시성 모델에 근거해 보게 되면 과정에 대한 관심에서 구조적 문제로, 변증법인 방법론에서 비교 방법론으로 넘어가게 된다. 저자는 원형과 반복에 대한 엘리아데의 논의와 총체성의 의미를 구성하는 다양한 의미 영역의 상징을 순환적으로 해석하는 브라운의 논의를 끌어들인다. 상징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반복하며, 이 반복의 맥락에서 변혁이 일어난다. 상징, 그리고 인간의 상상력은 경계를 초월한다. 상징은 다양한 형식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된 구조를 전달하는데, 정치적 상징이 현현하는 순간들은 그 구조에 의해서 의미 있게 된다. 또한 상징 속에서 스스로를 나타내는 의식의 구조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 68혁명 직후에 나온 글이라는 티가 팍팍 납니다. 상징이 변혁을 고양시키는 과정에 대한 “통시적 모델”은 흥미로운 분석입니다. 그런데 비교작업인 “공시적 모델”은 그다지 납득이 가지 않는군요. 변혁에 대한 종교상징을 제대로 해석하기 어렵다는 게 엘리아데의 약점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억지로 끌어들인 느낌이 강합니다. 브라운에 대한 논의도 시적이거나 종교적 상징이었던 게 경계를 넘어 정치 상징이 되기도 한다는 말인데, 좀 더 정교한 작업이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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