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에드먼드 리치, “모세에게 왜 누이가 있었는가”
-『성서의 구조인류학』 3장-
조나단 Z. 스미스가 지적한대로, 구조주의의 비교에는 하나의 딜레마가 있다. 비교를 하려고 하면 역사가 사라지고, 역사적(계보학적) 분석을 하려고 하면 비교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자료에 대해 구조주의적 방법을 교조적으로 적용하지만 않는다면 피해갈 수 있는 딜레마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단, 리치의 이 글은 구조주의가 역사를 포기할 때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리치는 ‘역사’와 ‘신화’를 대립적인 것으로 놓으면서, 성서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신화적 진실’로 읽어야 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성서 ‘속’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일 수 없다는 우리로서는 당연한 이야기가 그 텍스트가 성립되었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오류들을 정당화할 수 없다. 또한 ‘신화’를 초역사적인 집단적 무의식에 속하는 “성스러운 이야기”인 것처럼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도 없다. 그러니 성서 속의 이야기들은 ‘역사적 이야기’는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기록된 이야기’인 것이다.
리치는 신약성서는 이미 성립된 구약성서(히브리성서)의 이야기들을 의식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며, 구약성서는 헬레니즘 시대 이집트의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신화를 반복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런 비교는 다른 구조주의적 신화 연구, 이를 테면 레비스트로스의 것과 차이를 보인다. 레비스트로스의 경우, 다양한 신화군을 수집하여 그들 사이의 변이관계를 통해서 구조를 인식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리치는 ‘원형 신화’가 선재하고, 다른 신화에서 등가물을 찾아 계열화시킨다. 이 방법을 통해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솔로몬, 예수의 이야기는 오시리스-이시스-호루스 이야기의 유형을 반복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문제는 그 ‘원형 신화’의 선택에 있어서 발견되는 시대착오이다. 그가 구약성서의 형성 연대로 보고 있는 헬레니즘 말기는 히브리성서가 아니라, 셀레우코스 왕조 치하에서 이루어진 70인역(septuaginta)의 번역 시기이다. 그가 토라 속의 이야기가 속한 구조의 이야기를 찾으려고 했다면 (심지어 문화적으로 그리스적이기까지 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의) 이집트가 아니라, 바빌로니아나 페르시아 등 6세기 무렵의 근동에서 자료를 선택했어야 했다. 이집트는 텍스트 속 이야기의 배경이지, 텍스트가 작성된 배경이 아니다.
좀 더 세부적인 문제들도 있다. 예컨대 “사회의 규칙을 어겨도 벌을 받지 않는 성스러운 영웅”이라는 개념은 별다른 검증 없이 전제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 등 여타 자료에서부터 일반화된 것으로 짐작되는 그런 식의 “영웅” 개념이 히브리성서의 신화 속에 적용될 수 있는지는 의심이 든다. 당장 아브라함과 사라의 결혼이 “근친상간의 계율을 어겼다”거나, 요셉이 “동족내혼의 규칙을 어겼다”라는 것은 텍스트 내에서의 시간을 무시한 시대착오이다.
또한 지리적 범주에서 광야를 ‘이집트/팔레스타인’ 등의 지역을 매개하는 중간적 범주로 놓은 것 역시 재고할 필요가 있다. 히브리성서 자료에서는 ‘농경인의 정주지/유목인의 광야'라는 범주화 또한 자주 발견되기 때문이다. 자료에서 ‘광야’가 매개적 범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된 경우이다. 이런 범주화를 통해 모든 자료를 설명하는 것은 정주민적 선입견이다.
더 이상 구조주의적 방법으로도 볼 수 없는 또 다른 문제는 인물들의 ‘이름’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이나 동일성을 구조분석으로 이어 가는 것이다. 예수-여호수아, 미리암-마리아, 밧세바-시바, 사라-이시스, 마리아와 마리아들, 살로메와 살로메들 등 이 글의 후반부는 거의 이름들에 의지해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터부시되는 여성’인 모세의 누이 미리암을 그와 같은 이름인 마리아들과 대응시키기 위해서, 서로 다른 인물인 마리아들을 모두 한 명의 ‘마리아’로 압축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당시 마리아(미리암)란 이름에 출신지나 부모, 남편의 이름을 붙여서 구분해야 할 정도로 매우 흔한 이름이었다. 같거나 유사한 이름과 같은 표층의 관계를 구조적인 계열 관계로 치환시키는 논의는 호사가들의 이야기거리로서는 흥미롭지만, 학문적인 설명으로서는 가치가 없다.
이 글이 발표된 1980년 당시, 성서신화와 고대 근동의 다른 신화들 사이의 구조적 유사성은 (적어도 학계에서는) 확인된 바였다. 그가 만약 구조주의라는 강력한 이론적 무기를 가지고 거기에 기여하거나 수정을 가하고자 했다면, 그는 비교적 후대에 의식적으로 구성된 성서신화들과 다른 신화들이 일치한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왜 몇 가지 지점에서 변이를 일으키는지를 밝혀야 했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근동신화와 구조적으로 일치한다. 그런데 왜 그 신화를 정리한 사람들은 왕가의 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떠돌이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로 바꾸어 놓았는가? 모세와 예수의 이야기는 유사하게 구성되었다. 그런데 왜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이라는 지리적 범주는 “역전”되어 있는가? 바로 이런 것들이 텍스트가 형성될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정치적 의도를 드러내 주는 물음들이다.
사실 이와 같은 대안들은 바로 다음 장인 “멜기세덱과 황제”에서 리치가 행하고 있는 작업과 가깝다. 여기에서 지적하였던 ‘텍스트 내적인 시대착오’들은 거기에서도 반복되지만, 그것은 구조주의적 통찰을 위해서 일정 부분 포기되어야 하는 부분인지도 모른다. (물론 연구자는 자신이 뭘 포기하고, 뭘 얻었는지를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모세에게 왜 누이가 있었는가”에서 리치가 새롭게 밝혀내거나 통찰을 제시해 주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 자료의 선택과 방법에 대한 성찰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글의 결론에 대해 검증하면서 끝내자. 왜 모세에게 누이가 있었는가? 왜 예수의 주변에는 젊은 마리아(들)이 있었는가? 리치에 의하면 그것은 “신은 부분적으로 여성이다”라는 종교적 사고의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글에서 거의 유일하게 독창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론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그는 “성서에서의 신은 남성이다”라는 명제를 전제하고 반론을 준비하는 대신, 그러한 인식이 나타나게 된 과정을 추적해야 했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성화(聖畵)와 복음서 자료 사이에 놓인 1000년 이상의 역사적 거리를 무시하는 대신에, 성모 숭배가 교리화되는 과정에서의 신학적 논변들과 대중적 신행들을 검토해야 했다.
구조주의적 종교 연구에서 역사적 요소에 대한 고려가 일정 부분 포기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방법과 자료에 대한 역사적 성찰까지 포기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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