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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발제

[발제]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1-3장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1~3장



 0. 피에르 클라스트르(Pierre Clastres, 1934-1977)는 프랑스의 인류학자, 민족학자이다. 그는 정치인류학 연구에서, 특유의 반권위주의적, 무정부주의적 관점을 실증적인 증거를 통해 뒷받침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학생시절 공산주의 학생연맹의 일원이었던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마르크스주의 혁명파 그룹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의 영향을 받는다. 철학을 전공하였지만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알프레드 메트로의 영향을 받아 아메리카대륙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인류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클라스트르는 수많은 현지 조사를 행했다. 1963년은 파라과이의 구아라키족 인디오와 함께 보냈다. 1965년에는 다시 파라과이에 건너가 구아라니족의 조사를 행했다. 출루피족에 대해서는 1966년, 1968년 2번에 걸쳐 조사를 행했다. 1970년에는 야노마미족의 지역에서 동료인 자크 리조와 함께 단기체재를 한다. 게다가 1974년에는 브라질의 구아라니족 지역에서 단기간을 보냈다. 그 해에 CNRS(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의 연구원이 되어서 , 논문집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발표하였다. 구조주의를 비판하고, 레비스트로스와 충돌한 클라스트르는 특히, 전쟁을 교환의 실패라고 파악하는 구조주의자의 관점을 비난하며, 사회인류학연구소를 퇴직하였다. 1975년에는 고등연구실습원의 제5부문장으로 취직한다. 그러나 1977년, 교통사고로 4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가장 유명한 저작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1974)에서, 클라스트르는 국가가 다양한 사회의 궁극적 형태라고 하는 진화주의의 개념, 순진무구한 자연상태라고 하는 루소주의적 개념 모두를 비판하고 있다. 그는 국가를 당시 정치인류학에서 점하고 있던 중심적인 위치에서 배제하고, 강제력의 개념을 기반으로 한 국가의 출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였다. 권력의 개념은 모든 사회에 있어서 처음부터 인식되고 있다. 인간이 권력에 대항하는 자율성을 지키려고 하는 자연스러운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 사회는 독재적, 권위적 권력이 확대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려고 하는 복잡한 기준을 짜는 구조라는 것이 지각된다. 국가는 위계적인 권력을 소유하는 법적인 마력이다. 특히 국가라고 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을 저지하려는 구조를 유지하는 데 실패한 사회에 있어서, 이 권력은 국가의 마력에 의해 합법화된다。이와 같이 클라스트르는 안데스의 거대한 문명과 아마존의 족장지배체제에 의해 형성된 작은 정치단위를 대비시켰다. 아마존의 족장지배체제에 대해서 사회집단전체는 계속적으로 불안정해지고, 족장이 그 특권을 권력으로 변환하려고 하고 있다.

 즉, 클라스트르의 핵심 주장은, “미개”라고 불리는 사회는 권력과 국가를 마직 발견하지 못한 사회가 아니라, 반대로 국가의 출현을 피하도록 구축된 사회라고 하는 것이다. 『폭력의 고고학』에서 클라스트르는 아마존의 사회에 있어서 사회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클라스트르에 의하면, 부족간의 싸움은 정치적 합병을 거부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 즉 권력의 이양을 막기 위한 방법이다. 권력의 이양은 규모가 큰 사회에 내재적으로 관계하는 제어불능상태를 일으킨다. “미개”사회는 물질적 초과와 사회적 격차를 금지함으로써 경제적, 계층적 차이를 거부한다.



 1. 코페르니쿠스와 야만인

  정치인류학은 권력의 본성, 원천, 역사의 따른 사회유형의 변화 등을 민족지적 자료를 통해 고찰한다. 먼저 클라스트르는 라피에르의 저서 『정치권력의 기초에 관한 시론』을 비평적으로 읽는다. 라피에르는 사회적 생활을 하는 동물들 가운데에서는 정치권력 비슷한 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정한다. 그리고 여러 민족지 자료들을 정치권력의 정도에 따라 분류한다. 그러나 권력 없는 사회에서 권력 있는 사회로의 급격한 단절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원시사회의 특징은 무문자, 생계경제 등의 이른바 ‘고대성’의 개념을 통해 이해되어 왔다. 무문자는 그렇다 치고, 원시사회는 기술적, 문화적 결함 때문에 잉여를 생산할 수 없다는 생계경제 개념은 서구 근대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있을 뿐, 과학적 개념이 아니다. 마샬 살린스는 구석기의 수렵 채집민 집단이 필요량의 두 배 가량을 생산하는 “최초의 풍요 사회”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석기시대의 농경민 역시 그렇지 않을까?1) 그렇다면 무문자, 생계경제라는 고대성 개념은 문맹이 대부분이고 빈곤 상태에 있었던 19세기 유럽의 프롤레타리아에게나 해당될 것이다.

 정치권력에 대한 평가 역시 생계경제의 관념과 마찬가지로 원시사회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포하고 있다. 정치권력을 대조하는 모델과 측정되는 단위는 서구 문명에서 발전되고 형성된 권력 개념(강제, 폭력, 위계적 종속관계에 의한 명령-복종 관계)에 의해 이미 구성되어 있다. 모든 민족은 자민족 중심주의를 가지고 있지만, 서구의 자민족 중심주의는 과학적 담론이 이데올로기로 왜곡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보편성의 영역에 자신을 둔다. 그러므로 서구의 정치권력 개념에 맞지 않는 사회에 대해 “권력이 없다”고 주장하거나, 생물학적인 메타포(맹아적, 미성숙)로 얼렁뚱땅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1) 권력이 있는 사회와 권력이 없는 사회로 분류할 수 없다. 정치권력은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것에 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강제적 권력과 비강제적인 권력이라는 기본적인 양식으로 나누어진다. 2) 강제로서의 정치권력(명령-복종 관계)은 권력의 유일한 모델이 아니라 특수한 사례이다. 3) 정치제도가 없는 사회에서도 정치적인 것은 존재하며 권력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니 권력 없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클라스트르는 지역에 한정한 정치인류학이 아닌 일반 정치인류학을 위해 다음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1) 정치권력은 무엇인가? 즉 사회는 무엇인가?

 2) 비강제적 정치권력으로부터 강제적 정치권력으로의 이행은 어떻게 발생하고 왜 나타나는가? 즉, 역사는 무엇인가?

 맑스와 엥겔스는 사회 투쟁 없이는 폭력으로서의 권력, 국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이것은 투쟁 없는 “원시공산제” 사회가 어떻게 폭력으로 이행하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한편 뒤르켐은 정치권력은 사회 분화를 전제한다고 주장하였다. 역사가 출발하는 이 최초의 단절을 이해하기 위해 민족학은 서구 문명을 중심으로 한 구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태양중심적 사고”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타자의 세계를 이해하게 할 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세계를 더 잘 이해하게 할 것이다. 

 2. 교환과 권력: 인디언 추장제의 철학

   대부분의 남아메리카 인디언 사회는 민주적 감각과 평등성을 선호한다. 부족민들에게 있어 정치적 분화는 미미하고, 추장들은 거의 전적으로 권위가 없다. 로위는 이런 형태의 추장을 ‘명목상의 추장(titural chief)’이라고 명명하고 그 특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1) 추장은 “평화의 중재자”이다. 그는 집단 내부의 평화와 조화를 유지해야 하지만 강제력은 없다. 2) 추장은 자기의 재화에 대해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의무나 속박에 가까운 것으로 부족민들은 추장을 끊임없이 약탈할 권리가 있다. 3) 말을 잘 하는 자만이 추장이 될 수 있다. 추장은 매일 교훈적인 말로 부족민을 즐겁게 해야 한다.

 클라스트르는 여기에 한 가지 특징을 추가한다. 추장은 부족 내의 다른 남성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아내를 가질 수 있다. 일부다처제는 집단이 추장에게 부여한 권리이고, 나머지는 추장이 집단에게 행해야 할 의무이다. 이것은 증여와 대응증여라는 교환의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이 교환은 부등가적이고 추장의 지위는 부러움을 사지 않는다. 추장은 많은 아내의 노동력을 통해 더 많은 생산을 할 수 있지만, 집단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자기 능력을 초과하는 요구를 지속적으로 들어주어야 한다.

 이들 사회에서 권력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집단이 권위를 거부하고 권력을 부정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들은 본질상 강제력이고, 통제할 수 없으며, 사회에 적대적인 권력이 자연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집단은 표면적으로 추장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추장에 대한 집단의 협박이 숨겨져 있다. 추장의 말하기가 권위적이지 않고 무미건조하다는 것 또한 그것이 소통의 기능이 아니라 집단이 폭력의 위협에서 벗어나 있다는 보증이다. 일부다처제 역시 추장을 여성을 매개로 한 집단의 포로로 만든다. 즉, 인디언 문화는 “자신들을 현혹시키는 권력을 거부하기 위해 고뇌하는 문화”이다. 



 3. 독립과 외혼

   16~17세기 유럽인들은 안데스 고원지대의 잉카 ‘문명’과 열대우림 지역의 ‘야만’이라는 상을 확립하였다. 현대 민족학은 잉카제국에 대해서는 전체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도식을 적용하고, 삼림 지역 주민들에 대해서는 호전적이고 고립적인 상태라는 이미지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들 집단의 특징이 ‘확대가족’이라는 것, 그리고 개별 공동체가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는 것이 사실인지는 검토가 필요하다.

 열대림 지역의 사회 단위는 확대가족으로 보기에는 인구가 많고, 동족으로 보기에는 출계 양식(부계, 모계)과 거주 규정 사이의 형식적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각각의 확대가족은 독자적인 지도자를 두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하고, 동시에 집단 사이의 조정자이자 차이의 통합자로서의 추장이 존재한다. 서구사회와 마찬가지로 원시 사회도 동일성 내부의 차이, 동질성 내부의 타자성을 조정할 수 있다. 인디언 사회는 모계 혹은 부계의 출계선을 따라 결합된 몇 개의 확대가족으로 구성된 외혼 단위이다.

 이들 사회 대부분은 지역 외혼제를 행하고 있다. 지역 공동체는 경제생활과 종교생활, 내부의 정치적 조직 등의 측면에서 완전히 자율적인 방식으로 움직이지만, 외부 공동체에 대해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 이 정치적 지평의 확장은 혼인 연대를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지역 외혼은  근친혼 금기를 강화하는 소극적 기능이 아니라, 자기 공동체 밖에서 정치적 연대의 수단으로서의 혼인 관계를 맺도록 강제하는 적극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정치적 결합은 보통 3개 정도의 공동체 사이에서 행해지고, 가장 고도로 실현된 투피, 과라니 족에서는 다원적 구조의 대단위 형태가 된다.

 여기까지는 구조의 관점에 따른 검토였다. 통시적 차원에 따라 검토해 보면, 양계(兩系)적 외혼 단위는 서서히 단계(單系) 동족으로 변환될 가능성이 있다. 두 개의 친족 출계 가운데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은 연속성과 시공간적 통합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준다. 양계적 출계라는 합법성과 단계적 거주라는 현실 사이는 모순된다. 독립적인 사회-정치적 단위들이 구조적인 전체로 통합되면서 두 가지 가능성이 발생한다. 하나는 기존 단위의 점진적 해체와 사회계층화의 시작, 다른 하나는 단위들이 존속하며 강화되는 것이다.

 전자의 예인 남아메리카 북서부의 환카리브해 문화권의 여러 집단들에게서는 많은 군소 국가가 발생하였다. 여기에는 종교 권력과 군사력을 장악한 귀족들과 대다수 평민 대중들과 전쟁에서 포획한 수많은 노예계급이 존재한다. 후자의 예인 투피족에서는 포로가 주인의 공동체로 동화되는 등 계층화되어 있지 않다. 이들은 체계의 구축이 확정되자 오히려 개별성을 강화하여 외혼 단위가 소멸되지 않고, 구성단위 자체를 구조적으로 변형시킨다. 이들은 공동 거주가 아니라 출계 규칙에 따라 구성원의 귀속시키는 법을 변형시킨다. 즉, 투피 집단은 다원적 외혼 단위의 구조에서 다원적 동족 구조로 이행되었다.

 투피족의 동족 구조 공동체는 중앙집권화된 권위를 지니는 동시에 지방적인 하위 추장을 온존시키고 있다. 이들 사회는 넓은 지역에 거쳐 교역 등 복잡한 상호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투피족 가운데 몇몇 추장이 여러 마을에 대해 영향력을 미치는 영토적, 정치적 확장의 문제가 생긴다. 이들 가운데 몇몇 추장은 1만 명 정도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을 정도의 권위를 가졌다. 그런데 군사동맹 차원의 조직은 이보다 작은 단위의 집단에서도 발견된다. 투피족과 이들 부족 사이의 차이는 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다.

 따라서 체계를 형성하는 경향은 지역에 따라 다른 범위와 깊이로 실현되고, 그 차이가 문화권 내의 여러 문화에 “통시적” 차원을 가져다준다. 이들 사회는 역사가 없는 사회가 아니다. (시대구분의 의미가 아니라) 구조적 차원에서 정치적 역동성을 보이는 삼림지역 사회들이 ‘전역사적’이라면, 다른 주변 부족들은 ‘비역사적’, 잉카제국은 ‘역사적’ 문화의 예이다. 그러므로 열대림 지역의 고유한 원동력은 안데스 지역을 지배한 바로 그 역사가 가능하게 한 ‘조건’이었다.


1) 흔히 신석기혁명은 동물의 가축화, 농협, 직조, 토기 제작 기술의 발견, 인간의 정착 생활화로 정의된다. 여기에는 농업 이외의 모든 기술을 이동 생활로 간주하는 가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민족지적 증거로 볼 때 이것은 틀렸다. 아메리카나 그 외의 지역에서는 농경 생활을 하지 않으면서 정주생활을 하는 사례들이 발견된다. 심지어 기술혁명의 결과로 농업을 버리고 수렵으로 이행하는 사례도 발견된다. 농경생활을 하지 않는 사회는 기술적으로 뒤떨어지거나 문화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농경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248~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