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비평이론과 그 영향을 받은 이론가들에 있어 ‘서발턴’ 개념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에 대한 대안으로 널리 이용되어 왔다. 특히 라나지트 구하(R. Guha)나 가야트리 스피박(G. C. Spivak)과 같은 탈식민주의 학자들에게 의해 이 개념은 국가, 민족, 계급 등 거대담론에 포착되지 않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들로 자리잡았다. 대표적으로 구하는 서발턴을 “계급, 카스트, 연령, 젠더, 지위 또는 그 밖의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든 종속의 일반적인 속성을 가리키는 한 이름”이라고 넓게 정의하였다. 그러나 서발턴 용어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활용된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1980년대 이후다. 서발턴 연구자들이 그람시에게서 이 용어와 아이디어를 차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그람시는 서발턴을 개념어로 정의하거나 특수한 용법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사정이 있다. 그람시가 서발턴 주체의 문화에 주목하면서 대항헤게모니(counter-hegemony) 이론을 정교화 한 것은 『옥중수고(Prison Notebooks)』들을 쓴 시기였다. 그는 이 시기에 작성한 수고와 서간문들에서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몇 가지 은어들을 사용하였다. 이를 테면 ‘레닌’ 대신 ‘일리치’, ‘트로츠키’ 대신 ‘브론스키’라고 쓰는 식이었다. 또한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실천의 철학(fillosofia della praxis)’으로 대체하는 등, 검열을 피하는 것만이 아니라 종래의 개념을 재해석, 재정의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서발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람시는 당시의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라면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라고 써야 할 것 같은 부분들에서 일관적으로 ‘서발턴 집단’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서보다 훨씬 포괄적인 개념이었다.
“서발턴 집단들은 종종 지배 집단들과 원래 인종이 (또 문화와 종교가) 다르고 노예들이 그랬듯이 종종 다양한 인종들의 혼합체이다. ……고대 국가 및 중세 국가에서는 정치, 영토면에서나 사회면에서나 집중도가 미미했다(한 면의 집중도는 다른 한 면의 집중도의 함수일 뿐이다). 어떻게 보면 국가는 사회 집단들의, 때로는 다양한 인종들의 기계적 블록이었다. 특정한 경우에만 가혹하게 행사되는 정치적‧군사적 억압의 범위 내에서 서발턴 집단들은 그들 나름의 생활을 하고 나름의 제도 등을 지녔다. 때로는 이들 제도가 국가의 기능을 해서 국가를, 기능이 다양하고 종속되지 않은(non subordinate) 사회 집단들의 연합체로 만들었다. 나름대로 조직화된 집단 생활이 박탈된 유일한 집단이 고대 세계에서는 노예(및 비 노예 프롤레타리아트)였으며 중세에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노와 콜로누스였다.……근대 국가는 사회 집단들의 기계적인 블록 대신 지도적, 지배적인 집단의 적극적인 헤게모니에 대한 그들의 종속을 가져오고 따라서 일체의 자율을 폐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정당, 노조, 문화 단체와 같은 다른 형태로 부활한다.”
-옥중수고 25권노트 “역사의 주변에(Ai margini della storia)” 4절
이 세미나에서 우리의 관심사는 이런 서발턴 집단 개념이 민속 및 민속종교를 연구하는 데 어떤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는가이다. ‘서발턴 연구’가 하나의 분야로서 정립되기 전부터 (주로 이탈리아사에 대한) 민속학적, 문화사적 접근에서 그람시의 관점은 부분적으로 다루어져 왔다. 대표적으로 카를로 긴즈부르그(Carlo Ginzburg)나 에르네스토 데 마르티노(Ernesto De Martino) 등은 인도 학자들에 의해 서발턴 연구가 대두되기 전부터 민중문화사나 주술 연구에 그람시적 관점을 적용한 바 있었다. 그람시 스스로도 어느 정도 이들과 유사한 사례를 다룬 바 있다. 『옥중수고』의 25권 노트에는 통일직후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역에서 농민반란을 일으킨 다비드 라짜레티(David Lazzaretti)라는 인물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는 1834년 이탈리아 중부 아르치도쏘(Arcidosso) 출생해서 30대까지 마부로 일했다. 그러다 1868년 동굴에서 참회 기도 중 자신의 조상이 옛 프랑스 왕의 서자라는 계시 받는다. 이후 공화주의와 천년왕국사상이 결합된 기묘한 신념을 가지고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반란을 일으켰다가 1878년 전투 중 처형당한다. 그람시는 이에 대해 “사회의 엘리트에게 서발턴 집단의 분자들은 항상 어딘지 야만적이고 병리적인 것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민속종교를 서발턴적 집단의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민속종교의 저항적, 변혁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그러나 그람시를 엘리트주의적 전위사상가로 그리는 연구자들은 민속 신앙(popular belief)이 대항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저항에 일정한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람시가 이를 대놓고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장 피에르 리드(Jean-Pierre Reed)는 이들이 민속종교에 대한 그람시의 관점을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확실히 서발턴 집단의 ‘사상’에 대한 그람시의 평가는 이중적이다. 리드의 분석에 의하면 그람시가 민속(folklore), 상식(common sense), 민속 종교(popular religion) 등으로 부르는 서발턴 집단의 세계 이해는 그 자체로는 파편적이고, 지배 체제에 종속되어 있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그가 ‘실천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세계에 대한 체계적이고, 일관적이며, 변혁적인 인식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러나 리드의 주장은 그람시주의의 혁명 시나리오에 있어 ‘실천의 철학’은 엘리트 지식인에 의해 일방적으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람시에게는 두 부류의 지식인이 있다. 전통적 지식인(traditional intellectual)이 현 체제를 정당화하는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데 복무한다면, 서발턴 집단과 연대한 유기적 지식인(organic intellectual)은 그들과의 ‘교육적 관계’를 통해 대항-헤게모니 전략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리드는 이 과정을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의 용어를 빌려 서발턴적 신앙의 재접합(Re-Articulation)이라고 부르고 있다. 대항헤게모니는 민속 신앙(popular beliefs)과 분리될 수도 없고, 그것과 독립적으로 펼쳐질 수도 없다. ‘민속 신앙’이나 그 비슷한 개념(상식, 민속, 종교 등)들은 하나의 물적 힘(material force)로, 그 모순, 파편성, 비체계적 특성, 그들 사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연하고 탄력적이라는 점에서 문화적 자산을 보유하고 있고, 공식적 세계 이해의 반대에 서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자산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산들은 유기적 지식인의 지도와 서발턴 집단 스스로의 참여를 통해 재의미화, 대항헤게모니 지향으로 열리게 된다. 즉, 그람시에게 서발턴적 사고 형태들은 허위 의식이 아니라, 대항 헤게모니적 사고와 행동의 참조점들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옥중수고』 27권(“‘민속’에 관한 고찰”)의 다음 구절들은 민속에 대한 그람시의 관점을 잘 드러내 준다.
“민중(popoli), 즉 지금까지 존재했던 온갖 형태의 사회의 종속적이고(subalterne) 도구적인 계급들의 총체는 정의상 다듬어지고 체계적인 개념, 모순적인 발전 속에서 나름대로 정치적으로 조직되고 집중된 개념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이 세계관은 다듬어지지 못하고 체계적이지 못할 뿐 아니라 다층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지 다양한 것들이 병존한다는 뜻에서만이 아니라 가장 조야한 것부터 그렇지 않은 것까지 두루 섞여 있다는 뜻에서도 그렇다. 나아가 역사 속에서 계승되어온 갖가지 세계관과 생활관의 단편들이 소화되지 않은 채 덩어리를 이루고 있으며 그 대부분은 다름아닌 민속에서나 훼손되고 오염된 형태로 그 잔존 기록을 남기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민속은 진기한 것, 이상한 것, 고풍스러운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대단히 심각한 것,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만이 민속 교육은 더욱 효과가 있으며 다수 대중의 새로운 문화 창달에 기여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근대 문화와 민중 문화 내지 민속 사이의 단절이 사라질 것이다. 이런 종류의 활동이 심도 있게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지적인 면에서 종교개혁이 개신교 국가들에서 이룩한 것과 맞먹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람시의 실천적인 관점이나 전략들을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종교 연구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서는 몇 가지 단상들을 제안하는 것 정도로 마무리 짓고자 한다. 브루스 링컨(Bruce Lincoln)은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현 체제의 헤게모니 집단과 다른 세계관이나 실천을 제시하는 종교를 ‘저항종교(religion of resistance)’, 체제유지적 이데올로기나 기구에 대해 실질적인 공격을 가하는 종교를 ‘혁명종교(religion of revolution)’로 개념화한 바 있다. 더욱 세부적으로는 단지 지배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종교와 다를 뿐인 저항종교적 실천들이 ‘중간 계급’의 종교적 지도자에 의해 조직되고, 이것이 역사적, 사회적 환경에 따라 더욱 강한 저항성을 띄고, 결국 다른 집단과 연대하고 물리력을 확보하게 되면서 혁명종교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중간 계급’의 종교적 지도자의 역할은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의 역할과 대응된다. 그리고 그들이 ‘재료’로 삼는 것은 일상적이고 그다지 변혁적이지도 않은 민속종교의 세계인식과 실천들이다. 그 ‘재접합’과 ‘재배열’의 과정, 논리, 형태들을 밝히는 것은 민속종교에 대한 역사적 연구의 한 분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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