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다지역 사람들의 슬픈 운명
지금까지 제2성전 파괴 이후 유다지역 사람들에 대한 강제추방은 없었으며, 유다지역 농경민의 대규모 이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이 시기 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들에서 ‘유대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상당부분 개종에 의한 것이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유다지역 주민들 대부분의 역사적 운명은 어떤 것이었는가? 이 질문은 유대 민족운동 초창기에 등장했지만, 이후에는 잊혀졌다.
이츠하크 베어와 벤 시온 디누어 등 대부분의 학자들은 강제유배의 시기를 7세기 이슬람의 정복 때로 지연시켰다. 바르 코크바의 반란 이후 이 시기까지 그다지 줄지 않았던 유대인 인구가 이 시기에 눈에 띄게 감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러한 감소가 일어난 건 유대인들이 그 지역에서 뿌리 뽑혀 나갔기 때문은 아니었다. 강제추방에 대한 역사적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슬람군은 정복지의 종교가 일신론일 경우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유대인들은 추방은커녕 정복자들에게 협력하였고, 심지어 비잔티움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 억압받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오기도 하였다.
이 시기 유대인 인구의 감소와 이슬람 인구의 증가는 강제추방과 이민족 이주가 아니라 개종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교의적으로 갈등을 겪고 있던 그리스도교에 비해서, 세금을 면제받을 수 있는 이슬람으로의 개종은 저항감이 적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유대 엘리트들은 배교를 은폐하는 경향이 있었고, 시오니스트 역사학도 이를 ‘민족’을 버린 것으로 해석하여 역사적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2. ‘땅의 민중’을 기억하는 역사와 망각하는 역사
텔아비브대학의 역사가 아브라함 폴락은 1967년에 “이스라엘 땅에 사는 아랍인들의 기원”이라는 에세이를 발표하였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를 점령한 직후였다. 그는 사아디아 가온이 ‘신성한 언약을 저버린’ 이들, ‘예루살렘의 이스마엘인들’, ‘주께 등 돌린 이스라엘의 적들’이라고 부른 이슬람교 개종자들을 다루었다. 폴락은 유다지역 사람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보았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농업에 종사하는 ‘땅의 민중’(people of the land)들은 계속 그 지역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강제추방과 이민족 유입이라는 역사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폴락의 연구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시오니스트 정착 초기, 팔레스타인 민족주의가 출현하기 전에는, 현지 주민 다수가 유다지역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생각을 상당히 많은 이가 받아들였다. 1882년에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빌루’(BILU) 운동 지도자였던 이스라엘 벨킨드는 팔레스타인 지역 고대 주민들과 그가 운동을 벌이던 당시의 농민들이 역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바르 코크바의 반란 이후 땅을 버린 이들 다수는 상류층과 학자들, 도시민들이었으나 땅을 경작하는 이들은 그들의 땅에 계속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이 지역의 많은 지명들에는 히브리식 이름이 보존되어 있었고, 매장 장소 역시 이슬람식 묘지와 유대식 묘지가 공존하고 있었다. 현지 방언에는 히브리어와 아람어 단어들이 섞여 있었다. 그는 현지의 ‘펠라힌’들을 ‘우리 자신의 혈육’이라고 보고 히브리 학교에 무슬림학생들도 받아들일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시오니스트 좌파 이론가 베르 보로코프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는 시오니스트 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에 정착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우간다논쟁에서 헤르츨 등에 대한 반대 입장에 섰다. 그는 팔레스타인 펠라힌이 유대인들과 종족적으로 가까우며, 고대 유대 및 가나안인의 직계후손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현지 주민들이 새로운 정착민들을 더 잘 받아들여 줄 것이고, 결국 히브리문화에 완전히 동화되리라는 것이었다.
뒤에 이스라엘 총리가 되는 다비드 벤구리온과 대통령이 되는 이츠하크 벤츠비도 보로코프의 입장에 동의하여 1918년에 『에레츠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Eretz Israel in the Past and in the Present)를 썼다. 그들은 펠라힌이 7세기 아랍 정복자들의 후손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유다지역 농민들의 후예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유대인이 강제추방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30년 후의 이스라엘 독립선포와는 달랐다. 두 저자는 현지 아랍어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 및 언어지리학의 도움을 받아 펠라힌의 유대 기원을 밝히려고 하였다. 또 그들은 펠라힌의 법률인 “샤리아트 알칼릴’(Shariat al-Khalil)”를 구전된 아브라함의 법률로 보았다. 이슬람으로의 개종 역시 조세 문제만이 아니라 ‘땅에서 쫓겨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으로 정당화되었다.
이런 통합주의가 설득력을 잃게 된 것은 1929년에 아랍인들의 봉기 및 헤브론 유대인 학살사건, 1936~39년의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 이후였다. 초기 시오니스트들은 ‘저급하고 원시적인’ 현지 오리엔탈문화를 쉽게 동화시킬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지 민족주의의 출현과 폭력적인 저항 이후로, ‘유다지역 농민의 후손들’은 유대 민족의식에서 잊혀졌다. 또 다른 위험은 통합주의가 ‘토착 주민’에게 너무 많은 역사적 권리를 허용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근대 팔레스타인 펠라힌은 아라비아반도에서 건너온 이주자가 되었다. 이후 초기 이슬람교는 유대인들을 개종시킨 게 아니라 그저 유대인들에게서 땅을 빼앗아버린 게 되었다.
서기 7세기에 일어났다는 가상의 유배는 제2성전 몰락 후 대중적 강제추방이 있었다는 근거 없는 종교적 내러티브를 대체하였다. 또한 펠라힌이 유다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논지도 대체했다. 중요한 것은 어쨌든 유대인들이 강제추방을 당했고, 세상 구석구석을 방랑하다가, 시오니즘에 의해 주인 잃은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는 민족 신화였다. 이 신화에서 그 땅은 아랍 지배자들에게 속한 적이 없었던 것이 된다. 그래서 땅 없는 민중이 민중 없는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 이 부분에서 다루어지는 문제들은 근대적인 ‘유대인’ 개념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종교적, 지역적, 종족적 정체성이 충돌하는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초기 시오니즘에서 이들 정체성을 연결시키는 방법은 다양했으나 점차 전형적인, 단순화된 민족 신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저자는 그런 역사적 질문들이 ‘망각되었다’고 언급하고 있지만 그 망각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일어난 것일까?
§. 또한 이 신화가 세계적으로 유포되어 지구적인 헤게모니를 쥐게 되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당장 언론과 교육에서도 추방과 귀환이라는 유대 민족 신화는 상식으로 다루어진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독서 > 발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북공정의 논리.....ㅋㅋ (0) | 2013.11.10 |
---|---|
Koryak족에 대해. (0) | 2013.11.10 |
그람시의 대항 헤게모니 이론과 민속종교 (0) | 2013.11.10 |
[발제] 에드먼드 리치, "모세에게 왜 누이가 있었는가" (0) | 2011.09.30 |
[발제]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1-3장 (0) | 2011.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