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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발제

Sherry B. Ortner, Theory in Anthropology since the Sixties

[발제]


Sherry B. Ortner, Theory in Anthropology since the Sixties

(Comparative Studies in Society and History Vol. 26, No. 1, 1984)

 

 

한 승 훈

 

도입부에서 오르트너는 당시 분열, 파편화된 인류학계에 대한 에릭 울프Eric Wolf의 지적을 인용한다. 당시 인류학계는 학파나 진영, 이론적 소속에 대한 의식이 희미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르트너는 이런 상황을 임계성liminality의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범주가 해체되는 당시의 무질서는 또 다른 질서의 형성을 위한 토양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초에 나타난 새로운 질서 혹은 경향을 표현하는 상징이 바로 "실천practice(action, praxis)"이다. 이 경향을 이해하기 위해 논문의 전반부에서는 1960년대 이후 인류학계의 지성사를 다룬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1980년대의 실천이론의 특징과 이전 이론들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1960년대: 상징, 자연, 구조

 

1950년대 말 인류학의 패러다임은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레드클리프 브라운, 말리노브스키 등에 의해 성립된 영국의 구조기능주의이고, 둘째는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로부터 비롯한 미국 문화인류학이며, 셋째는 레슬리 화이트Leslie White, 줄리언 스튜어드Julian Steward 등이 중심이 된 미국의 진화론적 인류학이다. 이로부터 나타난 1960년대의 주요 학파들이 상징인류학, 문화생태학, 그리고 구조주의다.

당시 상징인류학에는 독립적인 두 흐름이 있었다. 클리포드 기어츠는 의미(세계관, 가치, 에토스)의 매개로서의 공적상징들로 이루어진 문화의 작동방식에 관심을 가졌고, 특정한 제도적 질서 속에서 행동하는 행위자의 관점에서 문화를 연구할 것을 강조하였다. 기어츠 자신은 행위 혹은 실천 이론을 그다지 발전시키지 못했지만, 이후 실천중심의 작업들은 기어츠-베버의 기반에서 나왔다. 한편 같은 시카고학파의 상징인류학자인 데이비드 슈나이더David Schneider 는 상징과 의미 체계의 내적 논리에 주목하면서 문화체계의 체계적 측면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는 사회적 행위와 문화를 분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실천 그 자체를 문제로 주목한 상징인류학자가 되었다.

한편 빅터 터너의 지적 배경은 맑스주의의 영향으로 변형된 영국 구조-기능주의였다. 그는 사회의 정상상태가 사회적 연대성과 기능적 통합이라기보다는 갈등과 모순이라고 보았으며, 그런 갈등과 모순 위에서 어떻게 연대성이 구성되고 유지되는가를 분석하였다. 기어츠와는 달리 터너는 상징을 통합된 사회의 통합된 에토스와 세계관(문화)을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과정을 작동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기어츠든 터너든 일반적으로 비과학적, 신비적, 문학적인 측면이 상징인류학의 한계로 거론되지만, 오르트너는 상징체계의 생산과 유지, 문화의 정치학에 대해 둔감했던 것이 진짜 문제라고 지적한다.

문화생태학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자연적, 사회적 환경에 대한 적응에 주목하였다. 이전의 진화론자, 특히 레슬리 화이트 등은 기술적 발명이 에너지 포섭과 인구 증가로 이어져 더 복잡한 사회/정치적 조직을 형성한다는 문화일반의 진화를 주장하였는데, 이 시기 문화생태학자들은 개별 문화들이 특정한 환경적 조건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형태로 진화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여기에는 문화나 사회의 내적 역학은 측정하기 어렵고, 일차적 원인으로 보기 어려운 반면, 환경과 같은 외적 요인은 고정되고 측정 가능한 독립변수라는 자연주의적 관점이 깔려 있었다.

그런 점에서 문화생태학과 상징인류학은 상극이었다. 한쪽에서는 다른 쪽을 비과학적이고 입증불가능한 얘기만 하는 유심론자라고 비판하였고, 다른 한쪽에서는 칼로리나 강우량이나 재면서 문화의 작용을 무시한다고 비판하였다. 오르트너는 이 대립이 유물론과 관념론, 해석적 에믹emic과 설명적 에틱etic, 나아가 서구 사상의 주관/객관, 자연/문화, /마음의 대립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고 있다. 1960년대 인류학내 지적 지형을 구성하고 있던 두 진영이 자기비판 없이 서로 싸우면서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제안된 구조주의는 복잡한 문화 현상 기저에 있는 보편 문법을 다루면서 1960년대 지성사 전반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구조주의는 표면적인 다양한 형태 아래에는 비교적 간단하고 통일적인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고 보았다. 오르트너는 구조주의가 주어진 구조 속에서의 단순한 변형과 구조 그 자체가 바뀌는 진짜 변화를 구분하게 함으로써, 역사적, 진화론적 인류학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구조주의는 미국 인류학자들에게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다. 구조주의는 문화생태학쪽에서 보면 상징인류학의 한 변형으로 보였지만, 상징인류학자들의 가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상징인류학은 에토스와 가치에 관심을 가졌지만, 레비스트로스의 의미 개념은 순수하게 인지적이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의미의 자의성을 강조했지만, 상징인류학자들은 상징구조의 형식내용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구조주의는 추상적인 구조를 행위자의 행동과 분리시켰는데, 이는 상징인류학자들의 행위자-중심주의와 어긋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구조주의는 사회와 문화 과정에 있어 의도를 가진 주체의 관련성을 부정하였고, 구조에 대한 역사 혹은 사건의 영향을 부정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 등장한 실천이론은 행위자와 사건에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에 대한 대안적 모델이었다.

 

1970년대: 마르크스

 

60년대 후반 이후 미국, 프랑스, 영국에서는 대항문화, 반전운동, 여성운동 등 급진적 사회운동이 전개되었다. 1970년대에는 현 체제의 모든 것이 의심받고 비판받는 가운데, 학계 내에서도 비판적 경향이 자리 잡았다. 인류학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식민주의, 제국주의와 인류학의 역사적 연계로부터, 부르주아적 서구 문화의 가정으로부터 형성된 이론적 틀 전반에 대한 물음도 제기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맑스주의는 주류 학계에 대한 이론적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이 시기 인류학 내의 주요한 맑스주의 학파로는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와 정치경제학이 있었다.

구조주의적 맑스주의는 상징인류학, 문화생태학, 사회인류학, 그리고 구조주의 자신을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비판하고 수정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문화생태학은 천박한 유물론이다. 자연환경, 기술발전 등 생태적 측면은 여전히 고려되었지만 그보다는 사회관계, 생산양식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관계란 영국사회인류학의 주된 관심이었던 가계, 친족, 반족 등의 사회조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 하에서 만들어지는 숨겨진 비대칭적 생산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 신좌파 학자들은 구좌파에 비해 문화적 현상에 높은 관심을 가졌는데, 문화는 이데올로기로 전환되어 사회재생산 과정에서의 그 역할이 논의되었다.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의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가 지적되고 있다. 첫째, 문화 개념을 이데올로기에 한정시키는 것은 그것을 사회관계의 특정한 구조에만 연결시켜 분석하게 한다. 둘째, 문화/이데올로기를 신비화라는 측면에서 보는 분석은 필연적으로 신화, 의례, 터부 등이 현체제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기능주의적 결론으로 이어진다. 셋째, 토대와 상부구조를 매개하는 방법을 제안했지만, 그런 유물론적, 관념론적 차원이 구분될 수 있다는 관념 자체에는 도전하지 않았다. 오르트너는 그런 점에서 구조주의적 맑스주의는 1960년대의 틀을 유지하였으며, 비역사적인 초기 인류학의 형태에 머물러 있었다고 보았다.

정치경제학은 정치사회학에서의 세계체제론, 저개발이론에 영감을 받아 형성되었다. 이는 개별 사회와 문화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광범위한 지역의 정치-경제 체제에 주목하는 경향이다. 외적 힘의 충격과 그에 대한 적응을 통해 변화하는 사회라는 관점은 문화생태론과 연결되지만, 문화생태론이 자연환경의 외적 힘에 적응하는 원시primitive” 사회를 주로 연구하는 데 비해, 정치경제학은 국가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외적 힘에 적응하는 농민peasant" 사회를 주로 연구하였다. 또한 이들은 문화적, 상징적 과정을 정치, 경제, 계급적 맥락과 연결시키면서 낡은 유물론-관념론의 대립을 어느 정도 해소하였다.

그러나 정치경제학 모델은 지나치게 임금, 시장, 착취 등 경제적측면에 집중한 나머지 권력관계, 지배, 조작, 통제 등 정치적측면은 경시했다. 또한 현지조사에서 만나는 모든 사회에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침투해 있다는 가정도 문제시된다. 이는 유럽 농민들에게는 사실이지만, “중심부에서 멀어질수록 타당한 접근이 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이 모델이 가정하고 있는 자본주의중심 세계관은 개별 사회의 구조와 역사, 그것을 작동시키는 상이한 맥락과의 관계를 분석하는 데 한계를 가진다.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와 정치경제학은 1980년대 인류학과 많은 가정을 공유하고 있다. 인간 행위와 역사 과정은 거의 모두 구조적으로, 체계적으로 결정된다. 구조의 숨은 손, 자본주의의 통제할 수 없는 힘이 사회/역사의 행위자이며, 인간은 주체가 아니다.

 

1980년대: 실천

 

실천, 행위, 수행 및 그런 행동을 하는 행위자, 개인, 주체를 강조하는 움직임은 구조주의에 대한 반응의 형태로 1970년대 초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인류학에서 실천이론은 부르디외, 기어츠 등에 의해서 제안되었고, 사회학에서는 앤서니 기든스가, 역사학에서는 E. P. 톰슨이, 문학에서는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practice, agent, agency를 이론의 중심 문제로 삼았다.

실천 기반의 접근은 다양하지만, 1980년대의 실천이론은 기존 사회학의 상징적 상호작용론(symbolic interactionism), 인류학의 트랜스액셔널리즘transactionalism과는 달랐다. 이들은 제도적 조직, 문화적 패턴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했지만 그것은 행위의 조건을 설정할 뿐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새로운 실천이론은 체계가 인간 행위나 사건에 강력한 영향을 준다는 관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체계가 어떻게 생산되고 재생산되는가, 어떻게 바뀌어 왔고 바뀔 것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였다. 또 다른 차이는 1970년대에서 이어진 맑스주의의 영향이다. 실천이론은 행위와 상호작용의 형태가 비대칭적, 지배 관계 속에서 가장 잘 설명된다고 보았다.

해석의 측면에 있어 실천이론은 맑스주의와 베버학파의 합병이었다. 1960년대까지 마르크스와 베버는 대립적인 유물론과 관념론으로 이해되었으나, 실천이론가들은 맑스주의를 베버적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베버가 행위자를 자기 모델의 중심에 두었기 때문에, 이들은 마르크스에서 인간의 실천이라는 주제를 강조하였다. 베버가 경제를 정치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이들은 경제적 착취를 정치적 지배에 포함시켰다. 베버가 에토스와 의식을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이들은 마르크스의 작업 속에서 비슷한 주제를 강조하였다.

 

1. “무엇이 설명되는가?”

실천이론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실천에 대한 체계의 영향, 체계에 대한 실천의 효과다. 이 모델에서 말하는 체계는 토대와 상부구조, 혹은 사회와 문화 같은 단위로 쪼개질 수 없는 전체다. 그리고 체계를 형성하고 해체하는 것은 시공간 속에서 주어지는 비대칭성, 불평등, 지배의 현실이다.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사용해 전체론에 대한 강조와 지배의 특권적 지위를 종합하려 하였다. , 헤게모니 개념은 특정한 권력, 영향의 불평등한 분배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문화보다 낫고, ‘전체 사회 과정을 인식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보다 낫다는 것이다. , 헤게모니는 특정 계급의 지배와 예속으로 파악된 문화. 실천이론은 이렇게 정의된 사회적/문화적 전체의 발생, 재생산, 변형과 그 의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2. 실천이란 무엇인가?

실천은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이다. 그런데 지배에 중심성을 두었기 때문에 의미 있는 실천 형태는 정치적 함의를 지닌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하는 거의 모든 행동은 정치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실천의 연구는 정치적인 각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형태의 인간 행동 연구다. 대부분의 인류학자에게 있어 행위의 단위는 개별 행위자(역사적 개인, 사회적 유형들)이며, 집단행동일 경우에도 집단은 방법론적으로 개별 주체로 다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실천이론에는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의 문제가 있다. 또한 실천이론은 행위의 능동성과 의도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행위는 규칙과 규범의 입법(en-actment) 혹은 집행(execution)이라는 파슨스, 소쉬르 등의 관점과 대비된다. 그리고 체계의 재생산에 대항하는 변화에 대한 관심도 실천이론의 중요한 부분이다.

 

3. 무엇이 행위의 동기가 되는가?

오르트너는 기어츠가 강조한 이익이론(interest theory)과 긴장이론(strain theory)를 대비시키며, 실천이론의 동기이론을 정리하고 있다. 이익이론은 행위자가 실용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유용한 것을 얻으려 하는 것을 행위의 동기로 보는 한편, 긴장이론은 사회심리적인 개념들(필요, 공포, 고통, 욕망)을 동기로 본다. 이익이론에서 행위자는 항상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고, 긴장이론에서는 행위자에게 작용하는 힘에 의해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오르트너는 이익이론이 비록 널리 공유되고 있지만, 행위를 단기전략적인 움직임으로 한정하며 심리적 요인을 결핍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행위를 (문제 해결, 이익 추구를 위한) 단기전략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형성되는 프로젝트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4. 실천과 체계 사이의 상호작용의 성격

기어츠를 비롯한 미국 인류학자들은 문화가 행위를 형성한다고 보고 그 과정의 메커니즘을 구체화했다. 1980년대의 실천이론가들도 근본적으로는 이 관점을 가지고 있으나 강조점이 바뀌었다. , 문화가 어떤 행위를 할 수 있게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행위를 제한하고, 배제하고, 억제하는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또한 실천이론가들은 문화적 지배를 강조하면서도 문화적 통제의 범위와 정도에는 한계가 있어서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실천은 체계를 형성하고 재생산하며, 체계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규범, 가치, 개념적 도식이 행위자에 의해 재생산되는 과정은 인류학에서 전통적으로 다루어 온 주제였다. 70년대 이전까지에는 이 과정에 있어 의례와 같은 비일상적 실천들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의 실천이론은 일상생활의 반복적인 수행이 체계를 형성하고 재생산한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또 다른 문제는 일탈적, 비규범적 실천들이다. 이것은 기본적인 문화적 주제의 변형인가, 아니면 실제로 대안적인 사회적, 문화적 존재양식으로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인가? 체계변화에 대해서는 두 가지 모델이 제시되어 왔다. 첫째, 고전적 맑스주의 모델은 지배적 헤게모니에서 벗어난 피지배집단이 계급투쟁의 결과 권력을 획득하고 자신들의 세계관을 새로운 헤게모니로 도입할 때 변화가 일어난다고 본다. 둘째, 마샬 살린스의 대안적인 모델에 의하면, 이해관계가 다른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급진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신 각 집단은 자기 위치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전통적 수단을 통해 자신들의 위치를 향상시키려고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변화는 전통적 방식이 새로운 현상, 변화하는 맥락에 응답할 수 없을 때 일어난다.

오르트너는 이 주제에 대해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80년대의 실천이론은 비대칭적 사회관계의 작동으로서의 지배에 주목한다. 그러나 이런 기획은 일방적이다. 따라서 사회적 존재의 다른 측면인 협력, 호혜성, 연대의 패턴 역시 망라하는 모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실천 모델의 핵심에는 하나의 역설이 있다. 행위자의 의도가 이 모델에서 중요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회적 변화는 대부분 비의도적인 행동의 결과이자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결론과 전망

 

결론에서 오르트너는 사회는 인간의 산물이다. 사회는 객관적 실재다. 인간은 사회의 산물이다.”라는 피터 버거와 토마스 루크만의 경구를 통해 논문에서 다룬 학사를 요약하고 있다. 대부분의 예전 인류학은 를 강조하였다. 미국 문화인류학은 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80년대의 실천이론은 다른 두 가지를 유지하면서 을 다루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르트너는 80년대 인류학에서 실천만큼이나 중요한 핵심 상징이 역사임을 강조한다. 인류학적 작업의 문제는 체계, 구조, 사회의 실재성을 얘기하면서 그것이 어디에서 오고,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다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사람들이 반응하는 외적 사건들의 연쇄로, 단순히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실천이론은 그 과정에 주목함으로써 역사연구와 인류학적 연구를 통합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