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Ian Hacking, "The Looping Effects of Human Kinds"
(ed. by Dan Sperber, David Premack and Ann James Premack,
Causal Cognition: a multi-disciplinary debate, NY: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한 승 훈
이 글은 이안 해킹(Ian Hacking)이 “Making Up People"(1986)을 쓴 지 10년 만에 발표된 것이다. 여기에서 해킹은 인간을 분류하는 행위가 분류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가 다시 그 부류의 인간에 대한 지식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다는 ”루핑효과(looping effect)" 개념을 더욱 정교화하고 있다. 또 하나의 키워드인 'human kinds'는 과학철학의 개념인 '자연종(natural kinds)'에 대비되는, 인간의 행동, 상태, 행동의 종류, 기질이나 경향의 종류, 감정의 종류, 경험의 종류를 통한, 인간의 유형에 대한 인공적인 분류들을 가리킨다. 이런 배경을 따른다면 이 용어는 ‘인간종’ 혹은 ‘인공종’으로 옮겨야 하겠으나, 이 발제문에서는 좀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간유형’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겠다.
인간유형에 대해 해킹은 (1) 우리 가운데 일부에게만 해당되는 유형들, (2) 사람들과 그들의 행동, 행위를 분류하는 유형들, (3) 인간과학과 사회과학에서 연구되는 유형들이라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는 행동이나 경향, 감정의 유형도 포함되지만 어디까지나 특정 분류의 ‘사람들’을 구성하는 행동이나 경향일 경우에만 그렇다. 일례로 동성 간의 성적 행위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있어왔으나, 인간유형에 해당되는 것은 19세기 말에 과학적 검토의 대상으로 구성된 ‘동성애(homosexuality)’라는 범주다.
사회과학적 연구나 행정적 관리의 차원에서 사용되는 인간유형은 가치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치판단이 개입한다. 해킹은 ‘자살’, ‘10대 임신’, ‘아동학대’ 등의 사례들을 통해 이 문제를 검토한다. 이들은 (1)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며, (2) 사람들에게 특징적인 행위이며, (3) 우리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그들에 대한 지식을 얻고 싶어 하며, (4)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유형이다. 그런데 이들 행위는 ‘범죄’이거나, ‘병’이거나,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인간유형을 분류하고 구성하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가치판단과 실천방향을 함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유형(human kinds)은 자연종(natural kinds)과 어떻게 다른가? 다시 말해 인간유형에 의해 분류되는 인간의 범주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관심에 따라 구성된 것인가? 이 문제를 논하기 위해 해킹은 실증주의자와 역사주의자의 관점을 제시한다. 실증주의자는 인간유형을 자연종과 같은 방식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간과 그 행위의 인과관계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면 인간현상 뒤에 있는 ‘실제’ 분류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폭력의 유전자’나 ‘자살의 유전적 요소’같은 것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실증주의자들의 유형이 무시간적인 반면 역사주의자들은 자연종조차 서구과학사를 통해 발전되어 온 것으로 본다. 즉, (자연종인) 동물, 식물, 광물의 분류들은 과학적 지식의 발전에 따라 좀 더 일반적으로 적용 가능한 ‘정확한’ 유형들로 서서히 접근해 간다. 인간유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테면 의학적 지식의 발전에 따라 악마들림(demonic possession), 트랜스 상태(trans states), 샤머니즘 등은 똑같은 다발성인격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로 분류된다. 어느 쪽이나 인간유형을 자연종으로 포섭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이에 비해 구성주의적 관점은 모든 범주가 자연적으로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 본다. 그러나 해킹이 구성주의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즉, “다발성 인격 장애와 청소년은 전기와 황산만큼이나 실재적”이라는 것이다. '동성애'를 정신의학이나 법리학에서 '인간의 종류'로 다루는 것은 분명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시대에 사람들이 동성과 섹스를 했다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본질주의와 구성주의적 태도는 경쟁적인 것만이 아니라 상호 보조적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루핑(고리)효과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자연종과 인간유형 사이의 진짜 차이는 인간유형에는 가치판단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아동학대는 악이고, 다발성 정신장애는 고쳐야 할 병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유형은 “사람들이 되고자 하는, 혹은 되지 않고자 하는 유형”이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구성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 분류하는 행위는 분류되는 사람들의 자기인식과 행동, 과거에 대한 기억을 바꾼다. 그러면 분류를 행하는 전문가들은 기존의 분류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해킹에 의하면 이것은 ‘낙인 이론(labelling theory)’과는 다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낙인은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사람들은 그 낙인에 따른 전형적인 행위를 하게 된다. 그런데 루핑효과에 의하면 인간유형이 주어지면서 그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변화한다. 그러면 이 유형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형성된다. 이 새로운 지식이 알려지면서 그 인간유형에 속한 사람들은 다시 변화한다. 이 과정은 고리처럼 무한히 반복된다. 분류와 범주화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사물의 반응과는 다르다. 자연종을 다루는 자연과학에 있어 이론의 수정은 좀 더 정확한 인과관계를 밝히려는 것인 반면, 인간유형을 다루는 사회과학에 있어 이론의 수정은 기존 지식에 대해 반응하는 사람들의 피드백에 대해 분류, 인과관계, 예측을 수정하는 행위다.
마지막 장에서 해킹은 자신의 루핑효과 이론에 대해 제기되어 온 반론에 답하고 있다. “Making Up People" 등에서 제시된 사례들은 지나치게 적고, 루핑효과를 설명하는데 딱 들어맞는 극단적인 것들뿐이었다는 비판이다. 해킹은 이에 대해 다음 다섯 가지 부류의 인간유형들을 논하며 루핑효과 이론을 더욱 확장하고 있다.
① 2차 유형들(second-order kinds): 이것은 정상성(normalcy)을 말하는 것이다. "ortho-", "normal"로 시작되는 “정상적인 XX"라는 인간유형은 규범으로부터 일탈된 새로운 인간유형들을 창출해내는 기준이 된다. 즉, 어떤 인간유형이든 정상으로부터의 일탈로 설명될 수 있다.
② 생물학화된 유형(biologized kinds): 생물학화된 인간유형들도 루핑효과를 피해갈 수 없다. 생물학적 속성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경향이 있다. 일례로 ‘알콜중독’은 도덕적 실패로 여겨져 왔으나 생화학, 유전학적 지식은 알콜중독을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닌 질병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한편 폭력적인 유전적 성향은 그 자체로는 인간유형이 아니지만, 특정한 경우에는 범죄학, 범죄인류학 등 사회과학의 대상이 된다. 한 번 생물학화된 인간종은 과학이 지시하는 방법으로 다루어지는 것에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③ 접근불능 유형들(inaccessible kinds): 자신들에게 부여된 분류에 대해 자의식적으로 반응할 수 없는 인간유형들도 있다. 유아, 자폐증 등이 그렇다. (심지어 자폐증은 정의상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들은 자의식적인 피드백은 하지 않지만 이런 경우에도 루핑효과는 가족, 교정활동가 등에게 작용한다.
④ 행정적 유형들(administrative kinds): 학문적 목적이 아닌 행정적 목적에서 만들어지는 인간유형들이 있다. ‘히스패닉'이 그렇고, 미국 인구센서스의 산물인 '리투아니아 어'도 그렇다. 행정유형 개념은 다른 유형의 대상들을 루핑효과이론으로 가져올 수 있게 한다. 행정적으로 관리되는 사람들은 관리자들에게 반응한다.
⑤ 자기 귀속적 유형들(Self-ascriptive kinds): 루핑효과에는 '지식(knowledge)'과 '알려진 사람들(the known)'이 있다. 알려진 사람들은 수동적이고 그들 자신에 대한 지식에 대한 책임이 없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동성애자, 흑인, 여성 해방 운동에서는 인간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규정하고, 스스로 선택한 용어로 자신들을 부르는 일이 일어난다. ‘알려진 사람들’ 자신이 '아는 사람들(the knowers)'이 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스스로 분류된 사람들은 그들의 권리를 요구하거나, 그를 위해 같은 유형의 사람들과 연대하기도 한다.
-2015.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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