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언론인인 우스다 잔운이 강제병합 전인 1908년에 한국의 문화에 대해 쓴 <암흑의 조선>을 틈틈히 읽는다. 번역본인 줄 알았는데 당시에 나온 그대로 영인해서 가격은 4만원대;; 아니 저작권도 죽은 책 영인한 게 왜 이 가격인가 싶어서 사진 않고 빌려왔다.
중간에 꽤 많은 한국 민담들이 실려 있어서 그동안 주로 민담이나 구비문학 연구하는 사람들이 종종 인용하던 책이다. 물론 그것도 재밌지만, 구한말 문화에 대해 꽤 세밀하게 쓴 책이기도 하다. 물론 시각은 "와 이 '요보'들 야만성 쩌네요ㅋㅋㅋㅋ"라서 민족주의자라면 혈압 오를 부분이 많지만. 사실 제목부터가 헬조선스럽다.
('요보'라는 말은 '조센징'보다 훨씬 센 인종차별발언이다. 당시 한국인들이 서로를 부를 때 쓰던 "여보"랑 늙어서 비실비실한 모습을 나타내는 일본어 의태어 요보요보よぼよぼ의 발음이 비슷한 데서 착안한 호칭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 말을 만들어 매체를 통해 유행시킨 당사자가 우스다 자신이라고도 한다.)
뭐, 나는 딱히 그런 데 알러지가 없어서 재밌게 읽는 중이다. 민담 부분에 가려서 그간 주목받지 못했지만, 구한 말의 도시(특히 시장) 모습이나 풍습을 꽤나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특히 한국인 정보제공자들을 통해서 귀신, 허깨비, 도깨비, 하나님(기독교적인 의미는 아니고 옥황상제를 말함) 등의 의미와 용례를 세세히 밝혀 놓은 것이 재밌다. 또 무당에 대해서도 꽤 많이 다루고 있는데 독특하게도 왕실과의 관계를 위주로 써 놓았다. 적어도 (비슷한 의도로 쓴) <일본은 없다>같은 책보다는 객관적이고 정보량도 많다.
무녀巫女
◎ 조선의 무녀를 ‘무당’이라고 한다. 이 무녀는 국가의 운명을 관장하는 대권능자大權能者와 같이 여겨지고 있다. 이세伊勢에서 카미카제神風를 빌었다고 하는 것처럼, 국가에 일이 있을 때에 궁중에서는 무녀를 왕성 안으로 초청해 기도를 시킨다. 이 기도로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려고 하는 등의 뻔뻔스러운 일을 꿈꾼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 근자에는 우리 위병경관衛兵警官의 경계를 엄중히 해서 무녀를 궁중에 들이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궁중의 잡배들은 폐백幣帛을 가지고 시내에 살고 있는 무녀의 집으로 나간다. 그리고 왕명이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터무니 없는 일을 무녀에게 기도시킨다. 예를 들면 일본인을 모두 한국 밖으로 쫓아내 달라거나, 황실 재산을 국유화한 것을 다시 황실 소유로 되돌려 달라거나 하는 일을 무녀에게 기도시키는 것이다.
◎이전에는 궁중을 출입하는 무녀가 대단한 권력을 지닌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로서, 로마교황식으로 높은 위력을 가진 자였다. 지금의 통감부 뒤 남산 정상에 있는 국사당國師堂의 제주祭主는 그런 부류의 부녀였고, 그들은 궁정으로부터 손님대우를 받고 있는 것처럼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무녀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으니, 무녀는 천신지기天神地祇에 대해 이 소원을 들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므로, 방에는 제단을 마련하고 사람이라고도 신이라고도 할 수 없는 수상한 목상木像을 꾸며 놓는다. 그 외, 관우나 공자 등의 화상畵像이 그려진 족자를 사방의 벽에 빈틈없이 걸어둔다. 즉, 이들은 모두 천신지기로 여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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