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안식년을 맞아 캐나다의 UBC에 다녀오신 선생님은 거기서도 몇 개의 세미나를 굴리셨다고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조선후기의 홍만종(1643~1725)이 쓴 <해동이적> 읽기였다. 단군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선인, 이인, 술사들에 대해서 기록해 놓은 건데 마침 번역본도 나와 있길래 찾아보았다. 신선전이나 열선전 수준의 해괴한 이야기들을 기대했지만, 확실히 그런 것보다는 밋밋했다. 대신 어떤 인물이 내 눈을 끌었다.
"함경도의 벼슬하지 않은 선비"라고 소개된 주비는 송시열 밑에서 공부한 바 있는 유학자였다. 송시열은 그는 유교 이외의 술수에도 능해서 한 순간에 천 리를 갈 수 있었고, 그의 제자인 정두남은 저주 걸린 집에 서려 있는 악한 기운을 퇴치하고, 매흉(남을 저주하기 위해 흉한 물건을 묻는 것)한 장소를 찾아내는 등의 활약을 했다고 한다. 벼슬하지 않는 유학자들이 이런 "퇴마술" 좀 쓰는 거야 익숙한 일이었다. 내 눈을 끈 것은 다음의 구절이었다.
숙종 때 한 요부가 스스로 '용녀부인'이라 하며 세상을 어지럽힌 죄로 죽임을 당했다. 그 국옥은 매우 은밀하여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주비도 실은 그 사건에 연루되어 죽었다.
용녀부인 사건이라면 논문으로 쓴 적도 있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주비라고 하는 인물이 연루되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나는 즉시 이 양반의 '신상털기'에 들어갔다. 용녀부인사건과 관련된 <역적여환등추안>과 <이민재추안>에 그런 이름은 없었다. 대신 홍만종도 언급하고 있는 송시열의 글 <함흥咸興으로 가는 두 주군朱君을 보내는 서>(송자대전 137권)와 장지연이 쓴 <조선유교연원>을 찾아보았다.(황성신문사의 그 장지연 맞다)
1665년, 주비는 일가의 주남로와 함께 함흥감사의 추천서를 가지고 우암 송시열을 찾아왔다. 송시열은 두 사람이 주자와 같은 주씨라며 환대하였고, 향음주례와 경전의 요체를 가르쳐 주었다. 중앙의 양반들은 함경도를 야만스러운 땅이라고 해서 무시해 왔다. 송시열은 나라에 변란이 있을 때에는 북방 사람들을 등용하라는 효종의 유언까지 언급하며, 이 젊은이들에게 북방을 교화시키라는 덕담을 해 주었다. 송시열과 주비는 그 후에도 종종 편지를 주고받았는지, 송시열의 문집에는 주비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조선유교연원>을 보면, 두 사람은 동춘당 송준길에게도 찾아갔다. 송준길 역시 주비 일행을 칭찬하며, "우리의 도가 북쪽에 있게 되었다(吾道北矣)"는 네 글자를 써 주었다.
당시 주비는 23세였다. 이렇게 촉망받는 지역의 인재가 왜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으며, 술사로서 후대에 알려지게 되었을까? 송시열이나 송준길의 말은 어디까지나 립서비스였다. 북방에 대한 차별은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도 이어졌다. <조선유교연원>은 주비의 여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노봉 민정중이 관북의 관찰사로 있을 떄 학행으로 조정에 천거하여 선원전참봉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영흥의 한봉에 은거하여 스스로 한산閒山이라는 호를 붙였다. 당시의 이름난 유학자와 석학들이 그 문하에서 많이 나왔다. 공은 역학에 조예가 깊어 <주역연의>를 저술하여 문집과 더불어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 향현사에 향사되었다.
과연 이 훌륭한 유학자인 주비와 용녀부인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술사 주비는 같은 인물일까? 틀림없다고 본다. 송시열과 제자들의 문답 기록을 보면, 주비는 젊어서부터 도교 경전인 <참동계>를 연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동료인 주남로는 "<참동계>를 열심히 보고도 전염병을 이겨내지 못한다"고 비웃었고, 송시열은 "주역도 제대로 모르는 어린 놈이 주자 흉내를 내고 있다"고 혹평을 했다. (주자는 <참동계>의 주석까지 달았다) 즉, 젊을 때부터 주비는 고시생 타입이라기보다는 오컬트 매니아였다.
우리가 그에 대한 기록을 다시 접할 수 있는 것은 1679년, 그의 나이 37세 때의 실록 기록이다. 벼슬길과는 인연이 없던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추천이 올라왔다.
“깊은 산속에 살면서 몸소 농사일을 하고 강독(講讀)하기를 그치지 않는데, 어떤 이는 이인(異人)이라 하고 어떤 이는 광인(狂人)이라 합니다. 그 사람이 반드시 쓸만한가는 신이 알지 못하겠으나, 요컨대 산림에서 글을 읽는 사람들을 위하여 한 번 벼슬을 주어 시험하여 보고난 후에 그만두는 것이 미천한 사람을 들어 쓰는 도리에 해롭지 않을 듯합니다.”
결국 그가 벼슬에 나아가는 일은 없었지만, 당시 그에 대한 세상의 평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이인"이거나 "광인"이다. 또, 홍만종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강원도 영동에서 주로 활동해서 당시까지도 동해안에 가면 주비의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주비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죽었다. 그와 동갑이었던 홍만종이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실제로 주비가 죽은 것은 다른 사건, 용녀부인사건으로부터 9년이 지난 1697년의 일이었다. <홍기주등추안>에 의하면, 이영창 등에 의해 주창된 "진인출현설" 관련 역모에서 주비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이 사건에는 전국의 유명한 승려들, 장길산과 같은 비적, 거사, 역사들이 언급되었다. 주비는 그 가운데 "북방의 술사"로서 술사들의 대표격이었다.
주비는 일당에게 술법을 잘 쓰는 도인 정혜와 '정씨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는 신이한 사람에 대해 말하기도 하였다. 또한 "해도점"을 쳐서 진인이 머무는 섬을 울릉도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그는 신문 과정에서 맞아죽었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둘 다 <해동이적>에 있는데,
"주비가 의금부에 갇혀 있을 때 옥졸이 그를 지키며 항상 보니, 주비는 길이가 네 개의 손가락 폭 정도이며 가늘기가 한 움큼 남짓 되는 나뭇가지를 양손에 번갈아 쥐는 것을 날마다 일과로 삼았다 하는지라, 아마도 또한 비술인 것 같다."
또 그의 제자였던 정두남은 "주비는 죽었으나, 실제로는 죽지 않았고 그 시체는 가짜 껍데기다."라고 주장하였다.
아마도 이 글은 이 기이한 인물의 생몰년을 정확히 지정한 최초의 글이 될 것이다. 주비는 1643년에 태어나 1697년 55세의 나이로 의금부에서 옥사했다. 그는 함경도의 지역 영재로 송시열이나 송준길과 같은 대학자에게 직접 사사받을 정도로 촉망받는 인재였다. 그러나 지역적인 한계 탓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자유로운 성품 탓인지 일생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유교 이외의 다양한 학문과 술수를 공부했으며, 산속에서 농사를 지으며 세미나를 열기도 하고,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다. 말년의 그는 "북방의 술사"로서 알려져 있었고, 도참설에도 심취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 되어 역모사건에 휘말리게 되었고, 의금부의 형문을 받던 중 사망하였다.
주비의 일생은 조선의 북방 지역에 살고 있었던 거사, 술사들의 삶에 대한 한 모델을 제시해 주고 있다. 함경도 지역에서는 1785년, 거사들의 역모사건이 발생한다. 서북지역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도 거사들은 그 주도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문자를 읽을 수 있었고, 풍수나 역리 등의 술수에 능했고, 무엇보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불만에 차 있었던 저항적인 지식인들이었다. 또한 바로 이런 사람들 가운데에서 근대의 신종교 지도자들이 나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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