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루킹 사건과 조선시대 변란

나는 인터넷 그런 거 별로 안 하는 사람이라 드루킹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그런데 "드루킹"이라는 이름이 귀에 익어서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방금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2년 정도 전이었던가 예전에 발표한 내 논문을 참고해야 할 일이 있어서 검색을 했는데, 어느 블로그에 내 논문 구절들이 몇 페이지분량이나 인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단전재는 아니었고 제대로 참고문헌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 블로그의 이름이 분명 "드루킹의 자료창고"였던 거 같다. 지금 다시 검색해 보니 안 잡히는 걸로 보아 틀림없는 듯 하다.

아직 다른 연구자들에게 인용된 적도 없는 듣보 마이너 논문이 학술논문도 아니고 개인 블로그에서 언급되는 것이 반갑고 신기해서 한참을 읽어보았다. 그러나 곧 포기하고 말았다. 그 게시글은 내 논문을 비롯한 조선후기 도참신앙에 대한 글들을 뭉텅뭉텅 인용하면서 미래의 국제 정세(!)를 논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장황한 것에 비하면 맥락도 뭐도 없어서 도저히 읽을 수 있는 글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정보들을 보면 드루킹과 그 추종자들은 확실히 도참, 풍수, 점복 등 술수류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현실정치에 개입하려고 했던 조선시대의 변란세력과 유사한 유형의 집단으로 보인다. 자미두수, 교하천도설, "옴마니 파드메 훔"이라는 비밀스런 진언의 사용, 일본침몰 등 묵시종말적 예언 같은 요소들이 그렇다.

조선시대 변란이라고 하면 학자들마저도 "죽창을 든 흰옷의 농민"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17-19세기 사례들에서는 오히려 그런 이미지보다는 드루킹 집단과 유사한 형태들이 많이 발견된다. 대개 이런 사건의 중심에는 점복이나 풍수, 관상 등에 능해서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야심에 찬 술사들이 있다. 그들은 추종자들에게서 자금과 인력을 모집하고, 그를 바탕으로 정치세력에게 접근해 영향력을 발휘하려 한다. 그 가장 성공적인 사례가 광해군에게 교하천도설을 유세했던 이의신(李懿信)의 경우다. 일개 술사가 국왕에게 접근해서 천도까지 논의하게 했으니 말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엔 그렇게 일이 잘 굴러가지는 않아서, 변란 세력들이 주로 접근한 것은 당대의 "야권 인사"들이었다. 실각한 정치 세력이나 유배객들에게는 온갖 종류의 "술사"나 "도인"들이 접근해서 정권을 잡는 데 도움을 줄 테니 나중에 한 자리를 달라고 요구하곤 했다. 물론 집권세력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불온한 선비들이 수상한 무리와 어울리고 있다"는 것은 당시 정치 공작의 전형적인 레퍼토리였다.

70년대의 최태민이 박근혜에게 접근한 것, 87년 이후 선거에서 정도령 드립이 튀어나오곤 했던 것, 드루킹이 민주당 인사들을 통해서 하려고 했던 일들 등은 모두 이런 유형의 현대 버전이다.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의회 정치 내에서도 비교적 합리적이고 세련되어 보이는 집단에서마저, 그것도 집권 세력 내에서 이런 부류의 수상한 인물들과의 접점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 또한 선거가 있는 민주공화정이라는 독특한 조건 하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변형이다. 선거에 도움이 된다면 고양이 손을 빌려서라도 댓글 달고 추천 누르고 싶어하는 게 오늘날의 정치인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