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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

민간신앙, 동학 그리고 민중

 규장각에서 ‘10. 12. 6(목)에 했던 “민간신앙, 동학, 그리고 민중”이라는 워크숍의 토론 기록입니다. 세 분 연구자는 80년대 말, 비슷한 시기에 “이필제”와 “영해병란”에 대한 공통 관심사를 가졌던 인연으로 이런 워크숍을 함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발표1>>

박맹수(원광대학교 교수), “동학(1860~1894)을 어떻게 볼 것인가? -1894년 혁명과의 관계”

1. 서언

2. 동학성립의 배경과 그 의미

3. 동학의 ‘보국안민’ 사상과 그 실천

4. ‘종교적 외피설’ 극복이라는 과제


<토론: 장영민>

 1. 원래 쓰던 “농민전쟁” 이라는 개념에서 “혁명”으로 바꾼 이유는?

 2. 동학성립의 배경을 서세동점이라는 외적 요소만 언급한 건 아닌지?

 아프리카, 아시아의 신종교운동도 그러하지만, 내적 조건도 중요하지 않은가?

 3. “교조신원운동”, “혁명”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측면을 제시해줘야 하지 않나?

 4. “통문”을 통해 읽을 수 있는 8~90년대 동학 사상의 “변화”란 뭔가?

 5. 포, 접 조직의 역할은? 종교집단이 현실적 투쟁에 나서게 한 리더십은 무엇이었을까?

 6. “교조신원투쟁”의 경험이란? 이 경험은 동학에 무엇을 주었나?

 7. “종교외피론”은 “경제적 결정론”으로 동학의 종교적 역할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이는 “종교” 개념보다는 사관의 문제이다.

 8. 조경달은 계급적인 접근을 통해 동학내에서도 가난할수록 강경파, 부유할수록 온건파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단동학”이라는 개념을 제시할 만큼 자료를 모았는가?

 9. “종교”라는 개념을 쓰지 않고 “학문”과 “사상”만을 얘기할 경우, 민중의 광범위한 참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답변>

 1. 동학혁명은 실패하여 탄압당한 사건이므로 대부분의 자료가 1920년대 전후의 것이다.

그러나 개벽, 신인간 등 당시의 잡지에 실린 참가자의 수기를 비롯하여 아직 발견되지 않은 1차 자료가 있다. 오지영 동학사 이전의 자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2. 동학은 종교 맞다. 동학의 종교적 요소를 부정, 배제하자는 말 아니다.

 민간신앙의 요소는 민중을 끌어들이는 데 필요했다.

 실제 본인도 4년 전 화악산 수도체험 중 주문수행을 했더니 강령체험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나와 조경달의 차이이다. 조경달은 이지적인 사람은 종교체험이 어렵다고 하였으나, 아니었다.

 단, 동학에는 종교적 요소도 있지만, 다른 것, 위기에 대한 학문적 반응이 있다. 주자의 경우 외적의 침입으로 인한 송의 천도, 불교와 도교의 융성 등에 대한 위기의식이 있지 않았나. 그와 같은 학문적 반응이 동학 내에 있었다.


<Floor>

 1. 사상, 교리화는 사실 2대째의 과제이다.

 최남선이 천주교로 개종할 때 “천도교는 교리가 뭔지 밝혀달라”고 요구했을 정도였다.

 2. 정통-이단 구분은 삼가야 하지 않을까? 유교라면 본원유교, 불교라면 원시불교 같은 개념이 있다.

 3. 동학은 본원적인 요소를 더 발굴해야 하는가, 현대적 교리화에 힘써야 하는가.


<답변>

 1. 최제우가 지도한 건 3년, 최시형은 34년 교단을 이끌었다. 그 사이 1894년의 대사건이 있었고 최시형은 1898년에 사망한다. 그리고 후기 동학에는 다양한 갈래가 있었다.

 2. 제도종교로서의 체계화는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3. 해월은 지하포교를 행했고, 당시의 1차적 자료는 비전秘傳, 가전家傳의 형태로만 남았다. 체계화를 위해서는 공인화, 즉 교조의 신원을 통해 제도종교가 되어야 했지만 이것이 실패하였다. 게다가 갑오년 이후에는 분열까지 되었다.

 4. 천도교는 민중적, 토착적 성격이 사라지고 근대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5. 이는 동학을 종교로서 연구하는 이들의 과제가 될 것이다.



<<발표2>>

 장영민(상지대학교 교수), “도참비기와 초기동학”

1. 문제 제기

2. 정감록의 구성요소와 성격

 1) 정감록의 형성

 2) 정감록의 구성요소

  (1) 정씨의 개국

  (2) 계룡산 건도

  (3) 말세와 병화

  (4) 십승지

 3) 도참비기의 성격

  (1) 정치적 성격

  (2) 종교적 성격

3. 초기동학의 사상과 성격

 1) 초기동학의 사상

  (1) 신관

  (2) 다시 개벽

  (3) 시천주

  (4) 구원자로서 최제우

 2) 초기동학의 성격

4. 맺음말


<토론: 윤대원>

 1. 조선후기 변란의 종교문화(미륵신앙, 도참비기)와의 관계에 대해 민중의 일상과 연관지어 연구하는 최근의 경향이 있다.

 2. 감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민중은 메시아를 대망한다. 그러나 이 모두를 종교적 활동으로 환원할 수 있는가?

 문1) 정감록 등 도참비기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데 있어 도참비기가 신종교로 발전하지 않은 정황들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도참비기를 활용한 병란이 종교운동으로 가는 게 옳다는 전제가 있는 것 아닌가?

 문2) 현실을 뒤바꿔주기 바라는 메시아적 희망의 배경과 조건은 무엇인가?

 최제우는 정치적 움직임을 하는 제자를 “문장군蚊將軍”이라 부르며 경계했다.

 문3) “천년왕국운동”, “메시아운동” 사이의 유사성을 인간의 보편적인 종교적 심성 때문이라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왜 조선후기의 천주교에서는 이런 식의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답변>

 답1) 민란, 변란, 투쟁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된 후 조동일, 황선명 등의 글을 읽으며 인간의 정신, 종교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는 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가 유일한 팩터는 아니다. 종교가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는 종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봉건사회 해체에 의한 계급론적 설명에는 반대한다.

 답2) 사회적 조건의 변화는 종교에도 영향을 미친다.

 물론 최제우는 정치사회적 운동을 하는 제자들을 제지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인 삶의 고통 속에 처해 있었던 민중의 열광적인 호응은 종교를 통해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빈자는 투쟁하고, 부자는 종교적인 것에만 몰두하였다는 식의 이원론은 반대한다.

 답3) 천주교가 메시아운동이 되지 않았던 이유는 어려운 문제이다.

 1. 당시 포도청등록 등의 자료를 보면 천주교인들은 천당가자는 마음으로 기쁘게 순교하였다. 또한 천주교인들은 충, 효 등 윤리도덕을 강조하는 등 꽤나 보수적이었다.

 2. 신종교 창시자들에게서 보이는 카리스마가 없었다. 또한 집단적 열광이 천주교에는 부족하였다. 이것이 동학과의 차이다.

 3. 또한 그런 움직임이 아주 없지도 않았는데, 유관검의 공초 내용에 나오는 “성세 인천과 부평 사이에 배가 정박한다”는 등의 예언이 그런 것이다.

 4. 그러나 그런 움직임이 행동으로 나아가기에는 박해가 너무 강했다.



<<발표3>>

 윤대원(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초기 동학과 이필제의 관련성”

1. 이필제는 동학교도인가?

2. 영해난, 교조신원운동인가?

3. 동학난과 이필제난의 관련성


<토론: 박맹수>

 1. 이필제 사건은 흥미로운 주제이다. 여기에는 종교로서의 동학, 대표적인 병란 주모자 이필제, 조선후기 향촌사회의 사회적 변동 등이 모두 나타난다.

 이필제는 교조신원의 명분을 띄고 있었으나 본심은 따로 있는 인물이었다. 이 사건을 연구하는 것은 초기동학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2. 수운 사후 해월이 리더십을 발휘할 때까지의 혼란스런 조직에는 이필제와 같은 인물이 침투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3. 특히나 동학은 중층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초기 경전만 해도 지식층을 위한 한문경전과 민중층을 위한 한문경전이 모두 존재했다. 최시형은 원래 문맹이기도 했다. 초기경전 속 교리문답 속에서 해월은 등장하지 않는다.

 4. 이렇듯 중층적이었던 초기동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변혁적인 것 아니었을까? 그에 비해 최시형의 지배력은 약했고, 이에 이필제가 끼어들기가 좋았다.

 5. 동학은 중층적인 운동이었다. 따라서 종교적, 사상적, 변혁적인 것만 아니라 다면적으로 봐야 한다.


<답변>

 중층성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러나 종교적인 것이 아니면 동학을 뭐라고 해석해야 하는가? 이필제는 확실히 특이한 존재였지만, 그가 병란을 일으키기 위해 방문한 지역에는 어디에나 그와 비슷한 사람이 있었다.



<<종합토론>>


<질문(나)>

 이필제의 언행과 그가 모의한 병란은 17세기 이후의 민중종교에 기반을 둔 반란들과의 연속성이 분명하다. 그러나 1894년의 봉기와는 분명한 단절이 느껴진다. 무엇이 이런 단절을 가져왔을까?


<박>

 우선 동학과 민간신앙을 변혁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는 것에 문제가 있다. 일상사 등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동학은 다양한 각도, 사상/학문으로서의 동학을 재검토하자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장>

 조선후기의 도참비기 사건들에는 확실히 반복되는 구조가 발견되며, 또한 그 구조의 변화 발전을 탐구하는 것이 역사학의 역할이다. 그러나 구조가 인간을 움직이지는 않는다. 이필제 이전과 1894년의 봉기가 다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상황의 차이다. 그러나 계급결정론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 봉기할 수밖에 없었던 19세기의 자연재해, 근대국가의 형성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의 대외적 요소들과 심리적 위기감 등 기본적인 모순을 살펴야 한다.


<윤>

 최소한 세 가지 정도를 고려해야 한다.

 1. 개항 이후의 지식체계의 변화

 2. 개항 이후의 향촌사회의 변화

 3. 개항 이후의 사회경제적 모순의 구조 변화(무역 등)


<Floor>

 1. 사실 동학농민전쟁의 “종교외피설”이란 독일농민전쟁의 사례에 대한 엥겔스의 이론을 그대로 끌어들인 것이다. 독일농민전쟁은 분명히 기독교적인 배경이었다. 동학이 어떤 식으로는 유학이라면, 유학은 그런 의미에서의 종교가 아니지 않은가?

 2. 박선생님은 수운의 “보국안민지계”와 1894년 격문에서의 “보국안민”을 구분하였다.

양자의 관계는 “구상-실천”인가, “단계적 발전인가?


<박>

 포덕문에서의 “보국안민지계”가 사상적인 것이었다면, 갑오년 격문에서의 “보국안민”은 정치사회적 맥락을 가진다.


<Floor>

 박선생님은 동학을 “종교” 개념이 아닌 “학”, “교”로 보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고려 최승로가 불교와 유교의 관계를 수기와 치인의 기능으로 구분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의 “학”은 오늘날과 개념이 달랐을 듯하다.


<박>

 1. 수운의 “학”은 확실히 종교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내가 “종교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서구의 "religion"의 일본식 번역어로서의 “종교”는 아니라는 것이다.

 2. 폐정개혁안에는 정치, 경제, 사회, 종교(문화) 개혁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들을 받아들일 경우 조선왕조는 붕괴한다.

 그 전 92, 93년 교조신원운동 시기에 올라간 단자에 드러난 주장들은 폐정개혁안보다는 추상적, 종교적이다.

 해월문집에 실린 통문들만 해도 동경대전/용담유사보다는 사회경제적 문제들이 많이 언급된다. 신도의 범위가 경북지역을 벗어나 확대되면서 하층민의 요구가 올라오고, 이것이 상층지도부가 수용 및 재인식한 결과다. 이것이 보국안민지계에서 보국안민, 즉 폐정개혁안으로 나아간 과정이다.

 3. 굶주림, 자연재해, 왕조탄압 등만이 봉기의 이유일 수 없다. 한 예로 12개조 군율 앞의 잘 알려진 “4대 명의”의 다른 판본에는 “칼에 피를 묻히지 않는 것을 최선으로 삼고”, “목숨을 해치지 않고 이기는 것을 귀히 여기며”, “결코 민폐를 끼치지 않으며”, “충신, 효자, 열녀, 학자가 있는 동리 주변에는 주둔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이 동학에서 온 거 같다. 동학도는 개고기를 먹으면 죽는다는 전설 역시 이런 사실에 근거한 것일 수 있다. 또한 동학혁명은 계급혁명이 아니었다. 동학군을 토벌한 미나미 요시오의 자료를 보면, 그가 잡아들인 이들 가운데에는 관리들도 많이 포함되어 이었다.


<Floor>

 동학도들을 “도를 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서 엘리트들에게 “무슨 도를 길에서 하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이는 동학이 지성적 독점에 대한 새로운 교학체계를 제시하였다는 말이며,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공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동학 자체의 조직을 볼 필요가 있다. 동학은 교도 하나하나가 주체가 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입도의 제천의식 역시 원래는 국왕이나 천자의 의식이다.

 전봉준의 투쟁방식은 민란적 모형의 발전형이었으나(지방정권의 장악->중앙정권에의 도전) 민중적인 참여방식은 역시 동학적 참여였다(동학도회 등) 민중의 참여를 이끈 조직/신앙이 바로 동학이 준 언어였으며, 이것이 양반에 대항할 수 있는 논리였다.

 농민전쟁 패배 이후에도 이 성과는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