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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메모

움베르트 에코, 『장미의 이름』 독서메모

나는 다른 책에 비해 소설을 즐겨 읽지는 않는다.

10대에는 소설가를 꿈꾸기도 했고,

지금도 소설을 쓰고 싶어하지만 그렇다.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다 손에 잡은 소설은 밤새 두근거리면서 읽고,

점점 줄어드는 페이지를 아쉬워하기도 한다.

단지, 워낙 "직업영역"에서 "읽어야 할 것"에 비해 아직 읽은 것이 적어,

어디까지나 "취미생활"인 소설 읽기가 뒤로 쳐진 것 뿐이다.


그래도 그렇지,

이걸 이제야 읽은 건 좀 심했다 싶다.


사실 이 책을 읽었다고 이제야 리뷰를 쓰는 건 종교학도로서, 아니 인문학도로서 심히 민망스런 일이다.

그러니 괜히 내용 요약이니 그런 거 안 하고,

메모해 둔 명대사와 좋은 인용구들 가지고 잡담이나 하련다.


아래에는 사소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제1일



 

omnis mundi creatura quasi liber et pictura nobis est in speculum

이 세상 만물은 책이며 그림이며 또 거울이다

-알라누스 데 인술리스


: 주인공 윌리엄 수사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랄까. 

사소해 보이는 사물이나 현상에서 "징후"를 읽어내는 것은 좋은 탐정만이 아니라 좋은 학자도 가져야 할 태도겠지. 






 

우리는 난쟁이이지만,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이다. 우리는 작지만, 때로는 거인들보다 먼 곳을 내다보기도 한다.

-윌리엄 수사


: 뉴턴에서 조나단 스미스에 이르기까지 숱하게 인용되는 말인데, 원래 누가 한 말이지는 모르겠다.

스미스의 거인은 엘리아데였다지.

 




Mors est quies viatoris, finis est omnis laboris

죽음은 나그네의 휴식, 모든 수고의 끝

-출전불명

: 라틴어 경구에 관심을 가지게 한 말.





 

Manduca, iam coctum est

드시지요. 잘 익었습니다.

-성 로렌초, 화형대 위에서

 : 성인은 죽음을 앞두고도 센스쟁이. 사실 예수의 "다 이루었다"도 상당히 아이러니하지.







 

제2일



 

“표적表迹처럼 보이는 것 중에는 실제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도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어버버’란 의미 없는 말처럼”

“‘어버버’라고 말하려고 수사修士를 죽이다니, 어지간히 극악하지 않습니까?”

“'Credo in unum Deum'(나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다)이라는 주장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도 극악하기는 마찬가지이지.”

-윌리엄 수사와 아드소의 대화


: 텅 빈 기표를 설명하면서 꽉 찬 기표를 독점한 사람들의 독선까지 디스하는 윌리엄 수사님.









“그것이 사실이라면 저희는 하느님께서 버리신 곳에 와 있는 것이군요?”

“하느님 거하시기에 편할 곳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느냐?”

-윌리엄 수사와 아드소의 대화


: 수도원에서 나누기에 적절한 대화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예수도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비슷한 말을 했었지.







 

유능한 조사관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에게도, 진실을 말한다는 이유에서 혐의를 둔다.

-윌리엄 수사


: 이 소설의 장르는 어디까지나 추리.





 








제3일

 



아름다워라, 젖가슴이여, 부풀어 올랐으되 지나치지 아니하고 자제하였으되 위축되지 않았도다

-호이트 사람 길버트, 《솔로몬의 아가에 대한 설교》


: 주인공 아드소가 욕망에 눈뜨게 되는 한 마디.

 


Omne animal triste post coitum

모든 동물은 교미를 끝내면 쓸쓸해진다.

-출전불명


: 주인공 아드소가 첫 경험 후 떠올린 한 마디.






 

제4일




 

Nihil sequitur geminis ex particularibus unquam

두 가지 사례에서는 어떤 규칙도 이끌어낼 수 없다.

-출전불명


: 비교연구하는 사람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 아닐까? 

제 3의 항이 없으면 이항대립은 발견할 수 있어도 이론은 만들어낼 수 없으니까.


 



amor est magis cognitivus quam cogitio

(우리는 사물을) 지식보다 사랑을 통해 더 잘 이해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 나는 이 말의 원래 맥락을 모른다.

단지, 직관은 관심과 사랑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경험으로 알겠다.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는 사실에 직면하면, 여러 일반적 법칙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그 법칙들이 우리가 직면한 사실과 어떤 관련을 맺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다 갑자기, 특정한 결과, 특정한 상황이 어느 한 법칙과 예기치 못한 연결을 보이고,

그러면 다른 것보다 설득력 있는 일련의 추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 추론을 다른 비슷한 경우에 적용해 보고,

그것으로 결과도 예측해 보면 우리의 직관이 맞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결론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실마리가 결론의 유도에 필요한 것인지,

어떤 실마리가 합리적 추론을 방해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섣불리 취하거나 버리는 일은 삼가야 한다.

-윌리엄 수사


: 난 이 말 외우련다. 우리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는 사실들"을 이해하면서 살아가니까.


 





책은 믿음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새로운 탐구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삼는 것이 옳다.

-윌리엄 수사


: 100% 공감. 나는 (에니어그램) 6유형적인 책읽기를 증오한다.

그건 문자에 대한, 때로는 저자에 대한 우상숭배거든.

이건 자신의 "경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제5일



 

“(적그리스도의) 머리는 불꽃으로 타오르고, 오른쪽 눈에서는 피가 흐릅니다!

왼쪽 눈은 고양이 눈 같되 눈동자가 하나가 아니고 둘이랍니다.

눈썹은 희고, 아랫입술은 부풀어 있고,

발목은 약하나 발은 크고 엄지손가락은 투박하고 길답니다!”


“저 영감, 자화상을 그리고 있지를 않나?”


-호르헤의 설교 중, 윌리엄 수사


: 중학교 다닐 때 읽은 <은하영웅전설>의 양웬리를 떠올리게 하는 독설. 읽으면서 피식.

참고로 영화 <<장미의 이름>> 속 호르헤는 이렇게 생겼다.








 

제6일




 

우리는 가능한 모든 질서와 무질서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윌리엄 수사


: 진리는 질서잡혀 있을 수도 있고 무질서할 수도 있으니까. 

세계마저도 카오스랑 코스모스를 왔다갔다하거든.







나는 다른 교회나 수도원에서도 거룩한 십자가 조각을 많이 보았다.

모두가 진짜라면 우리 주님은 널빤지 두 개를 걸쳐 만든 십자가 위에서가 아니라,

아주 널찍한 숲 속에서 돌아가신 모양이다.

-윌리엄 수사, 수도원의 relic 컬렉션을 본 후


: 성물이나 진신사리에 대해서 많이 하는 비판이다.

이어서 윌리엄 수사는 쾰른 대성당의 "세례요한의 두개골"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 두개골은 열 살 정도 되는 어린 아이의 것이었댄다.






꿈은 곧 성서이다.

그리고 성서의 많은 기록이 곧 꿈 이야기이지.

-윌리엄 수사


: 인셉션 본 직후라 그런지 꿈 이야기에 민감하다. 한땐 꿈 쓰는 공책이 항상 머리맡에 있었는데.





 



제7일



 

이 영감아, 악마는 바로 당신이야!

당신은 속았다.

악마라고 하는 것은 물질로 되어 있는 권능이 아니다.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이것이 바로 악마다!

-윌리엄 수사, 끝판왕에게

 

: 혹시나 나처럼 안 읽은 사람을 위해 끝판왕 이름은 가림.

믿음이 독선을 만나면 악마가 된다.

예수를 죽인 것도 대단히 신실한 종교지도자들이었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일.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일.

-윌리엄 수사


: 사실상 이 책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말인데, 

나는 복음서를 처음 봤을 때, 키득거리며 읽었던 부분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이를테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이라든가,

거라사의 돼지 수장시키기라든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줘버려라" 뭐 그런 거.

사실 웃음이야말로 세계의 균열을 보여주는 거니까.

혹 엄숙하고 비장한 혁명이란 낭만적 엘리트들이나 찾는 것이고,

모든 억눌린 이들의 혁명은 유머와 축제로 가득 차 있지 않을까?




 

Er mouz gelîchesame die leiter abwerfen, sô er an ir ufgestigen

지붕 위에 올라가면, 사다리는 버리는 법.

-독일의 신비주의자(누구지?)

 

: 이거 비트겐슈타인이 처음 한 말이 아니란다.

사실 많은 말이 그렇지 뭐.

"하나만 아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도 막스 뮐러가 처음 한 말 아니고,

"인간과 관련된 것 치고 나와 관계 없는 것 없다"도 조나단 스미스의 오리지날이 아니다.

뭐, 아무렴 어떤가.

어짜피 다 사다리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