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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프로젝트/혁명을 기도하라

오래된 착시

선입견이라는 것은 무섭습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나쁜 말만 왕창 들어왔다면, 그 사람의 좋은 면을 발견하기가

어렵지요. 또, 예전에 교과서에 많이 나오곤 했던 묘한 그림도 떠오릅니다. 어떻게

보면 컵 같고, 어떻게 보면 마주보는 사람 같은 그림 말이지요. '이건 컵이다'라고 듣고

보면 사람 머리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철학자들은 선입견이 없는 판단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뭘

보거나, 읽을 때에 예전에 들은 것들로 이루어진 필터나 안경을 쓰게 됩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요. 어쩔 수 없지만, 그 필터나 안경이 심각하게 오염된 것이라

원래의 모습을 거꾸로 보게 한다면 문제가 됩니다.


이런 착시현상이 가장 심각하게 일어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종교 경전입니다.

교리라고 하는 강력한 선입견이 작용하면 경전의 또 다른 의미는 좀처럼 잡히지

않습니다. 그건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럴 수도 있지만, 완전히 엉뚱한 의미로

읽게 한다면 그 선입견은 매우 위험합니다.




왜 갑자기 이런 '인식론'적인 얘기를 늘어놓는가 하면, 제 자신이 이것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에 담임선생님께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추천해 주셔서 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 이후로

시오노 나나미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번역돼

나온 건 다 읽었지요. 장래희망도 작가에서 역사가로 바뀌었구요. 지금 보면

읽기 괴로운 것도 적지 않지만...


이 책에서 읽은 성서 구절이 바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스무 살 전까지 성서를 읽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구절이 있다는 것도 거기서 처음 알았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후에도 이 구절이 굉장히 다양한 곳에서 쓰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네, 주로

정교분리(政敎分離)를 강조하기 위해서 인용되지요. 카이사르의 것, 즉 정치

영역은 국가가, 하나님의 것, 즉 종교 영역은 교회가 맡아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입니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기독교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 가운데 하나가 그

구절이었습니다. 정의감과 사회의식이 한참 자라던 20살 청년에게 그런 반동적인

표현은 구역질나는 것이었지요. 더구나 예전에 들은 '정교분리적 해석'보다 더욱

기괴한 해석이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이것은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이 옳으냐?'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입니다. 그러므로, '카이사르의 것'이라는 것은 세금이지요.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것'이라는 건 무엇입니까? 놀랍게도 꽤 많은 설교자들이 '헌금'이라고

가르친댑니다... ㅡㅡ; 국가에는 세금을 잘 바치고, 교회에는 헌금 잘 내라는

말이지요..이래저래 이중으로 뜯어먹혀라는 소리 아닙니까 이건.



이렇게까지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보통 이 구절은 세상의 법을 잘 따르고, 종교적

생활에도 충실해라는 식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직접 복음서의 그 구절을 읽었을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구절은 그런 식으로 읽히지 않습니다. 아니, 절대로

그런 식으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마태복음의 해당 부분을 옮겨 보겠습니다.


출처 : http://archangel-440.blogspot.com/




그 때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면 말로 트집을 잡아서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할까 의논하였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자기네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묻게 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지 말씀하여 주십시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의 간악한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 달라."


그들은 데나리온 한 닢을 예수께 가져다 드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황제의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탄복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남겨 두고 떠나갔다.



<예수 당시의 데나리온 은화>

출처 : http://www.aaacoinjewelry.com/romanimperialdenarius.htm



성서를 조금이라도 역사적, 사회적 맥락으로 보는 분이라면, 이 장면 속에 드러난

갈등이 보이실 겁니다. 로마 식민지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의 길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방관 내지는 굴종이고, 다른 하나는 저항이었지요. 그 가운데 예수의 위치는

대단히 애매했습니다. 메시아니 하나님 나라니 하는 젤롯들의 종말론적 용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면서도, 무장투쟁이나 선동전에는 가담하지 않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예수는 그 양쪽에 속한 사람들 모두에게 존경과 경계의 대상이었습니다.

핵심 제자인 사도들 가운데에도 명백하게 젤롯이거나 정황상 그럴 것 같은 인물이

최소한 2명 이상이고, 그들의 적 가운데 하나인 세리도 포함되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러한 애매한 정치적 위치는 예수의 적들에게는 좋은 약점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하기 위해'라는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묻습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가?" 하고 말입니다. 질문하기 전에 늘어놓는

아부를 봅시다. 그들은 예수를,

"진실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예수가 가르치는 절대적인 자유를 찬양하는 척 하면서

예수를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는 역할을 합니다. 아무데도 얽매이지 않는 모습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저항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예수를 공격하기 위해서

미리 선수를 친 거지요.


예수는 즉시 화를 냅니다. 대단히 짜증 섞인 반응이지요. 이건 마치 80년대 대학생들

강연회에 나가 있는 예수에게 교회다니는 청년들이 사복경찰들과 함께 앉아 있다가,

"당신 참 진실되고, 믿음 좋고, 진보적이고, 겉으로만 남 판단 안 하는 사람인 줄 알아.

그래서 말인데, 주한미군은 철수시켜야 할까?"라고 질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말입니다.

어느 쪽으로 대답해도 예수는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세금 내라고 하면, 강연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가뜩이나 그를 의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던 시카리들의 칼이 그의 등을

찌르겠지요. 세금 내지 말라고 하면, 이건 내란선동죄로 당장 안기부에 끌려가 십자가에

박히게 됩니다.


예수의 대답은 다소 황당한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동전에는 카이사르의 얼굴이랑 이름이

박혀 있으니 걔 거라는 겁니다. 그러니 돌려주라는 거지요. 흔히 받아들이는 의미와는

달리 예수는 "납세의무를 다하세요."라는 말이 아니라, "이건 지꺼니까 이거 먹고 꺼지라고

하시오."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동전에는 카이사르의 얼굴과 이름이 박혔으니 카이사르에게 돌려주라고 앞에서 말했으니,

'하나님의 것'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얼굴과 이름이 박혀 있어야 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입니다. 그러니 예수의 말은


"자기네 얼굴 박힌 동전 같은 건 얼마든지 줘버리세요. 하지만, 하나님의 얼굴이 박힌

우리들은 절대 저들에게 굴복해서는 안됩니다."


라는 말이 됩니다. 질문 자체를 해소시켜 버린 것이지요.





여기엔 특별한 해석 기술이 동원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읽히는대로 읽어도 저에게는

이런 의미로밖에 읽히지 않습니다. 나중에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비슷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주로 20세기 이후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이건 특별히 자유주의적이거나 인본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텍스트를

정직하게 읽으면 그렇게 보입니다. 대체 무엇이 이런 명확한 장면을 두고 정교분리니

뭐니 하는 이상한 해석이 튀어나오게 했을까요?


성경 내적인 증거를 가지고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예수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에 반대했다'고 고발당합니다. 이것은 당연히 이 장면을 가리키는

고발 내용입니다. 예수는 세금 바치는 것을 찬성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가 폭로

하고 있는 것은 카이사르의 얼굴이 박힌 '돈'과 하나님의 얼굴이 박힌 '인간' 사이의

대립입니다. 빤쓰까지 남김없이 다 빼앗기더라도 인간만은 누구에게도 굴종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이 놀랍고 오래된 착시 현상. 그 충격 이후로 저는 글을 꼼꼼히, 정직하게 읽는 법을

배웠습니다.

 



불거토피아 http://cafe.daum.net/bgtopia

('06.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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