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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프로젝트/혁명을 기도하라

월급날엔 교회에서 와인에 삼겹살 파티를!

종종 교회 다니는 분들과 같이 술자리를 가질 때가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 술은 일체 입에 대시지 않지요.

처음 교회 갔을 때 가장 적응 안 되는 게 그거였습니다.

나는 성경을 먼저 읽어보고 교회에 갔으니,

그리스도인들이 술을 먹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술 먹는 걸 부정적으로 보는 장면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술 먹는 것 자체에 대한 “금지”까지는 아니고, 제한적이며,

맥락상 다른 주장들과 연결되어 있지요.


대표적인 예로,

<에베소서> 5:18에는 “술 취하지 마라. 그것은 방탕한 일”이라고 직접 말하고 있지만,

이건 술에 대한 금지라기보다는 다음에 나오는 “성령으로 가득해져라”를 위한 말이죠.

술 취하지 말라는 건 주로 바울 서신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갈라디아서> 5:21, <고린도전서> 5:11, 6:10, <로마서> 13:13 등이지요.

이들 구절에서 하지 말라는 건 μεθύω, μεθύσκω 같은 단어들인데요.

명백하게 “마시다”가 아니라 “취하다”입니다.

같이 나열되는 것들이 늘 무절제, 질투, 탐욕과 같은 것들로,

흥청망청 낭비하는 그리스식 향연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지요.

히브리 성서, 특히 예언서들에도 술 취해 흥청망청 낭비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하는 악한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이 나타납니다.

 

(바울이 비판하는 “동성애” 문제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을 거 같은데요.

이건 다음에..)


반면, 십일조에 대한 <신명기>의 규정을 보겠습니다.

이 시기의 십일조는 누군가에게 “바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족끼리(대가족입니다. 고용인들도 포함이구요)

그 해에 생산한 곡식, 포도주(!), 기름 등의 10분의 1을 성전에 가져가서

야훼 하나님 앞에서 먹는 거였죠.


그리고 성전이 너무 멀어서 생산물 자체를 가지고 가기 힘든 사람들은,,

그걸 돈으로 바꿔서 성전으로 가도 되었습니다.

고대에 종교적 성지 근처에 시장이 형성된 이유 중에 하나지요.

여기서 사람들은 그 돈으로 “먹고 싶은 것”을 삽니다.

소도 되고, 양도 되고, 포도주도 되고, 독주(!!)도 살 수 있는데요.

그걸 식구들이랑 같이 “야훼 하나님 앞에서”(!!!) 먹어야 했지요.

음...이왕이면 교통비 좀 들더라도 성전에선 좀 멀리 떨어져 사는 게 좋겠네요.

왜 돈으로 살 때만 독주(히브리어 “셰카”, 영어로는 strong drink로 번역)가 포함되냐면,

독주는 요즘 말로 리큐르(증류주)라서 수확하자마자 만들어 먹을 수는 없지요.

그래서 현물로 십일조 할 때는 대상품목이 될 수 없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현물 포도주도 잘 숙성된 게 아니라, 보졸레 누보 같은 겉절이였겠지요. 

그러니까 성전에서 잘 숙성된 와인과 소주를 맛나게 먹으려면

화폐를 쓰는 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는 겁니다.


또, 이건 자기들끼리만 먹는 게 아니라,

제사 진행을 전담하고 있어서 농사나 목축을 할 수 없었던 레위인들,

(“비구”, “비구니”의 어원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떠돌이, 고아, 과부 등 극빈계층을 배부르게 먹이는 데에도 쓰였습니다.


음..이런 십일조의 원래 정신을 현대에 살리려면,

월급날마다 10분의 1만큼 고기, 와인, 막걸리, 맥주, 소주 등 맛있는 거 사다가

교회 주변에 사는 어려운 사람들 불러서 같이 술판을 벌여야겠네요.

물론 강단상이나 제단 앞에서.


실행할 분들을 위해 참고. 좀 더 “성경적”인 메뉴를 원하신다면

삼겹살 대신 쇠고기를... <사진출처/관련기사>



결국 포도주든 독주든

의례용으로 중요한 거였고,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먹는 술이었단 거지요.

술이 아예 “금지”되는 것은 금욕적 수도자에 가까웠던 “나실인”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술에 관한 한, 저는 <잠언> 31장을 참 좋아합니다.

이 잠언은 “왕이나 권력자들은 포도주나 독주를 먹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면 남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자들이

술 먹고 법을 잊어버리고는

가난한 사람들의 송사를 정의롭지 못하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죠.

한편, 죽게 된 자에게는 독주를,

마음에 근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포도주를 주어라고 합니다.

잠시라도 마음의 고통을 잊을 수 있도록 말이지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유난히 강조하는 금주는

의외로 서구에서는 역사가 그렇게 길지 않고, 주류문화도 아니었습니다.

 [참고: 위키의 prohibition]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한국기독교에서 유독 금주를 강조하는 것은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겠습니다.


① 초기에 한국에 들어온 북장로회, 남침례회 소속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적 성향

② 기독교의 사회구원적 측면에서의 금연, 금주 운동

③ 국채보상운동 등 시국 관련 캠페인에서의 교회의 적극적 참여


분명 초반에는 금주운동이 ②, ③의 측면에서 큰 공감을 얻었을 거라고 봅니다.

당시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꼴초국가였고,

술로 인한 가정폭력이 일상화되어 있었으며,

이런저런 역사적 사정으로 빚더미에 앉아 있었으니까요.

이때의 금연금주운동은 확실히 외세에 대한 저항의 의미까지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게 준교리화된 것은 일제시대를 겪으면서 사회복음적 의미가 쇠퇴하고,

근본주의적 성향이 강화된 탓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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