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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프로젝트/혁명을 기도하라

예수는 먹보에 술꾼

앞의 글에서 저는 주로 히브리성서에서 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에는 술에 대한 금기는커녕,

십일조까지 야훼 앞에서 즐거운 술자리로 드리라는 규례가 있었고,

특히 고통 받는 이들에게 술을 줘라는 잠언도 있었습니다.

한편 술을 마시면 안 되는 것은 두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야훼에게 서원하고 자기 몸을 성별하여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나실인,

그리고 왕이나 권력자였지요.

술은 종교적 엘리트나 정치적 엘리트에게는 금지되거나, 적어도 권장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중은 과음만 아니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겁니다.


이제 예수 얘기를 해 볼까 합니다.


예수는 기본적으로 술 마시는 것 자체는 물론

과음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유대 지방은 한반도 전통 사회처럼

“반주”로 술을 마시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포도주는 식사에 빠질 수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가끔 근본주의자 가운데 이 “포도주”를 “포도즙”으로 바꾸어 읽는 사람이 있는데

교리에 맞춰 경전을 고치려는 억지입니다)


예수의 첫 기적이 “물을 포도주로” 바꾼 것이었다는 사실은 유명합니다.



안드레아 보쵸리(1560~1606) 작품입니다.

르네상스 작품답게 고증은 엉망이지만 분위기가 좋네요



예수가 십자가를 향하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가진 회식 자리,

흔히 말하는 “최후의 만찬”의 메뉴는 누룩 없는 빵과 포도주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한 사건을 기리는 명절이자,

예수로서는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함께 한 식사였지요.



이 자리에서 예수는 빵을 떼어다 주며 “내 몸이다. 받아라”고,

포도주를 따라 주며 “내 피다. 받아라”고 합니다.

이 일이 의례화되면서, 그리스도교는 유교와 더불어

핵심적인 의례에 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세계종교가 됩니다.


또 이에 비해서 별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을 마실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나온 것(포도주)을

먹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하지요.

실제로 이 대사가 등장하는 공관복음서들의 십자가형 장면에서

예수는 로마군이 주는 포도주(쓸개나 몰약 같은 진통제가 들어간)를 거부합니다.

한편, 그런 말을 하지 않는 요한버전의 복음서에서,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목이 마르다”고 말하고,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마시고는 “다 이루었다”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둡니다.

예수의 공생애는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났군요.


사실 예수의 반대자들은 예수의 식탐(?)과 술버릇(?)을 걸고넘어지기 일쑤였습니다.

예수 자신의 말을, 널리 쓰는 개역개정판 성경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누가복음 7:33-34, 병행구절 마태복음 11:18-19)


누가복음 5:33을 봐도 사람들은 예수를 보고,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면서 기도하고, 바리새파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 제자들은 먹고 마시네요?” 하고 의아해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요한은 전형적인 히브리 예언자의 모습을 보인 사람이었습니다.

광야에 살며 메뚜기랑 꿀만 먹고 살았지요.

바리사이 역시 헬레니즘 문화의 침투에 대한 반작용으로

히브리성서의 율법, 사실은 그보다 더 많이 엄격한 규례들을 강조한 사람들이었고요.

이런 사람들과 예수의 집단은 달랐습니다.

잘 먹고, 잘 마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이 술 마시는 것을 꺼려하지 않으면,

당장 저런 반응이 나타나겠지요.


예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했다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비판은,

사실 많이 순화된 번역입니다.

φάγω(먹다)에서 나온 φάγος의 가장 좋은 번역어는 “먹보”,

οἰνοπό́́ης는 좋은 말로 “대주가”, 사실은 “술고래”나 “술꾼”쯤 됩니다.

아무리 적들의 말이라고 해도,

차마 예수에게 먹보니 술꾼이니 할 수 없었던 번역자들의 배려였던 것 같습니다.

NIV의 경우에는 “a glutton and a drunkard" 로 충실한 번역을 했네요.

KJV마저도 “a gluttonous man and winebibber”라고 노골적인 표현을 했구요,

같은 시기의 제네바 성경이 “a man which is a glutton, and a drinker of wine"라고

다소 돌려 번역해 놓았습니다.

일본어 번역은 세 가지 정도 검토해 봤는데, 이렇습니다.


 

新改譯

口語譯

新共同譯

φάγος

食いしんぼう

 食をむさぼる者

大食漢

οἰνοπό́́ης

大酒飮み

大酒を飮む者

大酒飮み


어쨌든 “식충이”, “대식가”, “술 많이 먹는 사람” 정도입니다.


한국에서 70년대에 나온 공동번역의 경우,

“즐겨 먹고 마시며” 정도로 어물쩡 넘어갔고,

2000년대 이후에 나온 가톨릭 성경들(성경, 200주년 신약성서)에서는

“먹보”에 “술꾼”으로 직역했습니다.


개신교 성경에서도 90년대에 나온 표준새번역에서는 “먹보”에 “술꾼”이 되어 있는데,

이후에 나온 개정판들(표준새번역 개정판, 새번역)에서는

“마구 먹어대는 자”, “포도주를 마시는 자”가 되었습니다.

전 표준새번역 1판을 먼저 접한 탓에,

당연히 “먹보”에 “술꾼”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개정판에서 바뀐 걸 보고 충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고작 예수의 적들이 한 말을 가지고 왜 이렇게 온갖 번역을 다 비교해 보았냐면,

유독 한국 개신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판과 새번역에서만

“포도주를 마시고” “즐기는” 행위 자체가 문제인 것처럼 번역되었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나의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능! 술 마시고 즐기는 분 아니라능!”

정도의 반응이지요.

이건 90년대 이후 대한성서공회가 전반적으로 보수화한 탓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의미도 잘 통하고 원문의 단어에 충실한 번역을

굳이 저런 부정확하고 긴 말로 “개정”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예수는 술주정뱅이에 식충이까지는 아니라도,

점잖고 “홀리”한 사람만은 아니었던 게 분명해 보입니다.

그건 바리사이의 특징이지요.

탈속적이고 금욕적인 구도자 스타일도 아니었을 겁니다.

그건 세례요한의 특징이었으니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일반적인 식성과 주량을 가지고,

편식 안 하면서 잘 먹고,

술자리는 적당히 좋아하고

그런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지요.

예수의 적들이 비판하고 있는 것은 “술 먹는” 사람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예수의 말을 주목해 보면,

그의 적들은 예수가 “먹보”에 “술꾼”인데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주로 같이 먹고 마시며 놀았던 사람들이,

의례적으로는 부정하며, 사회적으로는 천대계층이었던 사람이었단 거지요.

이건 당시의 율법체계에서는 더럽고 추한 일이었겠지요.

그것은 부정한 인간들과의 구분을 통해서 성스러움을 획득하려고 했던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부랑아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가지는 “먹보”에 “술꾼”.

그런 사람이 “메시아”라는 소문이 도는 것 자체가

당대의 근엄한 권력자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섬뜩한 위협이었습니다.

그건 자신들의 권위를 보장하는 체제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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