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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발제

부르크하르트와 문화적 역사주의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1.사상적 배경과 성장과정

2.19세기 위기의식과 문화사 서술

3.독일역사주의와의 관계




 1.사상적 배경과 성장과정

 부르크하르트는 1818년에 태어나 혁명의 시대를 통해 성장하고, 제국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활동했다. 이 시기 유럽의 가장 큰 사상적 흐름은 네셔널리즘일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을 휩쓴 네셔널리즘은 근대국가의 형성, 그리고 제국주의화를 향하고 있었다. 국제관계 역시 근대적으로 재편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산업혁명을 겪으며 물질생활이 혁명적으로 변했고, 노동계급의 성장에 따라 변혁운동도 거세게 일어났다.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의 이념이 대립했고 다양한 학문적 흐름이 일어나기도 했다. 부르크하르트는 이 시대 속에서 역사에 주목했다는 점에서는 랑케 등 역사주의자와 닮았고, 당시 지적 주류에서 벗어나 있는 아웃사이더이면서 당시 상황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그 핵심 문제로 '문화'를 제시했다는 점에서는 니체와 닮은 면이 있다. 실제 그의 삶 속에서 부르크하르트는 그 두 부류의 학자와 관계를 맺었고, 이는 그의 역사 서술에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부르크하르트는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에 있는 스위스의 바젤에서 태어났다. 부르크하르트 가문은 바젤의 유서깊은 귀족 집안이었고, 아버지는 프로테스탄스 목사였다. 어머니 역시 명문 쇼렌도르프 가문 출신으로 부르크하르트는 귀족적인 가풍과 예술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음악에도 재능을 드러내 29세까지 적지 않은 가곡을 쓰기도 했고 오페라를 즐기고 건축, 시에도 두루 관심을 가졌으며 실제로 창작도 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것이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는데, 이는 그에게 "모든 지상적인 것에 대한 허무와 불확실성"을 통감하게 되는 계기였다고 한다. 그가 서양문명의 장래에 회의를 느꼈으며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1936년 바젤 대학에 들어간 부르크하르트는 처음엔 그리스를 연구하다 신학을 공부하게 되고, 나중엔 역사학으로 전공을 옮기게 되었다. 베를린 대학으로 옮긴 것은 1839년의 일이었다. 당시 베를린 대학에 있었던 교수들이 레오폴트 폰 랑케, 아우구스트 뵉크,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 프란츠 쿠글러, 야콥 그림 등이었다. 이들 중에서도 부르크하르트에게 깊은 영향을 준 사람이 역사학파의 거두인 랑케였다. 그는 랑케의 세미나에도 참가했는데, 초기에 랑케의 역사관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이후엔 결별하게 된다. 부르크하르트에게 더욱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미술사가 쿠글러였다. 미술사의 영향으로 부르크하르트의 관심은 이탈리아 및 르네상스로 쏠리게 되었고, 이후 그의 역사 서술에 있어서는 랑케 등의 관심사였던 법률, 정치, 외교가 아닌 미적 요소가 중시되었다.

 1843년 부르크하르트는 바젤 대학 역사 강사로 부임하게 된다. 이 시기 그는 바젤에서의 정치적, 종교적 분쟁에 관심을 가지고 바젤신문의 편집 책임자로 잠시 일하기도 하지만, 격렬한 분쟁은 그의 취미에 맞지 않았다. 곧 신문사의 자리를 내놨을뿐더러 정치적인 활동으로부터 영원히 결별할 것을 선언하기도 한다. 이후 쿠글러의 소개로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에서 얼마간 일하다 이탈리아 여행 후 돌아오게 되는데 그 해가 1848년이었다. 전 유럽에 혁명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혁명은 부르크하르트에게 공포를 주었고, 그의 자유주의적 정신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자유주의를 완전히 포기하게 만들었다. 베를린 유학 시절부터 관계를 맺고 있던 자유주의 써클 '쌍무늬바구미단'의 지도자 뫽켈-마띠, 킨켈 등과도 결별하게 된다. 게다가 연인 슈텔렌과도 헤어지면서 일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연구에만 몰두하게 된다. 이런 외적 환경을 겪으면서 그의 정신 세계는 점차 심화되며 완숙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후 그의 대표적인 저술은 다음과 같다. 그는 1897년에 사망했는데, 후기작품들은 그의 사후에 출간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사'(1853)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1860)

 '이탈리아 미술사론'(1867)

 '뤼벤스의 회상'(1898)

 '그리스 문화사'(1898-1902)

 '세계사적 고찰'(1905)


 2.19세기 위기의식과 문화사 서술

 부르크하르트의 시대는 국가주의, 진보주의, 대중주의, 산업주의의 시대였다. 모두 낙천적인 현재인식, 근대국가의 형성에 복무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는 이런 생각을 거부 또는 혐오하였다. 그는 19세기를 위기의 시대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역사는 세 가지 잠재력(drei Potenzen)에 의해 형성되어간다. 그것은 국가, 종교, 문화이다. 국가는 법의 수호자로 권력을 그 근원으로 하고 있다. 권력은 기본적으로 폭력적인 것이지만 창조적인 개인에 의해 긍정적인 힘이 될 수도 있다. 종교는 인간의 형이상학적 욕구에서 나온 것이며, 그 보편적인 강제성 때문에 국가를 컨트롤하고 문화에도 영향을 준다. 문화는 정신적, 도덕적 생활의 표현으로서 물질적 촉진을 위해 형성된 바들의 합이다. 이는 종교와 국가를 수정하는 역할을 한다. 이 세 가지 요소 중 어느 하나가 비정상적으로 강화되거나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 때문에 근대국가의 강화는 문화를 억압하는 결과를 낳았고, 프로테스탄티즘이 국가에 종속되었던 사실과 반혁명시기 종교가 왕권과 결합했던 일은 모두 종교의 순기능은 억압한 사례라고 보는 것이다. 더욱이 그가 살았던 19세기의 산업주의와 제국의 등장은 문화와 종교를 다같이 위기에 빠트리고 있었다.

 부르크하르트가 주목한 것은 문화였다. 문화는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어떠한 보편적 또는 강제적 가치도 요구하지 않는 모든 정신적 발전들의 총계이다." 때문에 문화형성을 위해서는 속박이나 제약이 없는 자유로운 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개별인간들의 가치와 품위가 존중되어야 하며, 개별인간들의 활동을 통해 그들은 문화창조자이자 운반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문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개별인간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정신의 자발적 발전을 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아테네와 르네상스 시기 피렌체에서 문화가 꽃피었던 이유가 이것이다. 그 시기엔 거대한 정신적 "교환장소"와 정신적 및 기술적 활동의 문화적 요소들을 접촉시키는 "사회적 교제"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근세사의 전개과정에서 국가와 문화와 개인과의 관계는 부정적으로 흘렀다. 계몽주의의 진보신념과 프랑스대혁명은 과도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형성시켰고, 종교개혁 시기 이후로 종교가 국가에 종속되는 현상이 지속되면서 인문주의 정신의 발전이 어렵게 되었다. 부르크하르트는 결코 진보를 신뢰하지 않았고 '현재'와 '진보'를 동일시하는 당시의 주류 사상을 비난했다. "인간의 정신은 수 천 가지 방향으로 각성되었으며...결국은 세계가 변했고 정신적으로는 무한히 풍부해졌다"고 말하긴 하지만, 현재를 진보라고 보고 인간의 이성으로 진보를 위한 이념을 이끌어갈 수 있다고 하는 데에는 "여기에는 인간의 정신이 완전성을 향해, 또는 도덕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가소로운 자부심이 결부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신은 이미 일찍이 완전했었다!"고 말한다.

 19세기의 특징은 강대한 국가권력이었다. 부르크하르트는 권력이 "정치적 강제들의 총괄개념"으로서 개인들의 자발적인 사고를 억압하고, 나아가서 문화를 희생시킨다고 보았다. 심지어 "권력이란 그 자체가 악마적인 것이다"라고 밝히기도 하였다. 때문에 권력을 지향 및 확대하는 국가주의는 위험한 사상이다. 당대의 강대국주의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랑케 역시 각 시대에는 경향성이 있을 뿐 역사의 진보는 인정하기 어렵다고 말하긴 했지만 국가와 민족의 고유한 본질을 지키기 위한 투쟁은 인정하였다. 부르크하르트는 국가를 자유의 매개체로 보았던 헤겔이나 국가를 현실적, 정신적인 것으로서 긍정적으로 보았던 랑케와도 달랐다.

 물론 그가 권력의 기능과 역할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 역시 역사에 작용하는 세 가지 잠재력 중의 하나인 이상 순기능도 있다. 권력은 문화를 외부의 위협에서 보호하며, 문화는 권력에 의해 확보된 기반 위에서 더 높은 수준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 모순되어 보이는 이같은 주장은 역시 그의 삶의 환경 속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는 무절제한 자유에서보다 견딜만한 전제군주 아래에서 오히려 훌륭하게, 또는 보다 더 잘 발달한다." 그리고 "시민의 부를 통해 제약받는 문화가...창조적인 능력을 더 많이 발휘했다"고 언급했다. 전자에는 군중의 정치적 자유에 대한 공포가, 후자에는 그의 귀족적 계급성이 드러난다.  어쨌든 그에게 있어 국가와 문화의 관계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인 동시에 비극적인 관계였다. 권력 그 자체는 악한 것이지만 문화의 보호와 발전을 위해, 또한 그 조정을 위해 행사될 때는 정당하며 필요하다.

 이런 문화관과 국가관은 그가 역사를 '병리학적'으로 관찰하겠다고 천명한 것과 관계가 있다. 세계 잠재력들의 영향이 가속화되면서(어느 하나가 강해지거나 억압되어) 일어나는 '역사적 위기들'은 "생의 진정한 표시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일종의 발전열기이며, 사멸된 생의 형식들을 쓸어내는 청소과정이라는 것이다. 강연집인 '세계사적 성찰'의 4장 '역사적 위기들'에는 민족이동, 후스파운동, 종교개혁, 크롬웰의 등장 시기 등을 그 예로 들고 이다. 이런 위기들은 공포와 전체주의적인 특성에도 불구, 역사가 겪어야 하는 하나의 치유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폭력과 파괴를 수반하는 위기들은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해당 민족이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역사에서 권력이 작용하는 국면을 경우에 따라 인정했다.

 단, 그 국면들이란 권력의 작용이 세 잠재력 사이의 균형을 다시 세울 수 있고 역사의 다른 형성력을 방해하지 않는 경우여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권력은 역사발전에 저해적인 작용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부르크하르트는 자신의 시대를 위기의 시대로 보았다. 19세기의 위기는 "생의 표시"가 아니라 "중병"이었다. 권력과 문화의 관계는 불균형속에 빠져버렸고, 문화는 더 이상 역사발전의 한 작용요소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첫째로 강대국주의를 지향하는 국가권력의 속성 상 사상 유례없는 강력한 근대국가가 발생했다. 둘째로 산업발전이 영리감정을 자극시켰고, 보다 더 잘 살겠다는 목표를 생활의 내용으로 만들었다. 결국 인간은 앞만 바라보고 질주해나갔다. 국가는 대중의 그러한 물질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선 그들의 요구에 따라 더욱더 강력해지고자 했다. 제국주의는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노동대중은 평등주의적 민주주의를 급진적으로 추구하면서 전승된 질서를 균등화시키는 방향의 운동을 펴나갔다. 부르크하르트는 이런 운동의 획일주의가 역사생활의 다양성을 질식시켜버린다고 보았다. 부르크하르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기존 질서와 문화의 파괴가 국가에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적 과제를 부여해 국가가 대중의 요구를 이용해 전체주의에의 길로 나가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부르크하르트의 현실인식 및 미래전망은 상당부분 정확했다. 실제로 유럽은 1848년의 사회혁명을 겪은 후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국가 간 전쟁이 일어났으며 다음으로 파리코뮌과 비스마르크의 패권성립을 체험했다. 이 과정에서 대중주의는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적 과제를 어느 정도 실현시켜 나갔지만 모순되게도 민족주의적 강대국화의 과제도 함께 요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전반적인 위기상황 즉 파괴적 전체주의의 등장이었다. 부르크하르트에게 있어 이건 진보도 아니고 발전도 아니며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이용하는 군사주의의 개인에 대한 착취에 불과했다. 문화는 몰락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랑케 역시 대중운동을 부정적으로 보면서도 전통에 기반해 보수적 권위를 유지하며 이룩한 비스마르크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인정했지만, 부르크하르트는 비스마르크의 위로부터 변혁 역시 또 하나의 혁명이며 이는 구질서의 전복이라 또다른 위기를 불러올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전망했다. 그의 반산업적, 반대중적 사고는 귀족주의적이며 보수주의적이었으나 버크 이래의 낭만주의적, 정치적, 비발전주의적 보수주의와는 다른 문화적 보수주의였다.

 이런 현실 인식 속에서 부르크하르트가 택한 것이 문화사의 서술이었다. 그는 문화의 각 과정을 각 민족들에게서의 교육과정의 계승으로 보았는데, 그의 문화사 서술은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과 문화적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서술에 의식적으로 그런 과제를 세우고 있었다. 문화는 3가지 잠재력 가운데 하나이면서 정신적 발전들의 총계이다. 문화사는 국가 및 종교에 대한 조정의 진행으로서 과거를 의미있는 하나의 전체로서 제시할 수 있는 역사이다. 이 문화사를 통해서 그는 자신의 현재인식을 재확인했고 미래전망 역시 가능하게 되었다. 정신의 연속성이 전개하고 있는 문화의 과정은 중단없이 지속되는 진행으로 과거와 현재의 연속이다. 문화사 서술의 분명한 목적은 고전고대 문화의 원형을 살펴봄으로서 현재를 인식하고 궁극적으로는 문화를 재생시키는 것이었다.

 부르크하르크는 문화재생이라는 현실적인 과제를 세우고 있었으므로 그의 문화사 연구방법과 서술은 분명히 객관주의적인 것이 될 수는 없었다. 니부르, 랑케 등이 언어학적, 비판적 방법을 통해서 과거 사료를 해당 시대의 조건과 상황 속에서 해명하는 것, 현재 역사가의 관점보다 당시에 대한 직관적 관찰을 중시했던 반면, 문화사 서술에서는 그런 방법으로는 부족했다. 당시의 엄격하고 철저한 역사서술보다는 프랑스역사가들의 문체론적 성향을 선호했으며, 제한된 분야의 대가보다는 정신생활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대아마추어(Erzdilettante)'를 자칭했고, 비판과 해석보다는 관조를, 사료의 정확성 자체보다는 사료가 표현하는 견해가 얼마만큼 시대정신을 나타내고 있는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3.독일 역사주의와의 관계

 1948년 랑케의 계보를 잇는 프리드리히 마이네케는 '랑케와 부르크하르트'라는 저술을 통해 부르크하르트와 역사주의의 관계에 대해 화두를 던졌다. 이에 앞서 1차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그는 부르크하르트의 문화사적 서술이 정신적 연속성을 추구하는 것이고, 관조적 태도를 통해 객관성을 보증한다고 찬양했으나, 자기시대의 삶에서 멀리 떨어져 관조만 하는 이기주의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을 체험한 후에는 부르크하르트가 랑케보다 자기 시대의 본질을 더 예리하게 파악했고, 다가오는 미래를 더 정확하게 전망했다고 평가했다. 이 저술이 발표된 이후 부르크하르트와 역사주의와의 관계는 여러 방면에서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앞에서 밝혔듯 부르크하르트는 랑케 주도의 베를린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했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그도 역사주의자에 포함된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스승과 제자, 정치사가와 문화사가, 프로이센인과 스위스인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또한 랑케가 "세계사의 규칙적인 항상적 발전"을 주장했다면, 부르크하르트는 "도약과 전락", "세계사의 어두운 측면들"을 바라보았다. 또 랑케는 국가, 종교, 예술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포괄적인 문화 개념 속에 집어넣은 반면 부르크하르트는 문화를 국가와 종교와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마이네케에 의하면 랑케는 "역사에게서 인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물었다면 부르크하르트는 "인간에게서 역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르크하르트와 역사주의 사이에는 많은 사상적 유사성이 발견된다. 가장 큰 것이 헤겔의 역사철학에 대한 반발이다. 랑케는 역사가 어떠한 필연성을 갖고서 일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가정은 철학적으로 수용될 수도, 역사적으로 입증될 수도 없다고 보았다. 드로이젠도 자신의 역사이론이 역사철학이 아니라고 천명하였다. 부르크하르트 역시 역사철학은 켄타우르스이며 '형용모순'이라고 비판했다. 더불어 이 둘 사이의 공통점은 역사에서 어떤 정신적 또는 이념적인 것을 얻어내고자 했다는 것이다. 역사주의의 개척자인 훔볼트는 역학의 목적이 "인류를 통해 표현될 이념을 그 모든 방향과 모든 형상으로 실현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랑케도 역사 세계 안에 개별적 현상으로 표출되는 영원하고 신적인 "이념"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세계사 서술의 가장 우선적인 과제라고 강조했다. 드로이젠도 과거로부터 현재 안에 이념적으로 풍부하게 채워진 것을 밝혀내는 것이 역사학의 임무라고 밝혔다. 랑케의 경우는 "모든 역사 서술은 정신적인 것을 서술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부르크하르트 역시 역사가 동일한 것의 유형적, 반복적인 전개과정으로 그 안에는 연속성이 지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연속성은 인간정신이 이룩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적인 모든 것"은 "하나의 역사적 측면"을 갖고 있으며, 일어났던 모든 것은 "하나의 정신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 정신적 연속성이 전통을 새로이 하고 전통에 속박된 인간을 해방시켰을 때, 문화는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만 보면 부르크하르트 역시 역사주의자에 포함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는 역사주의자와 분명히 거리를 둔다. 그는 역사주의자들의 비판적 연구방법을 지양했으며 역사주의자들의 사변을 거부하였다. 이들 대신에 택한 방법이 '관조'였다. 관조는 미학적 관찰과 더불어 일정한 사색과 성찰, 경우에 따라서는 비판까지 포함하는 대상에 대한 매우 포괄적인 접근 방식이다. 그 대상에 있어서도 역사주의자들이 초개인적인 역사 단위, 즉 민족, 국가, 종교, 법제나 유명한 인물들을 다루는 경향이 있는 반면, 부르크하르트는 역사적 "인간"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개인들"이나 "개별 사실들의 서술"을 피하고 해당 시대의 "영원한 인간과 "하나의 형상"을 얻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는 '개체'가 중요한게 아니라 개체들이 모여 집합적으로 만들어낸 '형상'이 관심사였던 것이다.

 또한 부르크하르트는 계몽주의에서 말하는 '진보' 개념을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역사주의의 핵심개념인 '발전'개념도 거부했다. 역사주의에서 발전사상은 하나의 개체가 시간의 흐름 안에서 자기의 고유한 특성을 발현시켜나간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는 역사의 본질을 발전이나 진보가 아니라 기껏해야 '변화'정도로 본다. 그에게 중요한 개념은 '개체'나 '발전'이 아니라 '반복'과 '전형'이었다. 이 점에서 부르크하르트는 엘리아데 등 20세기의 신화학자 및 정신사학자들과의 유사성마저 보인다. 서술 방식에 있어서도 역사주의자들의 그것이 서사적이라면 부르크하르트는 묘사적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 연구를 결코 그 자체로 정당화하거나 목적화하지 않았다. 역사연구는 보존될 만한 가치를 가진 인간적인 현상들을 발견하고 기록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일지라도 모든 노력과 경비를 들여서라도 과거가 완전히 재구성될 때까지 수집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우리의 최고의 정신적 재산에 속하는 과거에 대해 우리 책무가 갖는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역사 연구를 통해 "경험을 통해 그때그때 영리해지기보다는 영원히 지혜로워지기"를 갈망했다.

 그는 역사주의자들과 전혀 다른 방법과 시각에서 '객관적 인식'과 '영원한 지혜'를 안겨 줄 인간의 정신적 토대로서의 역사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부르크하르트는 당대의 아웃사이더로서 주류 지성이었던 랑케와 다른 방법으로 그의 '문화적 역사주의'를 구축했다.

 

 

 

 참고문헌

 『세계사적 성찰』 야콥 부르크하르트, 이상신 역

 『혁명 시대의 역사』 야콥 부르크하르트, 최성철 역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야콥 부르크하르트, 안인희 역

 『부르크하르트와 니이체』 차하순, 정동호 공저

 『부르크하르트와 역사주의』 최성철

 『부르크하르트의 문화사의 과제』 이상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