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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발제

그리스도교 교리의 몇 가지 논점들

예~전에 맥그래스의 기독교 개론 책 읽으면서 풀어 본 “형성평가”



 



1.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것은 예수의 어법이었다. 구약 전통에서는 비유적인 표현(예를 들면 이사야 63:16) 외에는 하나님을 직접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나타내는 호칭이다.

 먼저 하나님은 추상적인 관념이나 신성한 힘보다는 인격적인 존재로 경험된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역시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와 같은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관계로 묘사된다.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존재의 기원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버지가 자기 자식들을 돌보듯이 인간을 돌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사이의 수평적인 관계와도 관계가 깊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모든 인간은 형제고 자매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아버지”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서에서 하나님은 “반석”과 같은 무성적인 물체에 비유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속성은 모성에 관련된 말들로 비유되는 일도 많다. 즉, 아버지라는 것은 하나님의 부성적 측면을 표현하는 비유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이 하나님이 정말로 ‘남성’ 인간이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2.그리스도교의 창조교리의 함의는 무엇인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교리의 중요한 함의는 다섯 가지 정도 지적할 수 있다. 1.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구분이다. 이것은 바울의 로마서 이래로 신학의 중요한 주제였다. 2.창조는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와 소유권을 함축한다. 3.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교리는 창조의 선함을 함축한다.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보시기에 좋았다”. 즉, 그리스도교의 창조교리는 영지주의나 양성론에서 말하는 세상의 악함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창조는 현재의 세상이 ‘완벽’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죄에 의해 원래 의도된 세계와 멀어졌다. 창조세계는 ‘회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4.창조의 교리는 창조 세계 속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즉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라는 것을 알려준다. 5.또한 창조교리는 성과 속에 대한 서구적인 구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특별히 세계의 특정 부분-사람이든 장소든 시간이든-만을 성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생각에서 도출된 것이 개신교의 만인사제설이다.



3.그리스도교 교회는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기념한다. 그 성령강림으로 무엇이 달라졌는가?

-오순절의 성령강림사건은 그리스도교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이 사건은 사도행전 2장에 묘사되어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고, 부활한 뒤 사도들은 체포를 피해 다락방에 숨어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순절이 되었을 때,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내려왔고,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성령을 나타내는 단어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에서 모두 바람, 숨결 등과 관계를 가진다. 여기서 ‘바람’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의 바람을 의미할 것이다.

 성령강림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예수가 잡혀갈 때 겁을 먹고 도망가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갑자기 용기와 확신에 가득 차서 큰 길에 나가 예수의 부활을 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베드로와 사도들의 설교는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지방에서 모인 사람들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고, 즉시 세례를 받은 사람도 있었다. 이것은 초기교회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4.교회가 “거룩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도신경에는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말이 등장하지만, 역사적으로 교회는 그다지 거룩하지 않았던 것 같다. 거룩하다(holy)라는 것은 온전하다(wholly)는 말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경험으로 볼 때, 교회라는 공동체는 거의 언제나 분리되어 있었다. 또한 예수 집단 이래 ‘죄인들의 모임’은 교회의 별명이었다. 신학적인 교회론과 경험적인 교회의 현재 모습 사이의 간극을 채우는 방법에는 두 가지 접근법이 있다. 하나는 도나티스주의나 재세례파와 같은 분리주의이다. 도나티스주의는 로마제국의 박해 상황 속에서, 재세례파는 종교개혁 상황 속에서 타협을 거부하고 교회의 도덕적인 순수성을 지키려 하였다. 좀 더 일반적인 두 번째 방법은 종말론적인 인식이다. 이 입장에서는, 교회는 현재는 그 구성원들만큼이나 죄로 차 있으나, 마지막 날에는 온전해질 거라고 말한다.



5.“하늘의 시민”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은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한다. 하늘의 시민이 된다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며, 이것은 언제나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공생애와 함께 현재에 이미 왔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미래에 갈 곳으로 아직 오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 서신에 나타난 이런 양면성은 하나님의 나라 개념이 ‘미래가 되기 전까지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거나 ‘현재에 경험할 수 없는 것’이거나 ‘죽은 후에 가는 곳’으로 간단히 이해될 수 없게 한다. 즉,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왔으나, 아직 아닌’,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늘에 시민권을 가진 ‘하늘의 시민’이 된다는 말은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의 삶 속에서 사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하늘의 시민이 되는 것은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다. 영생은 개별적인 인간 존재가 영원히 이어진다는 식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하나님 안에서의 교통을 통해 이루어지는 영적인 연합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신약성서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잔치, 결혼식, 도시(새로운 예루살렘) 등으로 비유된다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대, 연합, 관계의 회복이다. 바울의 언급한 ‘시민권’은 이러한 공동체에의 참여를 나타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