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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잡담

네트워크를 활용한 저항적인 종교운동

학부 때 사회대 수업을 들으면서 쓴 글이었던 것 같습니다.

도저히 무슨 수업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네요...;

당시 이 글은 여기서 언급된 사이트들에 퍼날라져서

나름 자기성찰의 기회를 제공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글 중의 반기련은 사이트 도메인이 변경되었습니다. (여기)

세월이 흐르긴 흘렀나 보네요.


반기련의 버스광고 (뉴스앤조이)

도킨스는 이제 이분들의 아이콘이 되었네요.



네트워크를 활용한 저항적인 종교운동

-한국기독교의 사례를 중심으로-


종교학과 한승훈


들어가는 글


 저는 모태신앙인이었습니다. …(중략)…이런 집안의 영향 속에서 저는 나름대로 교회 열씨미 다녔습니다. 교회에서 봉사도 하고, 기도도 드리고, 예배 참석하고....하지만 하나님이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겨울, 성령대망회에서 방언 세례를 받고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조용기 목사와 어머니 때문에 신앙을 잃게 되었죠.

 어머니는 안 그래도 부족한 용돈 떼어서 십일조 하라고 닦달하고, 졸린데 억지로 새벽에 깨워서 새벽기도회에 데리고 가고, 아침마다 가정예배 드리는데 좀만이라도 늦게 오면 저희 자매(제가 장녀예요)를 구타하고, 기도 안한다, 성경 안 읽는다, 온갖 스트레스를 다 주며 저희 자매에게 온갖 욕을 퍼부었습니다.

 저는 괴로웠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당연히 정의를 위해 계시는 하나님이라면 왜 저런 엄마의 만행을 가만두지 않고 계시는 걸까?

(“반기련-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의 “나의 경험담” 게시판에 올라온 한 네티즌의 글)


 위와 같은 사례는 결코 일부 광신적인 신앙인의 극단적인 행태만은 아니다. 최근의 한 통계에 따르면1) 종교인 가운데 종교 전환을 경험한 사람(이하 ‘종교 전환자’)이 12%인데, 그 가운데 87%가 개신교2)인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는 첫째가 ‘교리 때문에’(27.6%)였고, 둘째가 ‘주위의 권유 때문에’(21.1%)였으며, 셋째로 ‘신도들의 행태 때문에’(10.5%)가 지적되었다. 그리고 과거에 일정 기간 이상의 종교 생활을 하였으나 현재 종교를 가지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하 ‘종교 이탈자’) 가운데에서는, 응답자의 68%가 과거 개신교인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과거의 종교에서 떠나게 된 이유로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30.4%)와 ‘신도들의 행태 때문에’(17.4%)를 가장 큰 것으로 꼽았다.3)

 그런데 기독교의 경우, 종교 이탈의 이유로 지적된 이와 같은 답변들이 서로 깊은 연관을 가진다는 특성이 있다. ‘하나님을 확신’하는 독실한 신도인 위의 사례의 주인공에게 고통을 주는 이는 주로 어머니이다. 종교 이탈자와 전환자 모두가 ‘신도들의 행태 때문에’라는 답변을 많이 하였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녀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은 십일조, 새벽기도회, 가정예배에서의 시간 엄수, 기도, 성경읽기 등으로, 이것은 모두 교리적인 차원의 것이다. 또한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라는 답변은 유독 개신교 이탈자에게서 압도적인 비율로 나왔는데, 이것 역시 일주일에 한 번 예배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의무로 보는 개신교의 교리적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개신교인 가운데 종교 전환자나 이탈자가 많은 것은 결국 넓은 의미에서의 교리적인 문제 때문인가? 그렇게만 보기는 어렵다. 보수적인 한국 개신교의 특성상 신도들이 교리에서 느끼는 억압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유사성이 많은 카톨릭의 경우 종교 전환률과 이탈률이 대상 종교(개신교, 불교, 카톨릭) 가운데 가장 낮았다. 그렇다면 많은 개신교인들이 종교를 떠나거나 바꾸어야 할 만큼 고통을 받고 억압을 느끼는 요인은 다른 곳에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같은 통계에 의하면 유독 개신교에서만 ‘신도들의 행태 때문에’라는 답변이 집중적으로 지적되고 있고, ‘지나친 기부 강요 때문에’(5.3%)는 유독 개신교인들만 답변한 항목이다.4) 결국 이들이 억압을 느끼는 요인은 교리 자체라기보다는 그것을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주변 신도들과 교회 시스템인 것이다.

 종교적인 억압은 개인의 안팎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 여타의 사회조직과 마찬가지로 종교조직의 유지를 위해서는 동기화, 신도 충원, 훈련, 입장 표명과 같은 여러 기능적인 장치가 필요하다5). 이러한 시스템을 이용해서 종교조직은 신도들을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고, 그 목표를 확인 및 통합시키면서 이탈을 막는다. 그런데 종교조직의 경우는 조직 유지를 위한 기능적 장치들이 다른 조직보다 강하게 작용해도 비교적 반발을 겪지 않는다. 그것은 개개의 신자들이 종교적 신념을 통해 강력하게 동기화되어 있고, 정기적인 의례 등 외적인 통합 기능이 매우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문제로 억압을 느끼는 것은 안으로는 개인의 종교적 신념을 통한 내적 감시 때문이고, 밖으로는 종교조직 자체의 통합 기능을 통한 외적 통제 때문이다.

 정보 사회가 도래함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권력이 발생하고 감시가 강화될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집중화된 권력이 분산되고 시민사회가 형성될 것이라는 주장 역시 있다. 그런데 나는 종교조직의 경우에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예측이 더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권력은 정보의 독점에서 발생한다. 이 정보에는 경전 및 교리, 의례에 대한 지식 등이 포함되고, 종교의 경우 독특하게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정보(한 예로 무당의 ‘공수’는 결코 교리에 대한 지식이 아니다)도 포함된다. 그런데 정보기술은 이러한 정보의 독점을 깨트리는 역할을 하므로 전반적으로 종교 권력을 약화시킨다.

 이 글에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기성종교에 저항하는 사례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정보 사회의 도래가 기성종교의 권력을 약화시킴으로서 종교 개혁에 기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한국 기독교의 부정적 특성


 한국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구한 말 서구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된 이후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2003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현재 대한민국의 15세 이상 인구 가운데 종교 인구는 53.6% 가량이며, 개신교인은 이 가운데 36.8%이다. 특히 서울, 경기, 인천, 광주, 대전 등의 대도시 지역과 전북지역에서는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 수의 사람들이 개신교인으로 집계되고 있다. 개신교는 적극적인 선교 활동과 현대 산업 사회의 노동 사이클과 잘 일치되는 주기의 집회, 세계 종교로서의 권위 등 여러 요인 때문에 20세기 한국에서 가장 크게 성장한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개신교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반감을 많이 사고 있는 종교이기도 하다.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의 개신교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행태는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사고 있으며, 기독교인 스스로도 그러한 모습에 실망하고 있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종교를 떠나고 있으며,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많은 책이 출판되고 있다. 또한 서문에 인용되었던 종교의식조사에서 포교활동에 대한 호감도를 보면 불교 포교활동에 대한 호감도가 37.1%, 카톨릭 포교활동에 대해서는 29.4%인데, 가장 활발한 개신교 포교활동에 대한 호감도는 5.1%에 그치고 있다. 이것은 여호와의 증인 등 신종교를 제외한다면 가장 낮은 수치이다.

 한국 기독교에 대한 이와 같은 반감은 무엇 때문일까. 그 원인은 한국 기독교의 독특한 특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기독교의 주류를 차지하는 장로교, 침례회 등은 미국의 북장로회, 남침례회에 연원을 두고 있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적 입장에 서 있는 교단들이다. 이들은 타종교에 대한 배타주의, 성경 해석에 있어서는 축자영감설과 무오설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특히 신학적으로는 19세기 말 이후 발달한 모든 고등비평(역사학, 문헌학, 고고학, 사회학적 방법)의 방법을 일체 거부하고 기존의 정통 교리를 절대적으로 수호하고자 하는 입장에 서 있다. 한국 기독교의 경우는 이러한 근본주의 교파가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으면서 미디어와 교육기관을 독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타종교나 전통문화에 대한 관점이 매우 배타적일 수밖에 없으며, 자신들과 다른 신학적 조류에 대해서는 비정통적이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경향을 가지므로 내부 비판이 자라기 어렵다.

 한국에서 근본주의가 이처럼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유럽에서는 영국의 성공회나 독일의 루터파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 개신교 자체의 힘이 매우 약해져 있으며, 미국의 근본주의는 남부의 보수적인 지역들과 이들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는 네오콘주의자의 종교라는 인상이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는 미국의 바로 이러한 교파의 선교사들에 의해 개신교가 전해졌다. 그리고 엄격한 검열과정을 통해 새로운 사상이 들어오는 것을 엄격하게 통제해 왔다.6) 세계적인 스펙트럼에서는 가장 오른쪽에 있는 매우 이례적인 종교 사상이 마치 주류 기독교의 사상처럼 변화된 것이다.

 또 다른 특성으로 반공주의를 들 수가 있다. 초기 한국 기독교의 폭발적인 성장은 서북지역에서 일어났다. 이 지역은 북장로회의 선교 지역이었는데, 인구가 많았고, 전통종교가 약했으며, 특히 유교적 세계관이 강했던 기호 지방과 영남 지방과는 단절된 곳이라 유교 전통에 공백이 있었다. 이런 기반 때문에, 전통적인 가치관이 약해지고 일제의 억압이 강해지는 상황 속에서 서북지역의 많은 민중들이 교회로 모여들었다. 이 시기의 기독교는 전반적으로 민족주의 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 등에 적대적이기보다는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정치적으로 특정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던 것이 한국전쟁 이후, 북한 정부의 탄압을 피해 남하한 서북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전후에까지도 한국 교회의 주류가 된 것이다. 이들은 북한에 대한 반감과 공포가 매우 강했고, 이러한 감정을 이용한 정부의 반공정책에 쉽게 동조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부의 반공정책에 동조하고 참여한 한국 교회의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체제 유지를 바라는 보수적인 성격으로 남아 있다. 한국 기독교는 대체적으로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있어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 서는 일이 많고, 거의 모든 형태의 진보적인 운동에 대해 적대적이다. 또한 미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학적인 근본주의는 정치적인 극우주의와 친화력을 가졌다. 그래서 커다란 성조기를 앞세운 극우적인 성향을 가진 집회가 대형 교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오늘날 쉽게 눈에 띄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이 권위주의와 가부장주의이다. 기독교의 전래는 평등의식에 어느 정도 기여한 면이 있지만, 전통 사회의 권위주의와 가부장주의에 대해서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한 면이 강하다. 특히 근본주의적인 교리와 맞물리면서 목사 등 종교지도자에 대한 권위가 강화되었으며, 집사, 권사, 장로와 같은 직분(duty)이 일종의 지위(rank) 개념으로 변형되어 수용되었다. 기독교의 가부장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여성목사 안수에 대한 태도이다. 얼마 전 교단 총회장급 목사의 ‘기저귀 발언’은 한국 기독교의 주류에 속한 종교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7) 또한 실제 교회 생활에 있어서도 식사 봉사와 같은 주변적인 돌보기 노동에 여성들이 주로 참여하는 반면, 예배와 관련된 ‘종교적’ 활동에서는 여성이 소외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한국 기독교의 이와 같은 부정적인 특성들은 한국 사회 일반의 문제들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결국 교회는 사회의 축소판인 것이다. 문제는 사회 일반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역동적인 변화들이 교회 내부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이전 시대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이상 사회에서는 절대적인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데올로기들이 교회 내에서는 종교적인 권위와 결합이 되면서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의 통합․감시 구조


 한국 기독교의 이데올로기들은 이와 같이 사회 일반의 상식으로 보면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거나 지나치게 보수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거기에 대해 반기를 들거나 기독교를 떠나는 대신에, 침묵하거나 그러한 주장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사회 조직은 그 조직이 사회 일반과 이질적일수록 더 유지하기가 힘들고 더욱 강력한 통합․감시 기제를 요구한다. 그런데 종교 조직은 구성원들이 종교적 신념으로 매우 강하게 동기화(motivation)되어 있기 때문에 비교적 작은 노력으로도 이러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한 통합․감시 구조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작용한다. 하나는 외적인 통제로 조직 자체의 구조를 통해 이탈과 저항을 막는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적인 감시로 개별 신자의 종교적 신념 자체를 통해 스스로를 통제하게 한다.



 1)외적인 통제


 외적인 통제가 가능한 것은 우선 교회의 행정과 의례 및 발언이 독점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목회자들과 장로들을 주축으로 한 ‘당회’가 최고 의결기관으로 되어 있어, 평신도들이 교회 행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적다. 또한 재정이 매우 불투명한 것이 특징으로, 많은 신도들에게 ‘지나친 기부 강요’에 대한 거부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기부된 돈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또한 종교적인 의례와 발언(기독교에서는 예배의 중심이 설교이므로 이 두 가지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이 목회자에게 독점되어 있다는 것 역시 중요한 요인이다. 예배단상에서 이루어지는 목사의 발언은 종교적인 권위를 가지게 되며, 매우 일방적인 주입이나 설득이 되기 쉽다. 또한 일부 권위적인 목회자들은 ‘주의 종’인 자신에 대한 권위를 주장하는데, 이것은 동어반복적인 논리에 의해 정당화된다. 즉 발언의 권위로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교리 및 경전의 해석이 독점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개신교의 근본정신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다른 사상에 대해 적대적인 근본주의 신학의 특성 상 신학적 훈련을 받지 않은 평신도의 경전이나 교리 해석은 부적절한 것으로, 심지어는 불경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므로 신도들의 비판은 교회 행정상의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만 가능할 뿐(이 역시 무척 제한적으로 접할 수 있는 정보만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종교적인 차원에 대한 발언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이러한 체제에 대한 저항이 불가능한 데에는 조금 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교회의 권위는 고도로 조직화되어 있으며, 저항적인 신도들은 조직화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교회는 교단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조직은 수직적으로 구성되어 있어 비판적인 목회자가 배제되기 쉽게 되어 있다. 또한 체제 순응적인 목회자들은 대형 조직과 미디어를 중심으로 정치적, 사회적인 발언을 하기가 매우 쉬우며, 권위를 가진다. 반면 개교회주의가 강한 한국 기독교의 상황에서 신도들이 이처럼 조직화되기는 힘들다. 개교회주의란 교단에 관계없이 개개의 교회 살림은 개별적인 당회의 관리 하에 움직이는 것으로 권한이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한 당회에 집중되어 있다. 한편 교단 내의 신도 조직은 형식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교단에 종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즉, 목회자는 교단이 있는데 신도들에게는 사실상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할 만한 교단이 없는 상황인 것이다.



2)내적인 감시


 종교조직의 특징은 종교적 신념에 의한 강한 동기화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통제가 강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다룬 외적인 요인과도 연결이 되는데, 스스로에 대한 내적 감시를 구성하는 종교적 신념의 형성이 일원적으로 독점되고 있다는 데 문제의 근원이 있다. 근본주의적인 입장 이외의 교리 교육은 엄격하게 금지되며, 무엇보다 그것을 할 만한 사람이 지도적인 위치에 오르기가 힘들다. 이러한 편향된 입장의 교리 교육은 신도 스스로의 신앙  생활에 대한 기준을 근본주의적으로 설정하게 만들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행위(예배에 참여하지 않거나, 목회자에 대해 비판하는 것, 혼전 순결을 지키지 않는 것 등)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다. 결국 누군가 강요하는 것이 아닌데도 스스로를 훌륭한 신앙인으로 이미지화하기 위해서 엄격한 근본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입장이 절대적인 것이 되어서 스스로와 타인에게 강요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서두에 소개한 사례에 등장한 어머니가 좋은 예인데, 이들은 가족과 주변 사람에게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기 위해서 폭력적인 수단을 마다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강력한 작용을 하는 것이 ‘지옥’에 대한 신앙이다. 지옥에 대한 교리는 많은 종교에서 내적인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기제이다. 사후 세계에 대한 한 완벽하게 독점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종교에서 지옥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진다.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는 것은 ‘그들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정당화되고, 교리에 어긋나는 행위는 ‘내가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사후에 있을 형벌에 대한 공포가 크기 때문에 수단으로서의 폭력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8)

 이러한 내적인 감시 체제를 유지하는 데에는 기도회의 역할이 크다. 한국 개신교에서 매우 중요하는 집단적인 통성기도(크게 목소리를 내어 하는)는 교리에 대한 확신을 강화하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가장 내밀한 고백인 기도를 공공의 영역으로 내어 놓는 역할을 한다. 목소리를 통해 하는 기도는 형식화되어 있고, 교리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참여자 사이의 동질성을 유도해 낸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신도들 사이의 내적인 통합을 이루어내고, 이차적으로 거기에 맞지 않는 일탈적인 신념을 스스로 통제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네트워크를 활용한 저항적 종교운동의 사례


 위와 같은 내적, 외적인 구조들을 통해 종교 조직은 유지될 수 있지만, 교회는 역시 사회의 축소판이다. 외부 사회와 단절된 수도원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사회의 변화는 기독교 내부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목회자의 보수적인 정치관에 동의하지 않는 신도들도 많으며, 한기총과 같은 교단조직들이 반동적인 정치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는 기성 기독교에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많은 이탈자를 만들어내고 있고, 실제로 잠재적인 이탈자는 더욱 많은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정보 사회의 도래와 네트워크 기술의 발달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내고 있다. 네트워크를 이용한 권력의 분산과 시민세력의 등장은 사회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종교는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층위로 주목되었으며 특히 기독교의 문제가 부각되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여러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거대 교단들이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 서면서 본격적으로 문제시되게 되었다. 왜냐하면 80년대에는 기독교인들 가운데에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개인이나 세력이 많이 있었고, 정치적 참여를 경계하고 있던 교단 차원에서 여기에 대한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트워크를 통한 집단행동과 시민사회의 형성 등이 가시화되고, 개혁적 내지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많아지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거대한 보수정치세력이 된 교단과 변화하고 있는 사회 사이에서, 기독교인들은 종교적 신앙과 사회적 신념 사이의 괴리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또한 개교회로 나뉘어 있어서 개별적인 불만을 하나의 통합된 조직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던 저항적인 신도 집단이 연결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또한 기독교 외부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가진 많은 이들이 네트워크의 광장에서 발언하기 시작했다. 소위 ‘안티 기독교’ 집단이 생기게 되면서 기성 기독교인들은 커다란 충격에 빠져들었다. 절대적인 신념으로 믿고 있었던 자신들의 종교가 사실은 많은 신념들 가운데 하나이고, 또 많은 이들에게 반감을 일으키는 신념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은 크게 두 가지 반응을 일으켰다. 하나는 기존 신념 체계에 대한 절대적인 수호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신념 체계에 대한 회의이다. 후자 가운데에는 새롭게 ‘안티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성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이들은 개교회의 체제를 넘어서 개인과 개인 사이, 교회와 교회 사이, 기독교 내부와 외부 사이를 연결하며 생각을 나누고, 그 연결 상태에 따라 여러 가지 실천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러한 커뮤니티의 유형을 세 가지로 본다. 하나는 신종교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안티기독교 운동이며, 마지막으로는 온라인 종교개혁운동이 있다.



1)신종교운동


 신종교운동이란 주로 기성 종교가 통합성을 잃을 때 발생하는 새로운 종교 운동을 뜻한다. 이들은 기존의 종교 전통을 모방, 혼합하며 기성종교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특성이 있다. 특히 한국종교에서 신종교운동이라고 하면 주로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발생했던 동학, 증산도, 원불교, 대종교 등 민족종교 계열의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현재 발생하고 있는 신종교 가운데에서도 이러한 근대 민족종교들의 계승을 표방하는 종교가 많이 있다. 또한 통일교와 같은 기독교계 신종교가 존재해 세력을 키우고 있고, 창가 학회 등 일본의 불교 및 신도 계열 신종교가 유입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반발로 발생하였으며,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신종교운동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지하철 광고판에 명함처럼 꽂혀 있는 신종교 광고나 거리에서 포교를 하는 사람들의 수를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다만 일본계 신종교인 천리교의 한국 웹사이트(http://www.tenrio.com)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라엘리안 무브먼트의 웹사이트(http://www.rael.org/)를 찾아볼 수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신도 계열의 신종교로 창조주, 원죄, 계시 등 기독교 계열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종교의 몇 가지 내용들을 온라인에 올려놓았을 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지는 않으며 방문자도 적다.

 주목할 만한 라엘리안 무브먼트는 외계인을 신봉하는 국제적인 신종교로 주로 온라인을 통해서 신도를 모으고, 교리를 전파하고 있다. 이들은 다국어 지원이 가능한 홈페이지와 웹진을 이용하는 등 적극적으로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있다. 입교 역시 온라인으로 신청하고, 전화로 확인을 하는 등 현대적인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 역시 외계인을 기독교적 개념인 엘로힘(히브리어로 ‘하나님’, ‘신들’)이라고 표현하고 성경의 내용을 외계인의 개입으로 재해석하는 등 기독교적인 모티브를 사용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현대 과학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비과학적’인 기성종교에 실망한 사람들을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신종교 운동이 한국에서 기성종교에 대한 의미 있는 저항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기독교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온라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일부 이탈자를 흡수할 수는 있겠지만, 신종교에 대한 인식이 나쁜 한국 사회에서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성종교, 특히 근본주의적인 기독교에서는 신종교, 특히 기독교적인 신종교에 대한 악마화를 꾸준히 진행해 왔기 때문에 거기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이들 종교를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신종교운동은 기독교 외부만의 연결이다. 이것은 기독교와는 별개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을 뿐 기독교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지는 않다.



2)안티기독교 운동

 안티기독교 운동은 현재로서는 가장 규모가 있고 폭넓은 공감을 얻어내고 있는 온라인 종교운동이다. 이 운동은 PC통신 시절에 조직화되기 시작해서,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커뮤니티 기능을 통해 성장하였고, 현재는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http://www.anti-christ.or.kr)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단체로서의 활동을 모색하고 있다. 이곳의 논자들에 의한 출판물이 나오고 있으며 여러 포털사이트의 안티기독교 카페들을 연결하는 등, 네트워크로서의 기능도 효과적으로 하고 있다.

 이들의 구성은 다양하다. 정확하게 집계된 바는 없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를 볼 때에 기독교에 반감을 가진 비종교인이 대부분이고, 과거 기독교인이었다가 실망하여 이탈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심지어 신앙생활에 지나치게 열심인 나머지 자신에게 무관심한 이성 친구 때문에 생긴 고민을 호소하며 가입한 이들도 있다. 또한 흥미롭게도 민족종교나 자연과학에 관심이 있는 성원이 많이 보이는데, 이것은 신종교에서 많이 보이는 사례이다. 근본주의적 기독교를 외래 종교이자 반과학적, 비합리적 종교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서 단군신앙 등 민족종교나 자연과학을 통해 이를 비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기독교인들에 의한 ‘단군상 훼손 사건’이나 ‘진화론 논쟁’ 등과 같은 이슈에 대한 반응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에 대한 이들의 비판 수위는 매우 다양한데, 어떤 이들은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한 욕설이나 현상적인 신도들의 행태에 대한 비판에 그치고 있는가 하면, 기독교 이탈자인 몇몇 사람들은 현상적인 기독교의 폐해가 성경에 이미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성경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비판을 하고 있다. 그들의 성경 해석은 근본주의적인 해석과 거의 일치하지만 여기에 동의하지 않고 그것을 거부한다. 또한 여러 성원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반기독교 선언’과 같은 글은 이들의 주장을 잘 드러내 주고 있으나, 그 내용을 깊이 살펴보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 같다.

 네트워크의 측면에서 봤을 때, 안티기독교운동은 신종교운동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외부만을 연결하고 있다.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의 ‘반기독교 선언’을 보면 이들은 근본주의적인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진보적인 기독교인들까지도 비판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진보 기독교인이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인보다 더 독단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타종교에 대한 배타 행위를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 운운하는 것은, 상대방이 동의하지도 않은 것을 독단적으로 가정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반기독교 선언’ 중에서)


 이와 같은 점에서 볼 때 안티기독교 운동의 영향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기독교가 없는 세상’을 이상적인 세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적이든 진보적이든 기독교인들과 연대할 생각은 없다. 기독교인들 역시 이들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며 이들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비판적인 댓글을 달기도 한다. 또한 오프라인에서의 실천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데에서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안티 기독교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성향이 매우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 활동의 주된 내용은 개천절, 한글날 행사와 같이 민족주의적인 색채의 모임이다. 결국 민족주의․합리주의로 기독교를 대체하고자 하는 일종의 신종교적 특성을 가지게 된 셈이다. 여기에는 앞서 제시한 신종교운동의 한계와 동일한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3)온라인 종교개혁운동


 2004년 종립 학교의 종교 자유문제로 일어난 ‘강의석 사건’은 사회 전반에 다양한 파장을 남겼다. 그 가운데 의미 있는 것은 양심적인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의 권위주의와 배타주의에 대한 자성의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특히 강의석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가 학교에서 문제교사로 지목받아 해직당하고, 결국 목사 직위도 반납한 당시의 교목 류상태 목사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폭넓게 일어났다. 그래서 그의 개인 카페였던 ‘불거토피아’(http://cafe.daum.net/bgtopia)에 기독교의 폐해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매우 보수적인 기독교인들부터 안티 기독교인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왔고, 안티기독교 사이트와는 다른 형태의 논의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한편 이보다 이른 시기에 발생한 ‘숭사리 개혁포럼’(http://cafe.daum.net/soongsari)의 사례도 있다. 숭사리는 "숭의(높은 뜻, 하나님의 뜻)를 사랑하는 이웃들"의 준말로 기독교 내부에서 만들어진 네트워크이다. 정회원제이기 때문에 안티기독교인의 접근은 차단되어 있다. 이곳은 기독교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곳의 ‘신앙고백 16조’ 역시 성경의 무오성과 천국지옥설 등 보수적인 기독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이런 기본적이고 ‘성경적인’ 기준으로 보아도 한국 기독교는 심각하게 타락해 있으며 개혁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활동은 주로 교회 헌법 제정과 목회자에 대한 감시, 십일조 문제, 평신도 목회 등 교회 개혁 현안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기성종교에 대한 저항적인 네트워크가 그 종교 내부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거토피아의 경우, 기독교 외부와도 연결되어 있어서 안티 기독교 게시판마저 있다. 이러한 네트워크를 신종교운동이나 안티기독교운동과는 구분 짓는 차원에서 ‘온라인 종교개혁운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본문의 첫 부분에서 제시한 한국 기독교의 폐해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공감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을 주목할 만한 것은 이와 같은 형태가 본문 두 번째에서 제시한 교회의 통합․감시 구조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이기 때문이다.

 우선 네트워크적 측면에서 온라인 종교개혁운동은 기성 교회의 외적 통제 구조를 넘어설 수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저항적인 신도가 쉽게 결집하거나 의견을 나눌 수 없는 것은 이들이 개교회에 갇혀 있고 교단은 고도로 관료조직화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네트워크는 개별 교회의 저항적인 신도를 서로 연결해 준다. 그리고 종교조직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시킴으로서 기독교 외부의 세력과도 연계가 가능하다. 전자의 이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 숭사리 개혁포럼의 사례이고 후자의 이점을 살리고 있는 것이 불거토피아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형태의 네트워크는 사상적 측면에서도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목회자가 신학 해석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 사이의 토론이 행해짐으로써 제도적 신학을 넘어서는 ‘평신도 신학’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성경에 없는’ 교리(일요일에 교회에 반드시 나가야 한다, 십일조는 기독교인의 의무다, 설교나 축도는 목사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성전이다……)들을 거부하고 주체적으로 경전을 읽는 시도를 하고 있다. 또한 극우적인 정치 세력이 된 거대 교단들에 반대하고 평화운동, 생태운동 등 적극적인 사회참여에 나서고자 하는 움직임도 보인다. 또한 이웃종교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고, 타종교에 대한 다원주의적 관점에 대한 토론도 활발하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이런 변화에 대한 모색이 다름 아닌 기독교인들 스스로가 주축이 되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보 기술을 통한 종교 개혁


 위 세 유형의 사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네트워크를 활용해 기성종교에 대해 저항하고 있다. 세 가지 유형의 운동은 주된 구성원, 목표, 네트워크 연결 상태, 기성종교(이 경우 기독교)에 대한 태도에서 차이가 난다.


 

주된 구성원

운동의 목표

네트워크

연결 상태

기성종교에

 대한 태도

신종교 운동

이탈 기독교인 포함한 신종교인

자종교의 

전파 및 확장

기독교 외부만의

네트워크

다양

안티기독교 운동

이탈 기독교인

포함한 비기독교인

기독교 비판과

기독교인 각성 유도

기독교 외부만의

네트워크

적대적

온라인 종교개혁운동

비기독교인 포함한 개혁적 기독교인

기독교 내부 개혁

기독교 안팎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비판적

<저항적 종교운동 특징 비교>


 이와 같은 사례에서 볼 때, 세 유형의 운동은 그 영향력의 차이는 있으나 공통적으로 기성 기독교와 그 이데올로기를 약화시키고 있다. 신종교의 경우는 이탈한 기독교인9)의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고, 안티기독교 운동은 기독교를 정면에서 비판하고 있으며, 온라인 종교개혁운동은 평신도들이 기성 기독교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종교적 차원에서 네트워크는 ‘역(逆) 파놉티콘’10)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교회 내부에서는 신도 개개인이 안팎에서의 통제와 감시에 놓이게 되지만, 모든 정보가 공개되고 유동하는 네트워크상에서는 오히려 권위적인 종교조직과 목회자가 감시에 노출된다.

 앞에서 사회일반과 이질적이며 때로 모순적인 교회조직이 어떻게 유지되는가를 내적, 외적인 통합․감시구조라는 관점에서 고찰한 바 있다.11) 신종교 운동과 안티기독교 운동은 일단 외적인 통제에서 완전히 이탈한 상태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내적인 감시는 개개인의 마음  속에 구조화되어 남는다. 그래서 라엘리안 무브먼트의 예와 같이 기독교적인 용어를 자신의 논리로 재해석하는 신종교가 기독교 사회에서 특히 인기를 끌 수 있는 것이다. 천리교의 사례 역시 기독교과 무관한 신종교임에도 창조주, 원죄, 계시 등 기독교적 개념을 끌어 쓰고 있다. 이것은 이미 기독교를 내적으로 체화한 이탈자들에게 이들 신종교가 상대적으로 친근하게 다가오게 한다.

 안티기독교 운동에도 체화된 내적 감시의 흔적이 보인다. 상당수의 기독교 이탈자를 포함하는 이 집단 중 일부는 진보적인 기독교에 대해서도 비판하거나, 근본주의 신앙을 민족주의나 합리주의로 대체하여 여타의 사상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것은 사실 근본주의 기독교의 타종교에 대한 태도와 상통하는 것이다. 이들이 진보적인 기독교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운운하는” 내용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인데, 그 내용에 동의하지 않으며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근본주의의 전형적인 태도이다. 진보적인 기독교 해석에 동의하는 것은 보수적인 교회에서 ‘이단’이나 ‘자유주의자’로 낙인찍힐 수 있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안티기독교 사이트에서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인보다 더 악질’로 인식되며 악플 세례를 받는다. 이러한 상호 감시와 내적인 통제는 그 대상과 형태만 바꾼 채 그대로 존속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온라인 종교개혁운동이다. 이 유형의 운동은 각성한 기독교인들 사이를 연결함으로써 신앙생활에서 느끼는 모순과 억압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거기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개교회 단위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다양한 시도들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은 더 이상 억압적인 기성 종교 체제에 불만을 가진 신도가 마냥 인내하거나 그 종교를 이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외적인 통제가 매우 능동적으로 극복된다. 기성교회에서 저항적 신도 집단의 영향력이 약했던 것은 보수적인 목회자 사이는 교단을 통해 네트워크화 되어 있으나, 신도들은 개교회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도들 사이의 네트워크가 구축된 상태에서는 오히려 신도들의 네트워크가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교단은 권위적인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므로 일방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측면이 있어 완전한 네트워크로 보기 힘든 반면, 신도들의 네트워크는 그 이점을 충분히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교회 재정 공개와 평신도 설교권 등이 이루어진다면 교회의 외적인 통제는 매우 약해질 것으로 보인다.

 내적인 감시의 경우는 종교 이탈자들마저 벗어나기 힘들만큼 강력하다. 외적 통제에 대해서는 매우 급진적인 ‘숭사리 개혁포럼’의 사례에서마저도 이들은 성경무오설, 천국지옥설 등의 근본주의적 교리의 언어들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그것은 이들을 버릴 경우에 다가올 내적인 강박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기도회와 같은 강력한 통합기제는 그들이 온라인상에서의 활동과 실제 신앙생활 사이의 괴리를 느끼게 할 것으로 예상된다. 온라인 종교개혁운동의 성패는 이 내적 감시 체계를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달렸다. 타종교와의 접촉, 사회운동과의 연계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서 이러한 감시를 약화시키겠지만, 내적 감시는 단기간의 이론적 성찰만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가는 글


 정보 사회의 도래는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방식에 따라서는 기존 종교를 전면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왜곡된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여기서는 특히 한국 기독교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한국 기독교는 그 특수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 때문에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근본주의적 교리가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권위적인 반공주의, 극우주의, 가부장주의 등을 고수하게 되었다. 이들은 사회 일반과의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동기화되어 있으며 내적, 외적으로 통제가 가능한 종교조직의 특성 때문에 그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 내에서 신도 개개인은 억압을 느끼며, 이탈자 역시 많다.

 정보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이러한 상황은 변화하고 있다. 신종교운동, 안티기독교운동, 온라인 종교개혁운동과 같은 저항적인 커뮤니티가 등장하였고, 이들은 이탈자를 흡수하거나, 기독교 자체를 개혁하는 방법으로 억압적인 종교권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그 방법은 다양한데, 기독교 외부를 연결하는 신종교운동과 안티기독교운동은 외적인 통제에서는 자유로우나 내적인 감시 구조는 체화된 형태로 남아 있으며, 온라인 종교개혁운동은 기독교 내에서 외적인 통제 자체를 공격하며, 기독교 외부와의 접점들을 통해 내적 감시를 점차 약화시키고자 한다.

 이와 같은 다양한 운동의 공통적인 목적이 기성종교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그를 통해 개개인을 억압하는 종교제도를 개혁하는 것이라면 현재까지 그 시도는 일단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네트워크가 다양한 방법으로 종교제도의 외적인 통제를 공격하거나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에 비해, 내적인 감시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적인 영향력을 주고 있지 못하다는 한계 역시 발견된다. 따라서 네트워크를 통한 종교운동이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온라인 커뮤니티 구축과 같은 네트워크 기술을 통한 외적 통제의 약화만이 아니라, 타종교나 여타 사회운동과의 대화와 같은 네트워크적 실천을 통한 내적 감시의 약화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참고자료>

 Parsons, T., "Religion and Problem of Meaning", 『Sociology of Religion』, Hammondsworth, England: Penguine, 1969, pp.55-60

 동서리서치, 『한국인의 종교의식 조사보고서』, 불교신문, 2005년 5월 4일

 박승길, “한국 속의 일본 신종교”, 『종교신학연구』vol.9,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1996, pp.251-288

 주재일,「예장합동 총회장 여성비하 발언 파문-임태득 목사 총신대 설교, "여자가 기저귀 차고 강단에?"」, 뉴스앤조이, 2003년 11월 18일

 홍성욱, 『파놉티콘-정보 사회의 감옥』, 책세상,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