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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잡담

김수로왕의 저주- 수릉왕묘의 의례론

1. 수로왕묘와 수릉왕묘


가야(가락국)의 수로왕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정확히는 수로왕의 무덤에 대한 얘기입니다.


수로왕에 대해서는 부족장들이 “구지가”를 불러서 왕을 요구했다는

유명한 신화가 있지요.

부족국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왕을 요구했고,

이로 인해 “신성”과의 갈등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저는 이걸 히브리성서의

사무엘기와 비교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림”이 아니라 “무덤”을 먼저 이야기하는 건,

그런 신성한 왕의 죽음 이후 그가 묻힌 땅이 의례적으로는 어떻게 다뤄지는가를

먼저 살펴보고 싶어서이지요.


수로왕은 199년 3월 23일에 158세로 죽었습니다. 오래도 살았네요.


나라 사람들이 부모가 죽은 것처럼 슬퍼하며 대궐 동북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웠습니다.

높이는 한 발, 둘레는 300보, 이름은 수릉왕묘였습니다.

이 묘에는 수로왕의 아들 거등왕부터 9대손 구형까지 배향되었습니다.

매년 맹춘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 제를 올렸고요.


수릉왕묘는 지금 김해에 있는 수로왕묘와는 많이 달랐을 겁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혼란기동안 수릉왕묘는 완전히 박살나고 도굴당하고 하는 바람에

겨우 위치만 파악될 정도였는데요.

세종 21년의 기록을 보니까 심지어 논에 잠겨 있었다는군요..;;

이때 묘가 지금 자리에 복원이 되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국가에서 의례를 올리는

대상은 아니었다는군요. 영조 때에 이걸 국가제사로 올리자는 말이 나왔지만,

왕이 고려나 신라 왕가에 대한 제사도 제대로 못 하면서 신라 속국에 무슨

예를 올리느냐는 식으로 쫑크를 줘서 조금 정비하고 왕명으로 치제를 해 주는

정도로 끝났습니다.

손자 정조 대에 와서는 벌초도 해 주고, 축문도 직접 지어내려주고, 향도 보내주고 해서

거하게 모셔줬다고 합니다. 물론 정조는 단군부터 고려까지 역대왕조왕가를 화끈하게

모셔주었죠. 수로왕만이 아니라.


지금의 수로왕릉 모습입니다. 문신상, 무신상 모셔놓고 신도비 세워놓고

조선왕릉 모습처럼 꾸며놓았네요. 원래 건 “신궁”같은 사당건물도 있었다는 것 같네요.




2. 문무왕, 수릉왕묘 의례로 가야를 달래다


수로왕을 어디까지나 “옛날 시조왕” 중 하나(그것도 좀 마이너한)로 취급했던

조선 왕들이랑 달리, 신라는 이 묘를 좀 더 신경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야에 속했던 지역 사람들은 어느 정도 분리된 정체성도 가지고 있었고,

수로왕의 신성한 힘에 대한 신앙도 남아있었거든요.


더구나 가야쪽 핏줄이었던 문무왕은 즉위하자마자(661) 자기가 수로왕의 후손이라 하면서

수릉왕묘를 아예 종묘에 합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뒷 맥락으로 봐서 묘 자체를 물리적으로 옮겼다기보다는,

의례체계를 종묘랑 통합했다는 걸로 보이네요.


제전의 관리와 제사는 수로왕의 17대손인 급간 갱세가 맡았습니다.

제삿날도 수로왕의 아들 거등왕이 정한 날짜들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신라왕가랑 가야왕가가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데올로기는 주장했지만,

의례만은 그쪽 직계후손이 주체가 되게 해서 자치를 보장해 준 거네요.




3. 음란한 제사가 부른 재앙


그러다 준전국시대였던 신라 말년에 아간 영규가 여기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종묘급의 사당이었으니까, 여기에다 제사를 지낸다면 왕이랑 동급이란 소리지요.

이놈이고 저놈이고 지역의 왕을 칭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사람은 수로왕의 후손이 아니니까, 이건 “음사陰祀”입니다.

“음사陰祀”란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체제에서 인정하지 않는

더러운 제사라는 거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제사를 지낼 대상이 아닌데 의례를

행하는 겁니다. 후자 쪽이 오래된 개념이고, 전자는 유교 이외의 종교의례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생긴 이후에 생긴 개념입니다.


영규의 “음사”란 후자의 의미였습니다. 이 사람은 수로왕의 후손이 아니었거든요.

음사의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단오날(날짜는 지켰습니다) 제사를 지내다가 사당

대들보에 깔려 죽었거든요.



난세다보니 금관성(김해)의 주인도 자주 바뀌었습니다.

다음으로 이 땅을 먹은 것은 성주장군 충지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영규의 사례를 들었는지, 종묘에다 제사를 지내는 일까지는 하지 않고,

비단에 수로왕의 영정을 그려서 벽에 모셔두고 아침저녁으로 촛불을 켜서

경건하게 받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존경을 표하는 의례 정도를 한 거지요.

그러자 사흘이 안 되어 영정이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의례 감각이 있었던 충지는 영정을 받들고는 사당으로 가서 불태워버립니다.

이건 영정에다 불경을 저지른 건 아니고요. 영정에 갇힌 “영”을 해방시켜

원래의 집인 사당에다 돌려놓겠다는 의도의 몸짓 정도로 보이네요.

왜냐면 그 직후 충지가 수로왕의 직계자손 규림을 부르거든요.

충지는 영규와 자신이 사당의 위령威靈을 진노시켰다고 생각했습니다.

영규는 의례의 주체가 잘못되었고,

자신은 거기에 더해 의례의 방법도 잘못되었던 거지요.

그래서 “바른 의례의 주체”인 수로왕의 자손 규림에게

옛 방식대로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여기까지라면 나름 훈훈한 결말인데요,

당장 2대째에 문제가 생깁니다.

뒤에 ‘제사장’인 규림의 아들 간원이 제사를 지내는데,

‘군주’인 영규의 아들 준필이 이걸 고깝게 여겼습니다.

간원의 제물을 치우고, 거기에 자신의 제물을 차려버립니다.

권력으로 의례를 가로챈 거지요.

이 사람은 삼헌三獻을 채 끝내기도 전에 급사해 버립니다;


이 에피소드들을 기록한 일연은 다음과 같은 촌평을 합니다.

"淫祀無福, 反受其殃", - 음란한 제사는 복이 없고, 오히려 재앙을 받는다.

앞의 네 글자는 공자의 말입니다.

의례주체에 맞지 않는 의례대상에게 빌어봤자, 이득이 없다는 이야기지요.

한편 뒤의 네 글자는 좀 더 적극적인 의례론인데, 일연의 창작으로 보입니다.


멸망한 나라의 군왕, 특히 시조에 대한 의례는 중요했겠지요.

상징적으로는 원한을 품은 강력한 영을 달래야 했고,

현실적으로는 그에 못지않은 원한을 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민들을 달래야 했으니까요.

유교적 의례체계를 갖춘 국가들에서는 그래서 영역 내의 역대시조들에 대한 의례에

신경을 써 왔습니다.

“수로왕의 후손”, 즉 현지의 유지들만이 의례를 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건 지방의 권위 있는 이들에게 의례적 자치를 보장해 준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역으로 정치적으로는 지역 사람들을 안정시키는 조치고요.




4. 왕릉의 신성한 수호


앞에서도 말했지만, 고려시대까지 이 무덤은 그냥 봉분이 아니라 사당건물이 있는

“신궁”의 형태였습니다. 당연히 사당은 금과 옥이 가득한 보물창고였죠.

고려 내내 도적들이 들끓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연의 시대까지 이 무덤은 878년이 지났으나 흙도 허물어지지 않았고,

나무도 시들지 않았으며, 배열해 놓은 옥조각들도 무너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여기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데, 한번은 도적들이 사당의 보물을 노리고 침입했답니다.

그런데 갑옷, 투구, 활과 화살로 무장한 맹사猛士가 사당 안에 와서

사면으로 비 오듯 활을 쏘았다고 하네요.

도망갔던 도적들이 며칠 후 다시 오자, 길이가 30여자나 되고 눈빛이 번개 같은

큰 구렁이가 나타나 도적들을 물어 죽였다고 하네요;

이들이 실존했던 수호신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단지, 이런 이야기가 믿어지는 동안 사당은 안전했겠네요.

물론, 이런 이야기 따위 안 믿게 된 고려 말에 이 무덤은 논이 되어버렸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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