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학 잡담

무당 신데렐라와 죽음의 연회장

21살 때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엑스터시 읽고 쓴 레포트.




 강의를 통해 민담을 분석하는 세 가지 방법을 살펴보았다. 그 중 신화로서의 민담 읽기는 이전에 살펴본 테마인 마녀사냥과 가장 깊은 연관을 가진다. 종교개혁과 마녀사냥을 통해 당시 유럽에 널리 퍼져있었던 민중적 제의가 기독교에 의해 정복당했다. 그 성과는 그 이전까지 전해내려오던 이야기들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아마도 신화의 형태였을 그 이야기들은 민중종교적 성격이 제거되면서 기독교화되거나 단순한 '옛날이야기'로 변질되었다. 까를로 진즈부르크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걸친 연구를 통해 그 신화적 요소들을 찾아내고 있다.

 신화의 세계는 대칭성을 갖추고 있고, 고도로 균형잡혀 있다. 신화는 그런 세계에 결손이 생기면서 시작된다. 신화의 영웅들은 그 결손을 메우기 위한 모험을 하고, 종국적으로 본래의 연관성을 회복하거나, 실패한다. 대칭된 세계-이 세계와 저 세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두 세계 사이의 소통 수단이 필요하다. 이 소통은 여러 가지 상징물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놀라운 점은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여러 지역에서 비슷한 상징물을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이 세계와 저 세계 간의 소통이 가능한 인물-재를 뒤집어 쓰거나 다리를 절룩거리는 '샤먼'이다.

 진즈부르크는 비슷한 구조나 주제를 가지고 있는 여러 신화와 민담을 비교분석하면서 그것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상징을 발견한다. 대표적인 것이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이아손, 아킬레우스, 그리고 신데렐라 이야기에도 나타나는 상징들이다. 이들은 절름발이, 반인반수, 한쪽 신발만 신은 사람등이다. 이들은 본래의 균형잡히고 대칭되어 있는 세계의 중간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 둘의 중간에 있으면서 결손을 메꾸고자 하는 캐릭터들이다. 이들은 흔히들 죽음의 세계와 삶의 세계를 넘나든다. 이 두 세계는 아주 명확하게 대칭되며 오랫 옛날의 인류에게 있어 삶과 죽음은 그렇게 먼 세계는 아니었다. 새, 콩, 아궁이, 재와 같은 상징들이 그 두 세계를 매개한다.

 이런 캐릭터는 지금까지도 보편적이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이 현대에 신화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지적했는데, 과연 영화에도 이런 '절름발이'가 등장한다. 영화 '헤드윅'의 주인공 헤드윅은 동베를린 출신으로 미군과 결혼해 미국에 가기 위해서 성전환 수술을 받는다. 하지만 수술은 실패하고 그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이 되어 락밴드를 만든다. 그 밴드의 노래 중 하나는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신화를 다룬다. 인간은 원래 두 사람이 붙어있는 모습이었는데 신에 의해서 두 개로 찢어졌고, 그 짝을 찾아 다니기 시작한 것이 사랑의 기원이라는 것이 그 노래의 줄거리이며 이 영화의 테마이다. 여기서도 결손에 의한 불균형과 회복을 위한 노력이 드러나 있다. 헤드윅은 찢어진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세계를 한 몸에 가지고 있는 샤먼이다. (심지어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알몸으로 밤거리를 '절룩거리며' 걸어간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들은 '절룩거리는가?' 진즈부르크는 그것을 인간의 '대지성'을 통해 설명하려고 한다. 오이디푸스의 경우를 보자면, 반인반수인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버린 오이디푸스는 어머니 대지로부터 개체성을 얻게 되지만 역시 대지에 속해 있다. 이 불균형은 부자유스러운 한쪽다리로 상징된다. 오이디푸스는 실제로 절룩거리며 걷지는 않지만 그 이름이 상징하듯 절룩거리며 방황하게 된다. 왕자의 연회장에 다녀온 신데렐라 역시 한쪽 신발이 벗겨진 채로 절룩거리며 걸어나온다. 결혼을 예비하기 위한 연회장은 분리 되어 있는 세계가 하나로 모이는 곳이다. 신데렐라는 조력자의 도움으로 그 연회에 참가하기는 하지만 그 대가로 신발 하나를 떨어트리고 온다. 한쪽 신발로 부자유스럽게 걷는 것은 다른 세계에 다녀왔다는 표시인 것이다. 헤드윅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세계 가운데 있으면서 성에서 자유로워졌지만 사회라고 하는 중력에는 이기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해 고통스러워한다. 그 역시 절룩거린다.

 인간과 다른 세계, 죽음의 세계, 대지의 세계는 흔히 동식물로 이 세계에 나타난다. 옛 사람들은 강을 타고 올라오는 연어나 산의 염소가 저 세계에서 보내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뼈'의 처리에 관한 문제가 생긴다. 저 세계의 선물인 동물을 먹고 뼈를 잘 간수하는 것이 중요시된 것이다. 중국판 신데렐라인 섭한의 이야기에서 섭한의 계모는 똥 밑에 뼈를 묻었다 망하고 섭한은 그 뼈를 잘 처리해 원하는 것을 얻는다. 북유럽 신화의 신인 토르는 먹어도 다시 부활하는 염소를 데리고 다닌다. 토르는 자신을 재워준 인간에게 그 염소고기를 먹게 하지만, 그 인간은 염소 뼈를 잘 간수하지 않고 골수까지 쪽쪽 빨아먹어버린다. 염소는 부활하긴 했지만 다리를 절룩거리게 되었고 토르는 이에 크게 화를 낸다. 뼈에 대한 상징도 인류가 비슷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저 세계와 이 세계를 중계하는 샤먼은 엑스터시에 빠져 제의를 하기 전에 동물가죽을 쓰거나 가면, 망토 등을 몸에 걸치는 일을 한다. 이것은 마치 반인반수의 스핑크스처럼 저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차림을 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마녀가 짐승으로 변신해 연회에 참가하러 간다는 마녀연회에 대한 묘사는 이런 '가죽쓰기'의 기억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진즈부르크의 논문에는 신화와 민담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지 않다. 두 세계 간의 불균형과 회복이라는 것에 있어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신데렐라 이야기는 같은 테마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는 이런 인류 공통의 상징을 바탕으로 해서 빠르게 확산된 신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이야기 사이에는 명확한 차이점이 있다. 오이디푸스의 결혼은 어머니와의 결혼이며,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유지해야 할 거리를 넘어버린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두 세계의 사이에서 결손을 메꾸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절룩거린다. 하지만 신데렐라의 결혼은 이질적인 세계의 조화와 재결합을 나타내고 있다. 두 세계가 만나는 곳이자 죽음의 세계인 왕자의 연회장에서 도망쳐나온 신데렐라는 그 표식으로 한쪽 신발을 잃고 비틀거리며 걷게 된다. 하지만 그 신발을 되찾고 결혼에 성공하면서 마침내 세계는 전우주적인 균형을 회복하게 된다.

 부자유스러운 보행, 뼈, 가죽, 기타 여러 가지 상징들이 유라시아 대륙과 아메리카에까지 널리 퍼져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먼 옛날 인류가 전파되어 나가면서 퍼져나간 것이라고만 보기에는 모자란다. 확산된 인류는 수렵, 유목, 농경 등 서로 다른 생산양식과 문화를 수십 세기(!)동안 만들어갔다. 역사상 직접적으로 접촉이 없었던 먼 문명권에서 비슷한 주제와 플롯의 민담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느 한 쪽에 의한 전파라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인간의 마음 속 구조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요소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내면 속에 똑같은 상징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에 의해 자연을 해석하고 오랜 세월 동안 제의를 행해온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보편적인 것은 상징이 아니라 그 상징이 나타나게 한 구체적인 경험일 것이다. 언급된 것들과 같은 공통된 상징이 나타나게 한 것은 크게 보아 '중력'과 '죽음'으로 보인다. 이 두 가지는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들이다. 자기 자신과 같이 중력에 의해 대지에 발을 붙이고 서 있고, 자기 자신과 같이 살아있는 것들의 세계. 이것이 인류가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이 세계'이다. 때문에 중력을 무시하고 날아다닐 수 있는 새들은 '영혼', '저 세계에서 날아오는 사자 혹은 영혼' 이라는 상징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수중세계는 '이 세계'와 너무나 이질적이며 또한 접근하기조차 어렵다. 천상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대칭되는 이 세계와 저 세계에 대한 관념이 생겨난다.

 죽음은 중요한 문제다. 죽음은 이 세계와 저 세계 간의 경계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장례는 '저 세계'인 지하세계로 보내기 위해 땅에 묻든지, 천상세계로 보내기 위해 새들에게 먹이로 던져주는 형식으로 취해진다. 태워서 '재'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뼈는 마지막에 남는다. 이런 여러 형태의 장례에서 죽음의 세계에 대한 상징이 발견되며, 그 세계와의 매개체들도 나타난다. 이렇게 해서 신화의 세계는 대칭되고 균형잡힌 것으로 완성된다. 하지만 철새와 물고기와 농작물은 저 세계에서 오는 것이므로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의 소통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필요해진다. 샤먼의 등장이다. 신화에 등장하는 그 숱한 '절름발이'들은 저 세계에 다녀올 수 있는 무당들이었다. 신화적 요소가 많이 제거된 페로판 신데렐라는 대모인 요정의 마법에 의해 도움을 받기만 한다. 하지만 좀 더 적극적인 그림판 신데렐라는 다른 버전에서의 '뼈'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개암나무 가지를 가지고 어머니의 영혼을 부르는 의식을 행하고 새집(다른 세계로 통하는 매개체)이나 아궁이(역시 마찬가지)를 통해 이동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이단재판관에게 걸렸으면 틀림없이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될 법한 행동들이다. 이 신데렐라가 좀 더 원형의 가까운 것이라고 하면, 신데렐라는 벼락출세하는 공주님이 아니라 '유라시아 샤머니즘'의 무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연구의 가치는 세계의 신화 및 민담의 유사점을 잘 정리해 놓았다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 큰 가치는 민담의 형태로 전해내려오는 옛 민중들의 제의, 그 사람들의 심성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중심에다 엘리트 중심인 역사 서술만 가지고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가 가지고 있었던 샤머니즘 종교같은 걸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재의 국경선을 기준으로 하여 지역사를 연구하거나 지배엘리트의 문화를 가지고 문명사를 쓰는 것은 지금까지도 많이 해 온 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는 전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정신을 파악할 수 없다. 서양의 지배엘리트는 겨우 몇백년 전에 '역사적'으로 다른 문명권과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민중의 정신은 수천년 전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덧붙여, 민담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등장하는 '죽음'의 상징과 이미지에 대하여. 민중문화의 세계적 유사성이 구체적 경험의 유사성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유럽 끄트머리 사람과 아시아 끄트머리 사람이 같이 경험하고 같이 충격을 받는 일이 바로 죽음일 것이다. 죽음은 민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테마인 것으로 보인다. 죽음이 가까이 있는 시기(예를 들면 서양의 17세기)에 이런 이야기들은 훨씬 잔혹한 형태로 드러나 전승될 것이다. 입으로는 합리와 보편을 말하면서 죽음의 세계를 이 세계 한가운데에 던져놓는 지금같은 시대를 민중의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종교학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신분석과 의례구조  (0) 2010.12.02
공(空)과 식(識)의 이중운동  (1) 2010.12.02
윤회란?  (0) 2010.12.02
김수로왕의 저주- 수릉왕묘의 의례론  (2) 2010.12.01
유교는 종교인가?  (1) 2010.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