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 때 지금 지도교수님이랑 학생 자율과제 프로그램하면서
“자율적”으로 번역해 간 글입니다.
르네 지라르를 읽고 있을 때였는데,
도서관에서 일본 종교학 학술지를 뒤적거리다 발견했던 기억이 납니다.
분명한 주장이 없는 가벼운 칼럼 정도의 글이지만 재미는 있군요.
저자인 와키모토 쯔네야脇本 平也는 불교학과 종교학 이론 분야에서
활동했던 학자입니다. 이 글에 나온 문제의식은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에서 나온
『죽음의 비교종교학(死の比較宗教学)』에서 더 깊이 다뤄진 것 같군요.
宗敎學論集 23집, 駒沢宗教学会, 2004 수록 논문
종교에 있어서 ‘살해’에 대하여
와키모토 쯔네야(脇本 平也)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리스도교를 시작으로, ‘살해’는 세계의 여러 종교에 있어서 중요한 테마의 하나가 되어 있다. 의례와 신화, 교리 등에서 보이는 살해에 관련된 현상의 양태는 다종다양해서, 여기에 대한 종교학적 해석도 또한 다종다양하게 전개되어 있다. 그 다양한 해석의 상황을 먼저 희생제의를 예로 들어 개관하여 보자.
희생제의란, 동물을 죽여 희생시켜서 이것을 신령에게 바치는 의례적 행위이다. 바친다고 하는 행위에 주목하여 해석하면, 소위 증여론이 성립한다. 강대한 힘을 가진 신령에 선물을 해 그 환심을 사서,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얻으려고 하는 의례적 행위라고 보는 설이다. 가호(加護)를 얻거나, 재앙을 피하거나, 행복과 안전을 기대하거나, 혹은 감사하는 봉헌의 행위라는 것이다. 바치는 것이 동물뿐만이 아니라, 농산물, 음식물, 물품, 금전 등으로 넓힌 의례가 되면, 그 해석은 타당성을 넓혀 간다. 오늘날의 새전(賽錢)에 담겨지는 의미의 대부분은, 여기에 속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점에서 상식적으로도 매우 납득하기 쉬운 해석이다.
이것을 비판하면서 공찬설(共餐說)이 나온다. 증여설은, 기브 앤드 테이크의 화폐경제사회의 성립을 배경으로 한 해석이다. 의례에 있어서 봉헌물은 동물에서 마침내 물품, 금전 따위로 변화해 가는데, 이 변화형에 대응하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 의례의 가장 오래된 형태는 역시 동물 희생제의로, 거기에서는 봉헌보다도 오히려 공찬, 공동식사가 행위의 중심이 된다. 즉, 일단 바쳐진 희생동물을, 그 다음에는 제단에서 내려서는 부족 공동체의 구성원이 함께 나눠먹는다. 이 공동만찬에 의해, 신령 및 공동체 각 구성원 사이에 공통의 피가 흐르게 된다. 거기에서 신령을 핵으로 하는 공동체의 사회적 통합이 활성화되고 유지된다. 희생제의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사회공동체의 연대를 강화하고 성화하는 의례이고, 구성원 사이에 흐르는 공통의 피야말로 성스러움 그 자체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공찬설이다. 우지가미(씨족신)과 우지고(같은 씨족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제례조직에 있어서의 직회(直會)같은 것에는 매우 적합한 해석이라고 해도 좋겠다.
여기에서 더욱 전개되어, 성스러운 것과 사회의 심볼인 신의 실체는 사회나 다름없다, 고 하는 사회학설도 제기된다. 이 설의 의하면, 신과 신자와의 관계는 실은 사회와 그 구성원과의 관계를 상징하고 있다. 구성원 개인은 사회 덕분에 생존을 보증 받고 있지만, 사회전체는 개개인이 사사로운 뜻을 버리고 연대하는 것에 의해 유지된다. 사회의 공적인 권위와, 개인의 사사로움의 부정은 표리를 이루는 상호작용의 관계다. 희생제의에 있어 신에게 봉헌되는 희생이라는 것은, 사회의 공을 위해서 희생되는 개인의 사사로움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논하여, 개인에 대한 사회공동체의 성성(聖性)을 설명한다. 전시의 국가와 국민과의 이른바 ‘멸사봉공’의 관계를 생각나게 하는 해석에까지 전개되어 있다. 이 희생에서 살해되는 것과 동일시되는 형태로, 인간의 개인의 사의성(私意性), 자의성(恣意性)에 대한 살해라는 테마가 얼굴을 내민다. 살해되는 것의 실체는, 사회와 서로 호혜관계였던 개인이 사회의 위기를 맞아 자신을 희생하는, 그 개인의 이기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희생으로서 살해되는 동물을 상징적으로 무엇과 동일시하는가. 희생제의의 해석의 양상은 여기에 의해 바뀌어 온 것 같다. 이상의 해석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신령의 마음에 드는 것, 신령과 인간들과의 관계의 매개가 되는 피, 사회의 공적 권위 존립을 위해서 부정되는 개인의 사리사욕 같은 것이다. 마지막의 개인적인 사사로움의 부정을 말하는 설은, 구체적으로는 토템 동물의 희생제의를 자료로 전개되고 있다. 토템은 씨족의 선조이면서, 또한 씨족의 멤버 각자이기도 한 토템씨족사회제도를 상정하는 것이 기초에 있었다. 마찬가지로 토템동물 희생제의를 재료로 하면서, 이것을 오랜 옛날의 원(原) 아버지 살해를 회오적(悔悟的)으로 기념하는 반복행사라고 하는 정신분석학설도 나와 있다. 역사학적으로는 황당무계하다고 물리쳐 버릴 수 있지만,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가설을 전개시켜, 아들의 자립은 아버지 살해를 통해 처음으로 획득된다고 설명하는 지론이 기초에 있다. 희생제의라고 하는 의례의 사실에 대한 관심을 어딘가에 잊어버리고 온 해석이다. 단지 살해에 관해서 말한다면, 여기서 또 새롭게 아이의 자립 배후에 있는 아버지살해라고 하는 주제가 등장한다. 거기에 본고에도 희생제의라고 하는 틀을 넘어서, 넓게 종교에 있어서 살해의 여러 현상에 눈을 돌려 보겠다.
아버지살해가 있다면, 그것과 함께 어머니 살해나 아들 살해도 있어야 한다고 예상된다. 사실, 종교적인 의례와 신화와 설화전승 등의 영역에서는 아버지, 어머니, 아이는 물론 처녀, 어린이, 사제, 영웅, 왕 등 여러 인간의 살해가 문제시된다. 희생은 동물에 제한되지 않는다. 귀, 악마, 요괴 등 인간이외의 존재로부터 신, 특히 여신의 살해 등, 종교에 있어서 살해는 풍부한 사례에 부족함이 없다. 그 중에서 여기에서는 특히 마지막에 예로 든 여신의 살해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민족학계에서 ‘하이누벨레 形’이라고 불리는 신화와 의례 때문에 화제가 된 테마다.
하이누벨레라는 이름의 처녀신이 있었다. 귀중품을 대변으로 배출하고는 사람들에게 건네주고 있었지만, 결국 살해당해, 잘게 썰려서, 대지에 파묻혔다. 파묻힌 그 파편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토란이 생겨났다. 덕분에 사람들은 토란 재배에 의해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한다. 일본에서도 오오게쯔히메와 우케모치노카미 등, 비슷한 것 같은 이야기가 있다. 살해당해서, 그 사체의 각 부분에서 농경과 양잠과 생활에 필수적인 작물과 누에 같은 것이 생겨났다, 고 이야기된다. 거기에서 ‘사체화생신화(死體化生神話)’라고도 유형지어진다. 본고의 관심은, 여기서의 살해의 해석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서술될 수 있다. 매일 인간은 자기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죽인다. 동물을 죽인다. 식물을 죽인다. 살해 없이는 생명 유지 일반이 불가능하다. 잘게 썰려진 토란의 작은 조각을 대지에 묻어서, 거기에서 새로운 토란이 태어난다. 새로운 생명의 재생되기 위해서는 낡은 생명이 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죽음과 살해가 삶의 일부라고 하는 생명의 질서를 표현하는 것도 하이누벨레다, 라고 설명한다.
이 해석으로는, 살해가 생활의 식량을 공급한다고 하는 관점이므로, 살해의 적극적인 순기능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 된다. 또 하나, 말하자면 소극적인 순기능이라 할 만한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살해 덕분에 생활의 위험과 파국이 회피된다고 하는 방향이다. 즉, 인간생활에 뒤따르는 여러 가지 재해와 병과 죄과가, 희생을 신에게 바침으로써 피하여지고 깨끗해진다. 이른바 scapegoat(희생양)이다. 인간의 사회생활에는 자연과 인공의 재해와 사고와 쟁란이 있어서, 이것을 겪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 혹은 자신의 과오와 죄악으로 세상이 오염되는 일도, 겪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 없다. 살아가는 이상, 무언가 불안과 공포와 자책의 아픔 같은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불가피한 악한 더러움과 재난과 고뇌를 희생물의 어깨에 지워서 죽이는 것으로, 모든 것이 갚아지고 정화되어, 사회생활의 평안이 회복되고 유지된다. 이와 같이 정화와 안정화를 위한 살해라고 해석되는 의례다. 이 계열 상에, 속죄양, 인신공희, 대불(大祓), 히나 인형 흘려보내기 등도 위치지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이지메’와 ‘차별’도 같은 ‘짐 지우기’의 매커니즘으로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거기에 작용하는 사회적 폭력을 양 죽이기가 폭발 직전의 냄비에서 김을 빼는 것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하는 순기능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와 같은 순기능이 있는 반면에, 역기능은 어떨까. 사회와 인격의 통합에 대해서, 거꾸로 파괴의 방향으로 기능한다고 해석되는 살해의 의례와 교리 등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도덕적인 사회규범을 혼란시키는 것으로서, 예를 들면 소를 죽이는 의례를 통해 연적을 주살하는 것 등이 전형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컬트 문제도 이와 관계가 있다. 그러나 규범적 질서를 잡을만한 사회공동체의 테두리를 어디에 설치할 것인가 하는 것에 의해 이야기는 변해 간다. 예를 들어 신의 의를 실현하기 위한 성전에 대한 신적격멸(神敵擊滅)이라고 하는 경우, 연구자가 중립적인 입장에 선다면, 순기능인지 역기능인지 뭐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된다. 도대체 전쟁의 대의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라는 문제제기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설령 비일상적 초월을 지향하는, 특히 사상의 레벨이라고 한다면, 살해에 대한 종교적 역설에 연구자가 기능의 순역을 말하는 것은 아예 무의미해지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고 부모를 죽여서 처음으로 해탈을 얻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어쨌든, 다양한 기능을 맡으며 살해는 종교의 세계에 자주 출현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죽음과 재생의 테마에 연결되는 것 같다.
이 죽음과 재생이라고 하는 테마는 소위 통과의례의 해석의 상도(常道)가 되어 있다. 통과의례는 희생제의 같은 것과는 달라서, 살해를 직접 다루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리-이행-통합이라고 하는 그 구조는 죽음과 재생을 상징한다고 해석되고 있다. 예를 들어 성년식은 어머니의 품에 있는 아이로서는 죽고, 새롭게 한 사람 몫의 성인으로서 다시 태어나기위한 죽음과 재생의 의식이라고 한다. 어쩌면, 이기에도 살해의 계기를 읽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어머니의 품에서 분리하는 일은 상징적으로 어머니를 죽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정태적인 죽음보다는 오히려 동태적인 살해의 계기를 더해 해석의 확대를 시도하면, 경사스러운 결혼식에도 살해가 연관된다. 남편은 상대 여성의 여러 가지 가능성을 죽이고 아내로 삼는다. 마찬가지로 아내는 상대 남성의 여러 가지 가능성을 죽이고 남편으로 삼는다. 서로가 더 조건이 좋은 상대와 맺어지는 가능성을 죽이는 일, 혹은 가능성을 빼앗기지 않고 자유롭게 독신을 즐길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각각의 가능성을 서로 죽이는 일, 혹은 가능성을 스스로 내놓아 함께 희생하는 일을 통해, 여기에 남편과 아내가 재생한다. 남편은 여자를 죽여 아내로 삼고, 아내는 남자를 죽여 남편으로 삼는다. 혹은 스스로 여자를 희생제물로 삼아 아내가 되고, 스스로 남자를 희생제물로 삼아 남편이 된다. 남편과 아내에게도 상대를 죽인 빚이 있고, 스스로를 죽일 책임이 있다. 남편도 아내도, 살해당하고 살해했을 터인 남자와 여자가 되살아나서 다른 여자와 남자와 맺어진다거나 하면, 그것은 곧 바람기 혹은 불륜이라고 하는 일이 된다. 인생 의례에서 새로운 단계에 옮겨갈 때마다, 이렇게 살해와 죽음과 재생의 계기를 읽어내는 해석이 불가능한 것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된다.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자. 투쟁은 인간의 한계상황의 하나이다. 자연과의 투쟁, 자기자신과의 내면적 투쟁 등도 있지만, 문제는 특히 타인과의 투쟁이다. 수험전쟁, 취직전쟁, 출세경쟁, 오래 살기 경쟁 등, 다수의 타인과의 여러 가지 투쟁을 피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피할 수 없는 투쟁을 이겨내는 것을 통해서 사람은 자신의 자기실현을 이루어 간다. 투쟁에 이기는 일은 상대를 지게 하는 일이다. 상대를 지게 하는 것은 상대의 소망을 부수어 가는 일이다. 상징적으로 말하면, 살대를 죽이는 것, 적어도 상대의 일부를 죽이는 일이 된다. 많은 상대를 죽여 나가서 사람은 살아간다. 결국 생존경쟁에 몸을 던지고 무수한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죽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인 것 같다. 이런 상황을 의례와 신화와 사상 같은 것을 매개로 알려주고 있는 것이 종교에 있어서 살해가 아닐까. 이런 해석도 있을 듯 하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살해가 종교에 있어서 중요한 테마의 하나라고 하는 것은 틀림없다. 이것에 관계된 해석의 다양성을 대단히 조잡하지만 생각나는 대로 개관해 보았다. 어떤 해석이 어느 정도 타당한 것인가는 잘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들어 보아야 할 점은 있는 것 같다. 연구자는 각각의 자신의 감성과 지성과 경험을 총동원해서 이미지네이션에 힘써, 스스로의 해석을 시도한다. 그 중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공상적, 독단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있지만, 그래도 어딘가 괜찮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종교현상 그 자체의 설명보다도 오히려 해석에 담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의 파악법에 배워야 할 점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재미있다. 이것이 나의 인상이다. 종교이해도 그런 것이므로, 종교를 통한 인간이해의 시도라고 하는 측면에서, 나는 종교학설사의 매력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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