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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잡담

조선후기 에로물 속 종교자료 (1) : 섹스를 위하여 호구별성께 빌다

(이 글에는 성적인 묘사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원하지 않으면 닫아주세요.)








종교경전이나 엘리트들의 사상, 활동에 대한 문헌만이 종교자료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의외의 문헌에서 당대의 종교적 상상력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들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어수신화(禦睡新話)』라는 책이 있다. 조선후기 미술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잘 알고 있을 장한종(張漢宗)이 엮은 패설집이다. (원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으며, 2010년에 번역본도 나와 있다.) 


패설 중에서도 “음담패설”의 비중이 상당히 크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수위가 상당히 높은 섹드립들이 넘쳐난다. 냅다 삽입만 하는 남편에게 여성이 만족할 수 있는 테크닉과 오르가즘의 감각을 상세히 설명해 주는 아내라거나(「單袴猶惜」) 남성 성기의 냄새와 맛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라거나(「油餠之味」). 


나는 사극에서 조선시대 사람들이 키스를 하는 모습이 나올 때마다 의문이었다. 과연 키스라는 행위는 근대 이후 서구에서 도입된 것인가, 아니면 보편적인 스킨십인가? 『어수신화』에 있는 한 글(「都事責妓」)에 의하면 아무리 늦어도 19세기 초, 적어도 기생과 같은 전문적인 테크니션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의 섹스를 했다고 한다.


“입으로 입술과 혀를 빨고(口吮脣舌), 체를 흔들듯이 몸을 좌우로 마구 흔들고, 키를 움직이듯이 허리를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엉덩이를 자리에 붙여두지 않았다.”


이 자료에서는 단순한 입맞춤이 아니라 입술과 혀를 모두 이용하는 딥키스가 묘사되어 있다. 상대 남성은 “신이 흩어지고 혼이 날아가 중도에 사정을 해버렸다(神散魂飛, 乃中路經泄)”고 한다.


전근대 한국의 섹스와 스킨십은 그 자체로 훌륭한 문화사적 주제이지만, 여기에서는 각설하고 종교학자의 본업으로 돌아오겠다. 『어수신화』의 “음담패설” 가운데에는 당대의 종교현상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이야기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첫 번째인 「祝願行房(섹스하기를 축원하다)」에는 천연두[痘疹]에 관련된 신앙과 금기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세속에서는 홍역에는 신령이 있다고 한다. 서신(西神)이라고도 하고, 호구별성마마(戶口別星媽媽)라고도 부른다. 집안의 늙은이와 젊은이가 모두 마음을 다하여 몸을 깨끗이 하며 이웃 이나 친척 등 외부인이 병을 앓는 아이의 방에 드나들 수 없다. 작은 상에 정화수를 차려 놓고 ‘객주상(客主床)’이라고 부른다. 혹 하려는 일이 있으면 이 상 앞에서 손을 모아 기도를 한다.”


俗言傳曰, 痘疫有神靈. 惑號西神, 又呼稱戶口別星媽媽. 家內老少, 盡皆誠心淨身, 隣里親戚雜人, 不能出入病兒房中. 設小床井華水, 而名曰, 客主床. 而或有所爲之事, 輒手禱于床前.


아이가 천연두를 앓는 동안의 금기에는 당연히 섹스가 포함된다. 그런데 어느 행랑아범의 아들이 홍역에 걸렸다. 그는 “밤일을 하루도 거른 날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열흘 넘게 섹스를 못 하니 안달이 나서 아내를 조르기 시작했다. 아내는 “호구별성마마”가 머물러 있는 집에서 그럴 수는 없다고 거절한다. 그러자 행랑아범은 “별성은 남자일 테고 마마는 부인일 텐데 왜 이해를 못해주겠냐”면서 막무가내로 달려든다. 아내의 타협점은 아래와 같았다.


“그렇다면 손을 씻고 상에 있는 정화수에 나아가서 빈 후에 재빨리 해치우면 괜찮겠네요.”


그러니까 정화의례를 하고, 천연두의 신에게 기도를 한 후에 하자는 거였다. 많은 경우 금기는 기계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특히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행위자를 상정할 경우에 ‘주술적’인 원리보다는 신의 의지나 승인이 중요해진다. 신은 예외적인 의례 상황을 다룰 때에 편리하다. 어쨌든, 그리하여 “섹스를 위한 기도”가 이루어졌다.


“소인의 몸뚱이는 사람의 형상을 갖추어 놋숟가락으로 밥을 먹지만 개돼지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젊은 부부가 같이 자지 못 한 것이 오래되어 욕정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감히 우러러 아뢰오니, 엎드려 빌건대 불쌍한 처지를 살피시어 특별히 한 판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처분을 내려주시옵소서.”


小人身具人形, 雖鍮匙食飯, 何異於豚犬之屬? 年少夫妻, 久不同枕, 不勝春情. 玆敢仰告, 伏乞垂察矜憐, 特賜一席交歡之處分焉.


그리고는 손을 모으고 절을 두 번 했다는 것이다.


웃으라고 하는 가상의 이야기이고, 실제로도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지만, 이것은 조선후기 민중의 기도 양식을 담고 있는 대단히 드문 자료다. 상황과 형식으로 따지면 고유축문(告由祝文)에 해당하겠지만, 엘리트의 축문과는 다른 직설적이고 소박한 말투다.


놀랍게도 이 기도는 “응답”도 받았다. 마침 그 집 앞을 지나가던 순라군(巡邏軍)이 그 모습을 몰래 훔쳐보다가 호구신의 성대모사를 하며 “바라는 대로 시행할 것을 허락하노라. ‘그것’을 하라!”고 말한 것이다. 부부는 신나게 한 후에 상의를 하기 시작했다. 제사 후에 영험이 있으면 보사(報祀)를 하는 것은 당시의 상식이다. 행랑아범은 다시 손을 씻고 기도했다.


“분부에 따라 한 차례 일을 잘 마쳤습니다. 그 은덕이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어 감사함을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依分付, 而好做一次. 德澤山高海深, 不勝感謝


그러자 호구신이 된 순라군은 다시 응답을 내린다. 


“너희는 또 그것을 하라” 


결국 부부는 신의 뜻에 따라 연달아 다섯 번을 했다고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