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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잡담

2006년 일본종교학회 "종교현상학의 가능성" 발제문들 번역.

역사적 구조론으로서의 종교현상학

 

카나이 신지(金井新二)

 

종교현상학에의 여러 비판으로부터, 특히 정적 비역사적이라고 하는 비판에 대해서(레우, 엘리아데 등). 동적 역사적 종교현상학으로의 걸음에 대해서는, 엔테레게이아론(블레이커), 지향성 분석(바덴부르그), 종교사적 테마에 대해서의 현상학(크림카이트) 등이 있었다.

 

1. 막스 베버로부터의 시사

 

합리화프로세스로서의 종교사. 이것은, 이념형에 의한 기술, 유형론의 역사화로서의 유형사적방법이다.

그에 의하면, 여러 역사기술은 관점으로부터 선택되는 것으로서, 주관적 구성물이다. 예를 들면, 합리화 프로세스로서의 역사(베버),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의 관점이고, 유물사관에 의한 역사는 마르크시즘적 계급투쟁의 관점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어느 쪽이든 공통된 것은, 어느 쪽이든 이념형에 의한 일면적 고승에 의한 역사파악, 역사기술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어느쪽도 실체화를 피한다면, 색출적 기능을 가지는 이념적 가설로서 유효하다.

이 합리화 프로세스론은 동시에 유형적인 현상의 역사이기도 하고(단순히 역사적인 여러 사물이 아니라 유형적인 여러 사물), 이 논의 기본적 사고는 역사적 구조론의 베이스가 된다.

 

2. 그리스도교 사상사로부터

 

그리스도교 하나님 나라사상은 현저한 대립축을 가진다. 그것은, 천년왕국론적인 것과 두 왕국론적인 것이다. (종교사회주의연구로부터)

유형화하면,

천년왕국론적- 종말론적, 사회비판적(예언자적), 정교일치의 이상주의.

두 왕국론적- 구원론적, 교회주의적(사제적), 정교분리의 현실주의.

이것을 구원=종말의 구조라고 부르겠다. 이 구조는 종말론을 가지는 종교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적 구조로부터 비롯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상정(가설적 상정)한다.

여기에 대해서 기본적으로는 고대인은 개개의 인간의 죽음(구원)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죽음(구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종말론이다. 이와 같은 세계의 죽음(구원)을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은 최근(근대 이후)의 일인가.

왜 종말론은 방기된 것인가. 여기에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종말론의 사회적 에너지에의 공포. 위정자는 보통 종말론을 위험시해 왔다. 또 이단으로 취급해 왔다.

최초의 케이스인 17세기 영국이 역시 중요할 것이다(뒤의 나라들은 이것을 답습하였다?). 근대사회의 출현을 위해서 옛 제도를 타파한 것은 종말론(천년왕국론의 성행, 종말론적 열광)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단지 근대사회 그 자체는 종말론의 방기를 요구(이미 혁명정부에 의해서). 이 점은 나라나 사회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기본은 같으며, 그것은 종교는 구원론이며, 종말론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강한 경향이다(로크의 정교분리론).

이와 같이 구원=종말의 구조(의 관점)으로부터 보이는 종교사는 유형사적(상술) 구조론이다. 이것을 새로운 역사적 종교현상학의 시도로 삼고자 한다.

 

 

 

종교이해의 지평-루돌프 오토의 종교론을 중심으로

 

사와이 요시츠쿠(澤井義次)

 

 

종교현상학이라 불리는 연구경향에 속하는 연구자들은 종교의 독자성을 강조하여 왔다. 그러나 이 문제점은 여러 해에 걸친 논의 의 결과, 이미 명확하게 해결된 문제라고 하기보다는 여전히 현대의 종교학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논쟁점의 하나이다. ‘종교현상학을 표방하여, 종교의 체계적인 연구를 목표로 한 다양한 종교연구자에게는 각각의 방법론적인 다양성이 보이지만, 모든 종교현상학자들이 목표로 하고 있는 지점은, 한 마디로 말하면, 종교의 의미이해에 있다. , 종교현상학이라는 것은 다마루 도쿠젠(田丸德善)의 말을 빌리면, 실질적으로 종교적 삶의 해석학이다. 여기에서는 종교현상학의 방법론적 가능성의 하나로서, 종교의 의미론적 접근을 제시하려 한다.

그 주요한 방법론적 특징은, 오토가 말하는 성스러운 것이 비합리적인 요소와 합리적인 요소가 긴밀하게 연결된 복합적인 카테고리라는 것이 시사하는 것처럼, 종교에 있어서 의미의 이중성, 합리적 또는 표층적인 의미와 비합리적 또는 심층적인 의미에 주목한다고 하는 점이다. , 종교의 합리적 또는 표층적인 의미의 지평만으로 시야를 한정하지 않고, 종교의 비합리적 또는 심층적인 의미의 지평에도 초점을 맞추어, 종교현상 또는 종교적인 삶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와 같이 오토의 종교론을 의미론적으로 다시 파악할 때, ‘성스러운 것의 의미의 이중성이 분명해 진다. 그것을 파생적인 의미에 있어서 성스러운 것과 본원적인 의미에 있어서 성스러운 것, , 합리적인 요소를 동반하는 의미의 지평과 합리적인 요소를 뺀 비합리적인 것 그 자체의 의미의 지평이다. 후자는 오토가 말하는 누미노제에서 시사하는 의미의 지평이다. , ‘성스러운 것은 일상언어적인 의미에 있어서 성스러운 것과 심층적인 의미차원에 있어서 성스로운 것으로써 중층적으로 구성되는 의미세계로서 파악된다. 성스러운 것이 사회, 문화적인 표층에 있어서 파악될 경우, 그 의미는 자연히 개념적인 것으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특정의 종교전통에 살아 있는 신앙의 담당자에 있어서, 실로 같은 성스러운 것은 반드시 개념적인 것으로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며, 다의적인 의미 연쇄를 내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오토가 말하는 이데오그람’(Ideogramm)이라는 것은 그 안에 일상언어적인 의미의 지평과 심층적인 의미의 지평이 겹쳐 있어, 종교의 독특한 감정적 요소를 표현하는 해석기호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의미세계에 살아 있어 성스러운 것의 체험을 가지지 않는 자연적인 인간은, 이데오그람을 자연적인 개념으로서 일상적인 의미차원에서 취하지 못한다고 오토는 말한다. 그러나 종교현상학의 입장, 또는 종교적 생의 해석학의 입장에서 보면, 오토가 말하는 이데오그람은 성스러운 것의 개념과 유사하지만, 그것은 결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개념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에 사용되어,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열정을 일으키는 아날로지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이데오그람에 의해서, 일상적인 의미세계에 잠재하는 심층적인 의미세계, 누미노제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의미의 깊이가 나타난다.

종교현상에는, 사회제도적으로 표층적인 의미세계와 함계, 그 배후에 심층적인 의미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오토의 종교론이 시사하는, 종교에의 입체적인 시야를 통해서, 종교는 일상언어적인 의미연쇄와 함꼐, 일상언어적인 의식의 기저에 숨겨진 의미연쇄의 깊이로부터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하는 종교의 의미론적 접근은 현대의 종교학에 있어서 불가결한 방법론적인 시야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종교연구에 있어서 자기이해와 타자이해

-현상학과 해석학의 교차-

 

타나츠구 마사카즈(棚次正和)

 

 

종교현상학은 훗설 현상학의 방법이나 기본개념을 해석을 통해서수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현상학적인 인식구도 무엇인가가 누군가에게 현상한다에 대해서, 대상이 되는 현상은 현상 안에 본질이 나타난다고 하는 자기능여의 근본전제 위에, 인식상의 변환은 누군가의 측에서 찾아진다. 에포케, 현상학적 환원, 통틀어서 현상학적 태도라고 칭해져 온 인식조작은 이런 종류의 의식전환에 관련 된 것이다. 자연적 태도에서 전제되고 있는 여러 대상이나 세계를 괄호에 넣고, 소박한 위치에서 에포케를 행하는 환원의 결과, 남은 순수의식의 지향성을 현상학적 반성은 분석하게 되지만, 이 현상학적 조작이 종교현상학에서는 변질된다. 에포케는 가치판단정지가 되고, 형상적 환원도 본질직관을 자명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언가의 현상을 성스러운 것의 현현으로 보고 그 현상양식이나 구조를 적출하는 동안에는, 의식변환을 거친 본질직관이 불가결하게 될 터이다. 본질이라는 것은 현실의 여러 사실을 넘어선 이념에 다름없다.

해석학적인 인식구도 무언가를 누군가가 해석한다에 대해서는, ‘무언가는 언표되는 한편으로, 언표이전의 상징으로서 시현된다. 소원한 무언가누군가의 사이에는 단절이 있고, ‘누군가는 자기의 인식틀을 바탕으로 자기이입이나 추체험에 의해 무언가를 파악하려고 한다. 그 사이에 필요해지는 것이, 상징이나 이미지이다. 해석자는 여기에서 반드시 개념적으로는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는 인식영역에 이끌려, 의미작용과 의미대상의 결합이 자연스러운 상징을 지레삼아 주관(이나 공동주관)을 뛰어넘은 보편적인 인식영역으로 이끌린다. 종교적 상징은 일상적 경험에서는 자명하지 않은 실재양태를 다의적 역설적으로 드러내면서, 이질적인 실재를 하나의 전체로 통합하는 시점을 여는 것이다. 원래 할부(割符)’의 상징에는 안과 밖, 위와 아래, 자신과 타자와 같은 분열된 세계를 하나로 묶는 역할이 있다. 해석학의 어원 헤르메스의 기본신격은 타계와 현계의 매개에 있으나, 그것은 이미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을 묶는 해석학적 영위를 이미 암시하고 있다.

자기이해의 깊이를, 자기가 자기를 보는 주객관계가 또 하나 겹쳐서 자기화한 인식경위가 출현하는 것으로 포착한다면, 자기를 보는 자기에게 또 하나의 자기가 겹쳐지는 사태가 나타난다. 배우는 무대에서 역할을 연기하는 중에 역할과 완전히 하나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분열이 커져 가고, 허실의 사이에서 배우는 역할을 연기한다. 마찬가지로, ‘보는 자기에게는 배후에 딱 들어맞는 보는 자기를 모고 있는 자기가 붙어, 보는 자기가 자승화(自乘化)한다. 그 자기이해 속에서, 타자는 자기에게 이중으로 현존한다. 마르셀의 지적에서는 들판에서 꺾은 꽃을 어머니에게 보이는 아이가 이것을 꺾은 것은 나야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할 때, “나야라고 하는 표현은, 주목이나 칭찬을 불러모으는 동시에, 다른 누구도 아닌 라고 하는 배타성을 담고 있다. ‘자기는 이와 같이 현존하는 타자에게 있어서의 타자인 것이지만, 현상학적인 타자이해에서는 자기 안에서의 타자라고 하는 성격이 남아, 타자나 상호주관성은 큰 수수께끼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 해석학적 행위에서는, 다른 문화나 타자에게 직면하면서 타자이해를 향하는 이 자신은 누군가라고 하는 물음이 나타나, ‘타자 안의 자기를 보기 시작하는 작업 속에서 소원한 타자와의 공통성을 발견하는 일이 된다. 이런 깊이 있는 인식구조를 간직한 인간이 서로 엮이는 인생모양은, 사고나 행위의 인과관계의 총계로서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자기이해나 타자이해가 종교연구의 숨겨진 주제라는 것은, 종교현상이 우주나 인간의 죽음과 재생에 관련되는 현상으로서 이간적 실재를 휩쓸어 가는 것 같은 근원성이 있는 이상, 당연한 일이다. 현상학적인 자기이해는 타자에게 직면하고, 해석학적인 타자이해는 오히려 자기에게 회귀한다. 위에서 서술한 것과 같은 인식지평에 서서 드러나는 것은, 자기와 타자에게 공통된 인식론적 기반이나 존재론적 기반에 대한 확신이다. 그 공통의 근저(보편성)의 극점에서,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자양의 특수성을 넘어서, 유일무이의 개체와 개체가 대등하게 교류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학으로서의 종교연구를 향해서

 

소노다 미노루(薗田 稔)

 

들어가며 종교학을 선택한 개인적 이유

인간에게 있어서의 종교에게 흥미, 종교 그 자체에는 흥미 없음.

 

1. ‘종교학의 아이덴티티

인간의 행위로서의 종교라고 하는 관점(모시모토 히데오 岸本 英夫)

비교연구 Patterns in Comparative Religion (M. Eliade)

무엇보다도 종교현상학 (phenomenological epoché) ‘< >에 넣는다

 

2. 종교를 < >에 넣는다: 극도로 주관적 현실의 세계

주관에 서서 나타나는 현상의 reality (현실성, 진실성)의 문제

현실의 다양성(multiple realities/ daily & other realities) A. Schutz

종교적 현실의 간주관적 구성 (inter0subjectivity of religious reality)

 

trust = play = faith

ritual

plausilility play-faith

(cosmology)

(P. L. Berger) (D. Miller)

신앙의례종교

 

3. 생명론에의 현상학적 접근

현대의 원신빙(原信憑) life without death ‘죽음을 결여한 생명

현상학적 환원 life against death ‘죽음이 있기에 생명

종교자의 과제 life with death ‘삶과 죽음이 있어서의 생명

ex) “Man can conceive of his own death” (G. M. Vernon)

“There is no way to avoid murder, except by ritual murder” (Norman O. Brown)

 

맺음말 종교를 배우는 일에서 실천하는 일로 건너가기

 

주관적 현실에 주관이 다가온다고 하는 현상학의 수법에 가능성은 없는가. (객관을 갖춘 심리학이나 사회학에는 기대를 할 수 없다)

 

 

 

 

패널의 주장과 결론

 

하나조노 토시마로(華園 聡麿)

 

종교현상학의 가능성을 논의하는 경우, 역사를 되돌아보고, 종교현상학을 입장 내지 방법으로서 채용한 연구분야에 대해, 그 공헌과 문제점을 확인하는 일이 불가결한 수순이 된다. 이번의 패널에서는 이 점에 관한 논의는 충분이 할 수 없었지만, 카나이 신지는 종교현상학을 종교학고유의 방법이라고 보는 관점에서, 특히 반 델 레우나 엘리아데의 종교현상학의 정태론적인 성격을 비판하고, 종교의 역사에 있어서 동태를 파악하는 역사적 구조론을 제창하여, 전자를 보완하는 방향성을 타진했다. 블레이커의 현상학에 착안한 것이지만, 베버의 합리화 모델 등도 참고하고 있다. , 역사적 구조라고 하는 개념에는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나왔다.

타나츠구 마사카즈는 종교현상학이 훗설 현상학을 해석을 통하여 수용한결과로서 변질이 생겼다고 보지만, 그러나 그에 의해 종교현상학이 획득한 독자의 방법적 전략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의해 본질직관의 본래의 작용을 놓쳐버렸다고 한다. 타니츠구가 이해하는 본질직관은, 자연적 태도를 에포케하여 현실의 여러 사실을 뛰어넘은 이념에 도달하는 지적 행위이고, 관조나 관상 또는 지관 등과 겹치는 금욕적인 이라고 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이것을 종교의 현상학에서 추구하는 것은 논의의 역지가 있을 터이다.

비교연구나 유형론적 연구에 대해 오토의 성스러운 것의 개념이 준 영향은 컸지만, 사와이 요시츠구는, 종교에의 의미론적 접근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누미노제와 성스러운 것을 의미의 이중성으로서 다시 파악하고, 오토가 양자의 통로로서 이데오그람(해석기호)의 역할을 논한 것을 중시한다. 사와이에 의하면 종교를 일상적인 의미연쇄에서 실증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함께, 종교현상학에 의해 인간존재의 삶의 깊이의 차원)에 있어써의 의미연쇄로서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종교의 세계가 이중의 의미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견해는, 이념과 현실의 이중의 의미영역을 보는 타나츠구의 인식구조에 통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종교현상학의 가능성을 슛츠의 현상학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려고 하는 소노다가 구체적으로 고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일본의 마츠리의 집단적, 집합적인 구성계기이다. 더욱이, 타나츠구가 이념의 영역을 3의 나라로 위치지어, 사와이가 삶의 깊이의 차원에 종교의 의미의 세계를 정위한 것을 연결시키면, ‘인간의 행위로서의 종교라고 하는 견해를 모시모토히데오에게 배웠다고 하는 소노다는 극히 주관적 현상의 세계를 어디에서 보려고 하는 것인가, 흥미 깊은 문제다.

종교현상학이라는 이름으로 종교현상의 비교를 시도한 연구 속에는 비교를 서두른 나무지, 현상의 역사적, 사회적 또는 문화적인 맥락을 무시하였다고 비판되는 것이 있었다. 카네이는 대상을 한정하여, ‘구원론의 유형사적 비교를 제안하고, 이것을 역사적 종교현상학이라고 부르고 있다. 유대 그리스도교적 유신론을 배경으로 가지는 오토의 여러 개념을, 예를 들면 인도의 종교에 적용한 경우에 저어함이 생기지 않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사와이는 샹카라 연구를 예로 들어 저어를 인정했다. 비교연구의 어려움의 실례이지만, 그러나 그 오토가 주의한 것과 같이, 비교는 유사한 것만이 아니라, 차이를 발견하는 것에도 의의가 있는 것이다. 현상학에서 보면, 유사와 차이가 분별되기 위한 이해의 지평의 구축이야말로 중요하며, 새삼 지향성의 개념을, 그것도 간주관성이라고 하는 기본 구조를 염두에 두고, 엄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