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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잡담

종교인은 희생하지 않는다

[사설]“종교 지배층은 있어도 지도자는 없다” (경향일보 2015. 5. 1.)


얼마 전 모처럼 중앙일간지에 실렸던 종교관련 사설이다. 하지만 몇 번을 찬찬히 읽어 봐도 딱히 영양가 있는 코멘트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만큼 심심한 글이다.

한편으로 언론에서 종교를 보는 시각이 얼마나 천편일률적인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는 하다. 요지는 '성직자의 권위주의를 버리고 종교의 권위를 회복하자'는 것 정도다. 사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종교적 권위가 공감·실천·희생을 통해 얻어진다는 말은 상식에 속한다. 그게 곧 종교의 핵심 가르침이며 종교 지도자에게 주어진 사명이기도 하다."

이것은 '종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대다. 그리고 현실의 제도종교와 종교전문인들은 꽤 자주 이 기대를 배반한다. 예언자적 실천이나 이타적 희생은 종교현상들 속에서도 예외적인 사건들이다.

도덕적 덕목들 또한 결코 "종교의 핵심 가르침" 같은 게 아니다. 많은 경우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실제' 종교의 가르침은 의례나 규정의 차질 없는 수행에 집중되어 있다. 일요일에는 꼭 교회에 가야 한다거나 승려는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등의 것이다. 흔히 말하는 "종교는 모두 착하게 살라고 한다"는 그래서 공허해 보인다. 소득의 10분의 1을 교회에 납부하는 것이나 사제가 섹스를 하지 않는 것 등은 아무리 봐도 "착하게 사는 것"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어 보인다.

이런 규정들을 통해 달성하려는 제도종교의 1차적 목표는 제도 그 자체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권위'나 '종교지도자의 권위'는 그 자체로 수단이자 목적이 된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성직자들이 어려운 이들을 보듬는 일에 적극 나서고,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는 일에도 앞장서 종교적 권위를 다시 확고히 세울 때다"라는 결론은 어찌나 공허한가. 종교조직 내에서의 권위주의를 포기함으로써 종교인의 사회에서의 권위를 강화하라는 주문인 셈이다. 좋은 제언이다. 그러나 먹힐 거 같지는 않다.

종교전문인이 추구하는 권위는 기본적으로 조직 내에서의 권위다. 종교적 권위의 승인은 그곳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각 종교인의 대사회적 영향력 또한 종교 내에서의 권위와 비례한다. 대주교나 총무원장의 발언은 젊고 열정적인 승려나 사제의 실천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는다.

우리는 운좋게 진보적인 대형교회 목사나 파격적인 교황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드물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특정한 제도종교 자체가 예언자적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나 '불교' 등에 대고 사회정의를 실천하고 약자의 편에 서라고 요청하는 것은 초점을 벗어난 것이다. 사실 제도종교는 정의롭지 못한 일에 침묵하고 강자에게 빌붙는 편이 유지하고 성장하는 데 유리하다. '권위있는 종교'가 목표인 한, 종교는 결코 정의의 편에 서지 않는다.

확실히 종교 담론에는 변혁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런 측면들은 상당부분 반제도적 실천의 국면에서 부각된다. '정의로운 종교인'을 찾는다면 파계승과 이단자들에게서 기대하는 편이 낫다. 종교의 '위신'을 지키려는 사람들 말고.


2015. 5. 4. 페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