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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잡담

육군의 성소수자 색출작전을 보며

흔히 종교가 윤리나 도덕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이야기하곤 하지만, 종교 그 자체는 특정한 윤리적 주장을 하지 않는다. 종교적인 이데올로기는 단지 사람들이 선호하는 미적, 윤리적 기준을 특별하고 신성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신들이 혐오하는 것이 있으면, 신도 그것을 싫어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불행히도 오랜된 종교전통에는 수백, 수천 년 동안 쌓인 경전이나 교리 모음이 있어서, 이 중에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구절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그에 반대되는 구절들은 그냥 언급하지 않으면 된다.)

군형법 92조 6항은 그 자체로도 후지고 야만적인 조항이지만, 이번처럼 무리하게 적용한 것은 참모총장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결과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의 개인적인 종교적 신념이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현행 헌법은 개인의 종교적 지향 때문에 차별받는 것에 대해서는 금지하고 있지만, 권력을 가진 이가 자신의 종교적 지향을 이유로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지 않다. 바로 이 허점을 통해 근본주의자들은 권력과 자본, 지위를 획득하고, 그를 통해 신나게 차별을 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반대 논리 중의 하나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거라 한다. 이것은 자신들의 신앙이 차별의 종교임을 자백하는 것이다. 서두에 말했듯이, 종교 그 자체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 차별하고 싶은 사람들이 종교를 끌어다 쓴다.

따라서 장준규 같은 짓을 막기 위해서는 두 가지 경로의 비판이 모두 필요하다. 하나는 인권이나 평등과 같은 공공적 가치를 통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근본주의, 원리주의 종교들은 이런 세속적 가치들을 폄하하기 위한 논리들을 갖추곤 한다. 이를테면 자기들은 "신본주의"를 숭상하기 때문에, "인본주의"에 반대한다는 식이다. 그쪽 진영에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터무니없는 소리지만, 놀랍게도 우리의 관용적인 체제는 그런 사상이나 표현의 자유마저 허용하고 있다.

그래서 두 번째 경로의 비판이 필요한데, 그건 종교전통 내에서 나온다. 한 예로, 기독교 근본주의의 가장 큰 적은 예수다. 예수는 차별과 혐오에 맞서 싸우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전통 내에 포함되어 있는 히브리성서의 문헌들 상당부분 역시 체제에 포섭되지 않은 이방인과 체제 내에서 억압받는 자들에 대한 지지를 표함하고 있다.

첫 번째 경로는 혐오의 신앙화 자체를 막지는 못한다. 그러나 혐오의 실천을 막는 법제화는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 경로는 혐오의 신앙화 자체를 무너트린다. 그래서 기독교 호모포비아에 대한 반대 담론은 좀 더 "종교적"이어도 된다.

이것은 율법서나 바울서신 등에 찔끔찔끔 나오는 남성 동성섹스 반대 규정에 대한 "신학적"인 반론 논리를 만들어라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 그런 변명은 오히려 그 구절들의 신성함을 강화시킨다.) 그보다는 예수가 대체 뭐 하다가 잡혀 죽었는지, 힘을 가졌다고 다른 이들을 막 대하는 것들에 대해서 신이 예언자들을 통해 뭐라고 했는지를 끊임없이 떠들 필요가 있다. 떠들고 떠들고 떠들어서 차별과 혐오에 반대하는 것이 그리스도교가 되면, 차별과 혐오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아니게 된다.

나는 그런 점에서 종교적 담론이나 헤게모니 싸움이 각각의 제도종교 밖으로 나와서 공론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의 종교에 관심 안 갖고, 공론의 장에서 종교 얘기 안 하는 것은 종교가 개인의 내적 신앙으로 머물고 있을 때에나 가당한 일이다. 실제로 엄한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괴롭히는 일이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다면, 대체 그 종교가 뭐하자고 하는 건지 사회가 함께 들여다 보아야 한다.

종교는 개인의 신념이니까 내버려 두자고 하면 온갖 폭력들이 다 이렇게 정당화되어 버린다. 반면, 종교적인 것 일반을 모두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몰아서 박멸해 버리자는 논리도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 두 가지 접근은 모두 공론의 장에서 종교적 담론과 실천을 깊이 있게 다루지 못 하게 한다. 그러니까 종교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이, 더 널리 공유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 성소수자를 열심히 두들겨 패고 있는 저 폭력의 십자가가 다음 번엔 이주자(이미 반이슬람 떡밥을 열심히 뿌리고 있다), 여성(사실 이미 패고 있다), 그 밖의 수많은 "만만한" 이들을 향할 것이다.


(2017. 5. 26. 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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