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숙제처럼 생각하고 있던 의문이 있다. 주로 보수 개신교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인본주의"의 반대말로서의) "신본주의"라는 용어가 대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 말은 목사들의 설교에서나 일상 용어에서 세속문화나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근본주의적 세계관을 옹호하는 표현으로 즐겨 사용된다. 신본주의-인본주의라고 하면 운율이 잘 맞는 것 같지만, 사실 "인문주의"라고도 번역되는 humanism에 대응되는, 신을 중심 또는 우선으로 삼는 사상이라는 서구어 단어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최근에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먼저 한국에서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30년대 즈음으로 보인다. 1930년 10월 5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경성에서 이루어지는 종교 강연들에 대한 광고 기사가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라는 제목이 있다. 내가 찾은 바로는 이게 "신본주의"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최초의 한국어 기록이다. 의외로 이것은 기독교측 강연이 아니라 불교 포교사인 김태흡의 강연이었다. 강연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신본주의/인본주의 구분의 기원이 기독교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편 르네상스 이후의 휴머니즘(인본주의 혹은 인문주의)에 대조되는 의미로서의 기독교 신본주의라는 관념은 1932년에 동아일보에 연재된 한정옥(韓廷玉)의 "신과 인간생활"이라는 소논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인물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아보지 못했지만, 같은 해 동아일보에 신학자 정경옥(鄭景玉)의 반론("한정옥씨의 신즉사회체론에 대한 일고")이 실리면서 (아마도) 조선 최초의 종교학 논쟁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사회주의자인 한정옥은 신본주의 -> 자본주의(=개인주의, 자유주의) -> 사회주의의 역사발전론을 제시하면서,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사회에 살면서 신본주의에 머물러 있는 것은 퇴행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비슷한 논법은 1937년 동아일보에 실린 이석(李石)의 "문화학으로 본 문학의 체계적인 제형태"에서도 보인다. 이 칼럼의 문학사 서술에서도 "신본주의"는 중세, 가톨릭, 봉건주의 등과 연결되며, 개인주의, 근대, 르네상스, 자본주의 등과는 대치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한국 사상사에서 신본주의/인본주의의 대립을 가장 지속적으로 이야기한 이는 소설가 김동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동리는 1940년대 이후의 작품과 평론들에서부터 "신본주의에 의한 타락과 인본주의에 의한 구원"이라는 테마를 반복적으로 제시하였고, 1950년대부터 이미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주제는 말년의 인터뷰들에서도 핵심적으로 나타난다.
이런 사례들에서 눈에 띄는 것은 신본주의란 중세적인 것, 봉건적인 것으로서 어디까지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부 맥락에서는 가톨릭은 신본주의,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는 인본주의라는 식의 대비도 나타난다. 반면 긍정적인 의미, 즉 세속주의에 물들지 않은 근본주의적 (개신교) 신앙이라는 의미에서의 신본주의는 1980년대 이후의 신학 논문들에서야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를테면 1984년에 발표된 한철하의 "신학교육과 신본주의"라는 논문에서는 바알 신앙에 맞서 싸운 예언자 엘리야의 활동을 "신본주의 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신본주의를 "하나님의 존재를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으로 보는 우주관, 인생관"으로 "성경 전체를 통하여 일관하는 정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신본주의는 르네상스 이후의 인본주의와 대립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이 인본주의는 이기주의와 동일시되며, 신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바알신앙, 기복신앙, 자유주의 신학 등과 연결된다. 오늘날 통용되는 보수 개신교적 의미의 신본주의에 대단히 가까운 용법이다.
흥미로운 점은 신본주의의 이런 "개신교적 용법"의 가장 이른 사례 중의 하나가 통일교 창시자인 문선명에게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1981년에 통일교가 주최한 제10차 국제과학통일회의의 기조연설에서 문선명은 세계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인본주의를 떠나 새 신본주의에 의한 새로운 종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내가 찾은 자료 가운데 "인본주의에 대한 부정적 언급과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신본주의"라는 테마는 이게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또 하나의 의문은 "신본주의"라는 단어가 번역어인가, 아니면 동아시아 내지 한국에서 만들어진 말인가 하는 것이다. 의미상 가장 가까운 영단어로 Theocentricism(신중심주의)이 있지만, 이것은 humanism이 아니라 Anthropocentrism(인간중심주의)의 대응어이다. 앞서 한국어 자료들에서 흔히 보이는 "르네상스 이후의 인본주의가 신본주의를 대체했다"는 식의 논법이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신학에서의 용법 또한 삼위일체 가운데 성부(신)을 예수나 성령보다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사상이나, (인간중심적 자연착취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현대의 생태신학과 연결된다. 결코 "인간의 자유보다 하나님의 권세(그러니까 교회)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식의 사상이 아니다.
신본주의-인본주의의 쌍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910-20년대 일본의 문헌들로 보인다. 그러나 그 용례는 상당히 다양했다. 교부시대 그리스와 로마 신학의 차이를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로 설명하기도 하고, "옛 신학은 신본주의, 새로운 신학은 인본주의"라는 식의 표현도 있다. 꼭 기독교 맥락만이 아니라 신토학(神道學)을 다루는 글에서 신본주의나 인본주의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한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 불교 포교사가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를 논했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현대의 일본 문헌에서 이런 표현을 찾기는 쉽지 않다. (심지어는 웹에서도!)
한편 중국 문헌들에서는 "신본주의"라는 단어가 오늘날까지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사실 "신본주의"라는 단어가 사전에 등재된 것은 한중일 중에서 중국이 유일하다. 이건 어느쪽이냐면 앞에서 이야기한 한정옥의 사회주의적 역사발전론에 가까운 용법이다. 이를테면 역사는 물본주의(物本主義)에서 신본주의(神本主義), 마침내 인본주의(人本主義)로 발전했다거나, 혹은 중국 고대 상-주교체기는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이행한 시대였다는 등의 이야기다. 물론 여기에서도 신본주의란 과거의 유물, 혹은 지나간 역사 단계일 뿐이며 딱히 긍정적인 의미는 없다. 이를테면 "서양의 신본주의, 공자의 인본주의" 같은 대립도 보인다. 어쨌든 신본주의란 착한 사회주의자가 가까이 할 것이 못된다. 물론 학술문헌의 범주를 떠나면, 바이두의 질문란(한국의 네이버 지식인 같은 것)에서 "신본주의가 무슨 뜻이냐"는 질문에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형제님"이라는 식의 답이 달리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아무래도 (어쩌면 한국인인) 선교사의 손길이 느껴진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국의 보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본주의"란 토착적인 개념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진다. 물론 그 단어 자체는 20세기 초에도 있었고,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지만 이처럼 철저하게 "근본주의화"한 용법은 1980년대 이후 한국 개신교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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