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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잡담

공(空)과 식(識)의 이중운동

프랑스철학 수업에서 쓴 글.


<사진출처>



들어가는 글


 종교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철학 강의를 듣고 있는 학생으로서 구조주의를 접하고부터 나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구조주의 언어학에 의하면 언어는 엄격한 구조적 형식을 가지고 있다. 한편 라캉에 따르면 무의식 역시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또한 레비스트로스는 사회적 관계, 문화적 관계, 언어적 관계가 구조적으로 같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렇다면 사회, 문화,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 종교 역시 언어학적 방법으로 연구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에 대해서는 이미 몇 가지 시도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신화연구와 비교종교학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를 내재하고 있으며 모든 수준에 공통된 논리적 구조로 보았다. 또한 에드문드 리치는 일상적인 논리와 신화논리를 구분하고 있다. 일상의 논리표현은 물리적 현실에 관계되고, 종교적 진술은 형이상학적인 현실에 관계되는 의미이다. 그러나 종교적 표현의 비논리성도 그것 자체가 ‘코드의 일부’이며, 그러한 표현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를 지시하고 있다.1) 신화는 코드를 통해 의미를 얻는 것이다.

 또한 비교종교학에는 종교의 ‘통시언어학’과 ‘공시언어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존재한다. 진화론적 비교는 비교종교학의 통시언어학이다. 그것은 종교가 시간의 변화에 따라 변화해 가는 양상을 다룬다. 한편 현상학적 비교방법은 비교종교학의 ‘공시언어학’이다. 이 방법은 성(聖)과 속(俗), 깨끗함과 더러움과 같은 인간경험의 두 가지 양식으로부터 시작한다. 또한 이와 같은 차이는 서로의 관계, 즉 차이를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즉, 성과 속이라는 무의식적 구조에서 랑그에 해당하는 특정한 전통이 등장하고, 개별적인 현상이나 텍스트를 빠롤에 대응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현상학이 구조주의와 대립되는 데 비해, 종교현상학은 구조주의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들은 구조주의가 가지는 일반적인 한계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구조인류학적 방법은 종교를 닫힌 구조로 파악하고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논리에서 나타나는 차이관계를 이항대립적 관계로 환원했다. 이와 같은 시각으로는 유교 전통의 “無極而太極”도 읽어낼 수 없고, 불교전통의 “色卽是空, 空卽是色”또 이해할 수 없으며, 기독교 전통의 성육신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또한 비교종교학에 구조주의적 방법을 적용할 경우 종교의 역사성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무의식이나 언어와는 달리 역사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곤란한 종교 연구에 있어 이것은 치명적이다.

 문제의 근원은 이와 같은 방법들이 구조주의의 제한된 형태, 이항대립적 차이만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는 실재가 구조에 침투하는 것(그것을 계시라고 부르든, 깨달음이라고 부르든)에 대한 경험이다. 종교는 구조의 안과 밖 사이에서 성립한다. 그렇다면 종교 안의 두 요소인 경직된 도그마와 개체성마저 뛰어넘는 자유의 체험은 구조의 수축-이완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도그마의 구조와 성현(hierophany)


 근대적인 종교학은 그리스도교권인 서구에서 발생한 학문이다. 그러므로 서구인들에게 있어서 다른 종교를 연구한다는 것은 일종의 거울놀이였다. 종교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막스 베버의 “하나만을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라는 선언은, 다시 말하면 “남을 아는 것은 나를 알기 위한 것이다”라는 말과 마찬가지다. 그는 아리아 종교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가장 이상적이고 근원적인 종교인 ‘자연종교(natural religion)’를 발견하였다. 이것은 이상적인 거울상으로서 언어적인 제도화를 통해 죽음의 길로 나아가는 제도종교와 구분된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무한에의 인식이 인간의 도덕적인 특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양상으로 표명된 것이다” 조금 더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실재에 대한 경험이 언어의 세계 속으로 침투한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2)

 이러한 종교학적인 발견과 더불어 제국주의적 전략의 일환으로 비서구사회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선교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타자의 종교에 대한 심층적 만남의 계기가 되었는데, 서구인에게 있어서 그 만남은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비서구 지역의 종교들은 분명히 서구의 그리스도교와는 다른 것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닮았고, 때로는 더욱 높은 차원의 것을 보이기까지 하였다.

 여기에 대한 여러 가지 신학적 반응이 나타났다. 하나는 다원주의(Pluralism)다. 이것은 모든 종교의 배후에 하나의 실재가 존재하나 역사와 문화의 특수성 때문에 여러 종교가 생겼다는 주장이다. 여기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것이 배타주의(Particularism)였다. 주로 보수적인 근본주의적 개신교에서 견지하고 있는 이 관점에서는 그리스도교 도그마의 절대성을 주장하고, 타종교를 개종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조금 더 절충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는 포괄주의(Inclusivism)가 있다. 이것은 주로 카톨릭과 정교회 등에서 채택하고 있는 타종교관이다. 다른 종교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동일한 은총을 경험하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세 가지 관점은 타종교를 그리스도교 도그마의 구조에서 어디에 위치시키느냐에 차이가 있다. 배타주의의 경우는 그리스도교 도그마 구조 내의 이항대립 가운데 하나에 타종교를 위치지우고 있다. 즉, 타종교는 성(聖)에 대립되는 속(俗)된 것이고, 구원에 대립되는 죄이고, 선에 대립되는 악이고, 정통에 대립되는 이단이다. 포괄주의의 경우는 타종교와 그리스도교 도그마 구조 사이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주장이다. 여기에서는 차이가 탈락되고 그리스도교와 동일한 것만이 구원의 증거로 제시된다.

 다원주의 이론은 도그마 구조 사이의 상대적, 수평적 차이를 강조한다. 이 입장에 서 있는 신학자로는 존 힉, 존 콥 등이 있다. 힉은 종교를 신 중심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세계의 여러 종교 전통에는 일반적으로 신의 두 측면이 드러나 있다. 하나는 초월적이며 경험 불가능한 신성(deitas)이며, 다른 하나는 인격적이며 경험 가능한 신(deus)이다. 이러러한 이중구조는 힌두교의 니르구나 브라흐만-사구나 브라흐만, 불교의 법신물-보신불, 화신불, 도덕경의 ‘常道’-‘可道’, 유대 신비주의의 엔 소프-성서의 신, 수피즘의 알 하크-굳어진 신 개념, 마이스터 에카르트의 신성-신 등으로 나타난다. 구원이란 개체성에 한정되는 인간의 현상태(이것은 苦다)를 극복하고 실재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힉은 이것은 ‘구원론적 구조’라고 부르며 구원론적 구조는 모든 종교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공시적 구조다.

 콥은 힉의 주장을 조금 더 급진적으로 끌고 간다. 그는 힉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종교’라고 하는 이데아에 집착함으로써, 다시 그리스도교적인 신 개념 중심으로 퇴행했다고 주장한다. 종교라고 하는 것을 하나의 개념으로 묶는 것은 사실은 서구적인 사고다. ‘한데 묶는 것’이라는 말을 어원으로 하는 ‘religion’이라고 하는 개념은 한국어에는 없다. 단지 우리가 종교적인 것이라고 ‘느끼는’ 다양한 전통, 관습, 공동체, 이야기, 가치, 운동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종교적인 것이라고 ‘느끼는가’? 종교현상학에서는 그것을 성현(聖顯, hierophany)이라고 규정한다. 성현은 곧 존재의 드러남(ontophany)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성현인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성과 속이 바로 존재의 두 양태이다. 성과 속은 차이에 의해 규정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양자는 대립하는 항이다. 그런데 성현은 이 두 가지가 공존할 때 일어난다.3)  논리적 일관성을 가지고 바라보면 이것은 모순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실재의 속성은 바로 그런 전체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의식과 삶 속에서 성과 속은 그토록 전혀 다르게 자리 지어져 있는가? 바로 여기에 구조의 수축-이완 운동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


대승불교와 원효의 화쟁론


 착각의 근원은 바로 성과 속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있다. 일반적인 종교적 언어에서 성스러운 것은 곧 실재이며, 손가락에 의해 가리킴을 받는 달이며, 도달하고자 하는 기의다. 그러나 앞에서 밝힌 것과 같이, 성과 속을 규정하는 것은 그러한 기의-기표 관계가 아니다. 성(聖)은 실재가 아니다. 성과 속은 차이를 통해서만 규정 가능하다. 즉 성과 속은 기표-기표 관계이다. 이것은 힉과 콥의 대립점이기도 한데, 힉은 ‘신’이라고 하는 기의를 전제하고 다양한 종교들을 기표로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콥은 그런 기의를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종교적’인 것에는 기표들 사이의 차이만이 존재한다. 종교가 매달리는 성스러운 것은 사실은 실재가 아니다.

 이와 같은 성스러움에 대한 일종의 비하가 함축하는 것은 종교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가장 명확하게 직시하고 있는 종교전통은 불교다. 선불교에서는 ‘분별’이 인간 문제의 근원이라고 파악한다. 이 ‘분별’은 근본교리의 ‘아집’에 해당한다. 그런데 분별이 없으면 인간의 삶은 불가능하다. 분별(차이)을 통해서만 언어가 성립할 수 있으며, 언어를 통해서만 인간은 사유형식을 구성할 수 있고,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대승불교의 중요한 두 흐름이 흘러나온다. 하나는 모든 분별을 부정하고 사물을 서로의 관계성(연기)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해, 그 너머에 있는 실재의 텅 빔(空)을 발견하고자 하는 공사상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렇듯 공한 세계를 인식하는 주관적 관념의 형식에 더 주목하는 유식(唯識)사상이다. 두 가지 흐름은 같은 형이상학적 전제를 공유하고 있지만 접근법이 다소 다르다.

 모든 것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불교적 포스트모더니즘인 공사상에 의하면 세계는 차이에 의해 분별된 연기일 뿐으로 ‘없다’고 본다. 한편 불교적 칸트주의인 유식사상은 연기와 공을 인정하지만 의식의 형식으로서의 가상세계가 ‘있다’고 본다. ‘있음’과 ‘없음’은 모순되지만 둘 다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유식사상에서도 인정하는 것은 현상적인 세계는 시뮬라끄르이며 매트릭스라는 사실이다. 단지 유식은 그 시뮬라끄르를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가상으로 보며 그것을 분석, 탐구하는 운동이다. 모두가 망상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 망상이 생산되는 우리의 의식은 어떻게 가동되는가 하는 것이다. 공의 관점은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我)는 없다. 주체도 공이다. 그러나 유식은 마치 주체가 있는 것처럼 의식주체의 가동 방식을 묻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같은 기반에서 나온 서로 다른 두 체계는 역사적으로 경쟁관계에 서게 된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 이 두 체계가 부딪힌 것은 통일신라시대로, 선종이 들어오면서 선종-교종이 양립하는 체제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공사상과 유식사상은 신라 교학의 대립지점이었다. 이 시기엔 당으로 유학을 다녀온 승려들에 의해 중국의 다양한 교파불교가 도입되고 있었다. 불교적 맥락에서 교파는 하나의 체계다. 불교의 경전들은 어찌된 일인지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서로 상반되는 가르침을 전한다. 이것은 불교의 방편설(方便設) 때문으로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듣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가르침은 다양한 방법으로, 심지어는 정반대로 얘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바로 교판(敎判)이다. 교판은 특정한 기준에 경전의 가르침을 질서화, 맥락화, 체계화 시키는 작업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판은 각 종파의 기준, 의도를 반영할 수밖에 없었고, 필연적으로 교파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부르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정리한 것이 원효의 화쟁론(和爭論)이었다. 그는 다양한 교파의 주장을 독특한 방식, 화쟁논리로 조화시켜 전체로서의 대승(大乘)을 밝혀내려고 하고 있다. 《대승기신론》이라는 경전의 해설에서 원효는 이렇게 말한다.


 (이 논은) 긍정하지 않는 바가 없고 부정하지 않는 바도 없다. 중관론과 십이문론 등에서는 모든 집착을 두루 부정하여 부수고 또 부수어 끝내 부수는 주체도 부서지는 대상도 허락하지 않으니, 이를 일컬어 내내 가기만 하고 두루 미치지는 못하는 논이라고 한다. 유가론과 섭대승론에서는 깊고 얕음의 잣대를 가지고 여러 가지 법문을 판단하되 스스로 세운 법문은 끝내 버리지 않으니 이를 일컬어 주기만 하고 빼앗지는 않는 논이라고 한다.

 …… 긍정하지 않는 것이 없으면서도 스스로 버리고, 부정하지 않는 것이 없으면서도 돌이켜 긍정한다. 돌이켜 긍정한다는 것은 부정 일변도로 가는 자도 끝에 가면 마침내 긍정에 이른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요,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주기만 하는 자도 끝까지 주고 나면 마침내 빼앗는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열어젖히는 면에서는 한없고 끝없는 온갖 뜻으로 그 종(宗)을 삼고, 오무려 합치는 면에서는 이문(二門)의 근원인 일심으로 그 요(要)를 삼는다. 이문(二門) 안에 온갖 뜻을 다 담아도 어지럽지 않고, 가없는 온갖 뜻이 일심과 하나 되어 뒤섞여 버린다. 그런 까닭에 열고 오무림에 자유롭고, 긍정과 부정에 다 장애가 없으며, 열어 놓아도 번잡하지 않고 오무려 합쳐도 협착하지 않으며, 긍정을 한다 해도 취하는 바고 없고 부정을 한다 해도 버리는 바가 없다. 《大乘起信論疏別記》)

 

 여기에는 구조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움직임과 구조를 구축하는 움직임이 대립되고, 그것을 조화시키고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대립쌍들, 즉 宗(多)-要(一心二門)와 開(열기)-合(오므리기), 立(긍정)-破(논파)와 같은 것들은 구조주의적 이항대립쌍이 아니다. 구조주의적 이항대립쌍에 해당하는 것을 원효는 二門이라고 표현한다. 이문은 열반과 진리의 차원인 진여문(眞如門)과 현실과 윤회의 차원인 생멸문(生滅門)이다. 말하자면 성과 속에 해당되는 구분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불가분이며 서로 스며들어 있는 일심(一心)이다. 열고(開) 오므리는(合) 것이 자유로워지는 경지에 이르면 둘 사이의 구분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원효는 이러한 수축-이완운동을 통해서 대승의 구조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다시 성현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원효에게 있어서 성(불교적 용어로는 출세간 혹은 眞이다)과 俗(세간)은 상호 침투하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열반을 세상 밖에 있는 초월적인 어떤 것으로 보는 것도 망상이라고 한다. 실재의 차원은 성과 속을 뛰어넘은 곳에 있다. 성과 속의 분별적 차이를 긍정하는 것은 유식이고, 그것을 논파하는 것은 공이다. 유식과 공은 구조 속으로 침투하는 실재에 대한 구조의 이중운동을 표현하고 있다. 공의 운동은 연기와 망상에 의해서 구조지어지고 예속된 주체와 대타자와의 틈을 만들고, 유식의 운동은 이러한 공의 운동이 주체에 가져오는 정체성 상실의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재적 대상을 욕망하게 한다.

 유식에서 이 실재적 대상은 청정한 식인 백정식(白淨識)이다. 유식사상은 식이 여덟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이야기한다. 표면적인 6근(안․이․비․설․신․의)은 다섯 가지 감각기관과 의식이다. 6근을 통한 인식은 온전치 못하다. 다음 층위가 제7식인 말라식(末那識)이다. 이 식은 인식의 무의식적 형식을 결정하는 식으로 밤이나 낮이나 깨어있을 때나 잠잘 때나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찾고 생각한다. 중생이 ‘나’를 집착하게 하는 것은 이 말라식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 윤회를 거듭하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베르그손적 지속의 층이 존재한다. 이것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불리우는 근본식으로, 기억이 저장되므로 장식(藏識)이라고도 하고, 생명의 씨앗이므로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한다. 전생의 업으로부터 일상의 기억까지 모든 것이 여기에 저장되고, 인식에 영향을 준다.4)

 이 식을 맑게 하는 것이 바로 성불이다. ‘식을 맑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유식에서는 인식에 삼성(三性)이 있다고 한다. ‘변계소집성’은 집착과 분별의식에 근거해 세상을 보는 것이고, ‘의타기성’은 다른 것에 의지해 생겨난 연기적 존재로 세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원성실성’은 본질에 근거한 식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경지이다. 이것은 라캉적인 분리를 암시하고 있다. 실존적인 욕망, 해탈을 지향하는 욕망은 대타자에 의해서 대상이 지정되지 않은 욕망인 것이다. 혼탁한 식은 단단하고 수축된 구조다. 여기에서는 분별심과 아집, 중생심, 일상적 속(俗)이 새어나온다. 그러나 공에 가까운 청정한 식을 통해서는 열반의 희열과 불성이 분비되어 나온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세간과 출세간, 성과 속은 하나가 된다. 공의 운동 속에서 중생과 부처가 하나라는 인식도 나오고, 속 속에서 성이 드러나는 성현도 일어난다. 그러나 공의 운동은 아무것도 잡을 것이 없게 만들어 불안을 일으킨다. 그래서 일어나는 2차적 과정이 바로 식의 운동이다. 착각과 망상을 일으켰던 식은 공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롭게 재구성된다. 그리고 이 재구성된 구조는 다시 공의 운동을 부른다. 이 리듬이 바로 삶의 두 측면이다. 공의 탈근대적 운동과 유식의 근대적 운동은 하나의 움직이는 구조, 대승의 구조를 움직이는 수축-이완운동이다.



나가는 글


 이 글은 종교에 대한 기존의 구조적 연구가 보여준 한계지점에 대한 지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초기의 구조주의가 다루는 과학적 차이는 환상, 중간대상, 실재적 대상을 다루는 종교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여기에서는 조금 다른 범주를 설정해 보았다. 그것은 성과 속의 차이가 아니라, 성-속과 성현의 구조적 차이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종교에는 확실히 성-속, 정-부정과 같은 이항대립적 차이를 단단하게 유지하는 도그마적 구조의 측면이 있다. 한편 근본적으로 우리가 ‘종교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이항의 경계에 있는 중간적 대상들이다. 그러한 대상의 발견을 여기서는 종교현상학의 용어를 빌려 성현이라고 표현하였다.

 종교의 이런 두 구조적 측면을 잘 대변해 주는 것이 대승불교사상의 두 기둥인 유식사상과 공사상이었다. 유식은 성-속을 구분하게 하는 의식의 메커니즘을 밝혀주고, 공은 그 분별이 사라지는 지점에서 어떻게 성현이 일어나는지를 밝혀준다. 이 두 가지는 원효의 화쟁논리를 통해 하나의 구조로 포섭된다. 유식과 공은 대승, 또는 일심이라고 하는 구조의 두 운동양상이다.

 여기에서는 종교에서 나타나는 구조의 개방성을 주로 대승불교사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수축-이완운동이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종교적인 의례나 축제다. 의례적 정-부정이 매우 중시되고 성스러움과 속됨의 구분도 엄밀한 종교의 의례가 광적인 열광과 난교로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다. 해체와 구축, 파괴와 창조, 죽음과 부활의 반복은 종교사 전체를 이끌어가는 동력이다. 구조주의적인 방법으로 종교를 살펴보는 것은 바로 이 유목적인 반복 운동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1) 에드문드 리치, 구본인 옮김, 『문화와 커뮤니케이션 -구조인류학 입문-』, 파란나라, 1991, pp.111-114

2) 에릭 샤프, 윤이흠․윤원철 옮김, 『종교학 -그 연구의 역사- 』, 한울아카데미, 1986, pp.57-70

3) 정진홍, 『M.엘리아데 -종교와 신화-』, 살림, 2003, pp.27-32

4) 김승혜․서종범․길희성, 『선불교와 그리스도교』, 바오로딸, 1996, pp.90-108

 

 


<참고자료>

김상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현대 프랑스 철학의 쟁점』, 창작과 비평사, 2002

김승혜․서종범․길희성, 『선불교와 그리스도교』, 바오로딸, 1996

나카자와 신이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물신숭배의 허구와 대안』, 동아시아, 2004

에드문드 리치, 구본인 옮김, 『문화와 커뮤니케이션 -구조인류학 입문-』, 파란나라, 1991

에릭 샤프, 윤이흠․윤원철 옮김, 『종교학 -그 연구의 역사- 』, 한울아카데미, 1986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그린비, 2005

정진홍, 『M.엘리아데 -종교와 신화-』, 살림, 2003

Alister E. McGrath, The Christian Theology Reader, Blackwell Publishers,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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