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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잡담

정신분석과 의례구조

2006년, 독립과제연구에서 지라르와 프로이트를 읽고 쓴 글.





들어가는 글


 말년의 프로이트의 가장 큰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종교였다. 그는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 『토템과 터부』 등의 저서에서 반복적인 강박신경증과 종교 사이의 관련성을 고찰하였다. 강박신경증 환자들이 보이는 의례적인 행위는 본질상 종교적 의례 행위와 동일하다. 태초에 아버지를 살해한 형제들은 살해 직후의 죄의식 때문에 아버지와 동일시된 토템 동물을 죽이거나 먹지 않는 규정을 세운다. 그러나 이런 엄격한 규정은 의례적으로 반복되는 토템 동물 살해 속에서 일시적으로 해제된다. 『토템과 터부』에서 재구성된 이와 같은 종교의 기원은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에 적용된다. 살해된 모세의 종교는 유대인들의 은폐 로 구비 전승 속에 남아 있다가 훗날 유일신교로서 부활한다. 이와 같은 종교현상이 강박신경증의 구조인 ‘초기의 심적 외상―방어―잠복―신경증의 발병―억압당하고 있던 것들의 부분적인 회귀’1)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통찰이다. 인간의 종교 행태는 다양하지만 어느 문화권에서나 공통적인 것은 정기적인 의례를 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례를 통해서 공동체가 유지되고, 규범이 만들어진다. 이것은 세속화된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대 한국인들은 학교(남성들의 경우는 군대)를 나오는 것을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과 동일시한다. 학교와 군대가 고대적인 통과의례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제사, 성만찬과 같은 희생제의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으며, 조금 형태를 바꾼 국가의례 역시 이러한 제의구조의 세속적 변형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적인 종교 분석이 이러한 모든 의례를 설명할 수 있는가? 의례가 무의식적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토템과 터부의 분석만으로는 다양한 의례 현상을 모두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라캉의 욕망의 그래프를 통해 보면 이런 통과의례와 희생제의의 자리가 어디인지가 분명해진다. 이 차원에서 의례는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주체를 완전하고 규범화된 세계-I(A)를 이끌어주는 작업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보면, 종교가 사회를 하나의 규범 체계로 묶는 역할을 한다는 뒤르껨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 글의 첫 번째 목적은 욕망의 그래프에서 의례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것이다.

 이 글의 두 번째 목적은 앞의 논의를 조금 넘어서는 곳에 있다. 의례는 어떤 경우에는 세계를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균열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오히려 최초의 의례는 세계의 불완전함을 폭로하고,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시스템을 붕괴시킨다. 또한 이러한 붕괴가 있은 다음에야 세계는 질서 잡힌 것으로 경험되고, 또한 반복되는 의례 행위를 통해서 이런 구조는 일시적으로 풀렸다가 다시 강하게 조여진다. 어째서 똑같은 의례행위가 구조에 충격을 줘 균열시키기도 하고, 구조를 유지시키기도 하는가? 아무래도 최초의 충격과 연례적인 반복은 다른 성격을 가지는 의례 행위인 것 같다. 이 둘의 차이는 해체론적인 사고가 동원되어야 밝혀질 것이다.



두 가지 의례


 우선 수많은 의례를 두 가지 구조로 구분해 보자. 하나는 통과의례(passage rites)이고, 다른 하나는 희생제의(sacrifice)이다. 이 두 가지는 상이한 문화전통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제의의 기본 구조다. 먼저 통과의례는 주체가 질적으로 상이한 나이, 장소, 신분에 들어서기 위해서 겪어야 하는 의례를 통칭하는 말이다. 통과의례의 구조를 밝힌 민속학자인 반 게넵에 의하면 이런 의례는 기본적으로 분리-입문-귀환의 구조를 취한다.

 분리단계에서는 주체는 공동체에서 분리되고, 이것은 상징적인 죽음으로 경험된다. 입문자는 이 기간 동안 강한 터부를 지키며 쾌락을 포기해야 하며 개체성을 완전히 상실하도록 이끌린다. 이런 본능의 포기는 『쾌락 원칙을 넘어서』의 앞부분에 나오는 실패놀이의 분석을 생각나게 한다. 어머니의 상실은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어머니의 귀환이라는 즐거운 경험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예비조치이다. 따라서 이 경험을 재생하는 놀이에서는 이러한 상실과 귀환이 반복적으로 재현된다.2) 따라서 통과의례의 분리단계에서 경험되는 죽음은 새로운 존재로의 재탄생이라는 큰 즐거움을 위한 일시적인 욕망의 포기로 해석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분리 이후, 입문단계에서 존재의 질적 변화를 겪은 주체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 귀환한다. 이와 같은 구체적인 중간 과정은 잠시 잊자. 중요한 것은 특정한 의례를 겪음으로서 주체가 이전과는 질적으로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에서 성인으로, 미혼자에서 기혼자로 입문하는 경우에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어린 아이가 태어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백일이나 돌잔치를 하는 것도 아이를 상징계로 진입시키는 일종의 통과의례다. 그러나 전형적인 통과의례는 욕망의 그래프에서 소외의 선을 따라 움직이는 과정이다. 자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지시해주는 새로운 기표-A를 받아들임으로서 세계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고, 주체는 사회의 성원이 되는 것이다.

 한편 희생제의는 통과의례에 비해 훨씬 더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의례행위이다. 제의적인 희생양을 폭력적으로 살해하고, 그 고기를 의례 참여자들이 나누어 먹는 것이 가장 전형적인 희생제의의 형태이다. 프로이트의 종교 분석은 대부분 이 희생제의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희생제의에 대해서는 대단히 많은 이론적인 설명이 있다. 프로이트의 설명은 로버트슨 스미스의 ‘교제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교제설에 의하면 희생제물을 살해하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그것을 나눠먹음으로서 공동체의 구성원 사이, 공동체와 토템(나중에 신격화) 사이의 유대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또한 프레이저의 설명에 따르면, 희생제의는 모방주술의 하나로 죽었다가 새롭게 재생하는 식물들처럼, 토템 동물(신)을 죽임으로서, 새롭고 원기왕성하게 재생시키려는 시도이다.3)

 프레이저의 설명에 따르면, 희생제의는 통과의례의 한 변형인 것처럼 보인다. 자아의 생명본능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상징적 죽음을 희생양에 투사하여 대신 죽임으로써 안전하게 같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희생제의에 대한 가장 탁월한 설명 가운데 하나인 르네 지라르의 이론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희생제의는 집단 내의 폭력을 처리하는 방법이다. 지라르에 의하면, 인간은 유사 이래 모방 본능 때문에 자신과 유사하고 대체 가능한 대상에 대한 폭력의 충동에 의해 위협받아 왔다. 엄마의 품에 안긴 동생을 보는 아이는 자신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다른 아이가 있다는 것 때문에 엄청난 분노와 질투를 느낀다. 이러한 모방본능은 지라르가 짝패라고 지칭한 형제, 부자 관계에서 더욱 강렬하게 발동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갖게 되는 욕망을 모방하려는 아들의 본능적인 욕망이라는 것이다.4) 이러한 폭력은 집단의 내부에서 더욱 강력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사회는 언제나 붕괴할 위협 속에 있다. 희생제의는 이런 폭력의 방향을 돌려서 저항 불가능한 희생양에게 집중시키는 것이다. 프레이저의 희생제의 설명이 ‘투사’적이라면 지라르의 설명은 ‘전이’적이다. 때로 희생양은 사회 외부에서 선택되기도 한다. 내적인 문제를 외부의 적에게 전가하는 것은 정치의 전통적인 기술이다.

 이러한 설명들은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모방욕구라는 욕망을 무한정 향유할 수는 없다. 욕망의 충족을 위해서는 아버지, 형제, 이웃을 죽여야 하지만, 이것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욕망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상상적인 대상-a을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것으로 교체해야 하는데, 그것이 집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 희생양을 살해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뭔가 이상하다. 환상은 주체의 고유한 욕망을 마주하는 영역이다. 그러나 희생제의의 대상은 명백하게 대타자가 지정해 주고 있다. 제도화된 환상으로서의 희생제의는 주체의 고유한 욕망을 도둑질하고 말았다. 희생제의가 강력해지고 형식화되었을 때, 그것을 해체하려는 새로운 종교 운동들이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글쓰기(inscription)로서의 의례


 위에서 본 통과의례와 희생제의는 어떤 면에서는 대단히 억압적인 것으로 보인다. 통과의례는 입문자를 ‘멋진 신세계’로 이끄는 마차 역할을 하고 있고, 희생제의는 주체가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욕망마저도 교묘하게 도둑질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합리화되고 제도화된 의례가 있기 전의 의례는 결코 그렇지 않다. 체계를 유지하게 하는 의례구조가 있기 전에, 체계를 뒤흔드는 의례구조가 먼저 있었다. 이런 의례는 체계의 저편, 체계의 외부, 실재의 세계와 관여하고 있다. 이러한 의례를 글쓰기로서의, 좀 더 정확하게는 inscription으로서의 의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의례의 전범으로 지적되는 신화, 그리고 새롭게 나타나는 종교들에서 발견된다.

 통과의례는 어떤 방식으로 실재와 관여하는가? 위에서 논한 통상의 통과의례는 이항대립적인 체계의 이쪽과 저쪽을 오고가는 ‘통과’이다. 그러나 통과의례의 모델 또는 원형으로서의 신화는 그렇지 않다. 통과의례는 신화적인 영웅의 여행을 모방하는 행위이다. 통과의례의 세 단계인 분리-입문-귀환은 언어적이며 합리적이며 코스모스적인 이 세계의 바깥으로 여행하는 영웅의 여정과 일치한다. 신의 화신으로서의 영웅은 영원의 에너지가 시간성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세계의 배꼽’이다.5) 영웅은 ‘정주민의 공간’인 이 세계를 떠나 ‘사막과 스텝’을 건너며 분리된다. 그리고 ‘유목적 공간’에서 양육된 후, 귀환한다. 영웅 신화들은 이 여행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말해준다. 영웅들은 분리 과정에서 포기해 버리기도 하고, 저 세상에서 귀환하지 못하는 일도 있다. 니체는 ‘돌아오지 못한 영웅’의 전형적인 예다!

 기적적으로 이 세계로 돌아온 영웅은 세계에 탁월한 선물을 가지고 온다. 그러나 이 선물은 이 세상의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의 원래의 순수한 차이를 잃어버리고 만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 이것을 세상에 전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을 한다. 자신의 깨달음을 언어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인 《율장(律藏)》의 <대품경(大品)>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도달한 이 법은 깊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숭고하다. 단순한 사색에서 벗어나 미묘하고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집착하기 좋아하여, 아예 집착을 즐긴다. 그런 사람들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도리와 연기의 도리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또한 모든 행(行)이 고요해진 경지, 윤회의 모든 근원이 사라진 경지, 갈애(渴愛)가 다한 경지, 탐착을 떠난 경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경지 그리고 열반(涅槃)의 도리를 안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내가 비록 법을 설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만 피곤할 뿐이다.'


 이 말을 들은 범천(梵天)은 깜짝 놀란다.

 

 

'아! 세상은 멸망하는구나. 아! 세상은 소멸하고 마는구나. 여래·응공(應供)·정등각자(正等覺者)가 법을 설하지 않으신다면.'


 놀랍게도 언어로 나타낼 수 없는 가르침인데도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세상이 멸망’할 거라고 말하고 있다. 붓다는 범천의 간청을 받아들여서, 왜곡을 감수하고 이 절대 침묵, 절대 혼돈의 영역을 말의 세계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 힘이 체계에 충격을 주고, 뒤흔들어, 세계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 차이는 언어의 세계 속에서는 성-속과 같은 이항대립적 차이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바로 이와 같은 과정이 통상적 통과의례가 모방하고자 하는 글쓰기로서의 통과의례다. 모든 통과의례는 바로 이와 같은 모델을 가진다. 무당에게는 바리공주 신화가 그렇고,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의 광야행이 그렇다. 그러나 제도화된 통과의례가 소외의 선을 따르는 과정이라면, 이러한 글쓰기적 통과의례는 분리의 선을 따른다.

 또한 붓다와 예수에게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브라만 사제와 예루살렘 성전종교라는 당대의 희생제의 체제들에 대해 도전했다는 것이다. 이들 체제는 정결과 부정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희생제의를 독점하면서 사회구성원들의 욕망을 컨트롤하고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붓다는 카스트에 의한 정결과 부정의 대립을 부정하면서 깨달음의 우위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희생제의 해체를 역사상 가장 급진적으로 밀어붙인 이가 바로 예수였다. 그는 희생제의 체제의 심장부인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그곳을 파괴했고, ‘하나님’인 스스로가 희생양이 되었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는 욕망의 잉여를 착취하는 희생제의 체제에 도전한 한 젊은이가 그 체제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은 적나라하게 폭로된 대타자의 결여였다. 이 폭로는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성막이 찢어지는 특수효과를 통해 더욱 강조된다. 신과 교제하기 위한 희생제의가 신을 살해해 버렸다. 희생양이 동물이라면 이 균열은 단순히 체제를 잠시 닫았다 여는 정도의 효과만을 일으키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의 희생은 너무나 외설적이다. 또한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라는 상징은 희생물을 받아먹는 권위적인 구약의 신에 비하면 너무나 불완전하고 연민을 자아내는 존재였다. 균열되고 찢겨진 신에 대한 상징으로부터 시작함으로써, 이 종교는 비로소 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대상 앞에 있는 주체는 체제에 죽음으로 대항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실존적인 주체가 된다.

 이런 종류의 희생제의 역시 통상적인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이 역시 글쓰기적 통과의례와 같이 합리적 체계 너머에 있는 무언가가 관계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 희생제의는 통상의 것과 마찬가지로 환상이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어떻게 희생제의에 의해서 표준화되고, 착취당하는 욕망이 여기에서는 다시 주체에게 고유한 욕망으로 경험되고 있는가. 희생양은 여전히 상상적인 대상이다. 희생양이 희생양으로서 기능하려면 주체는 그 대상과 동일시되어야 한다. 주체와 유사하고 대체 가능하여 짝패로서 기능하지 못한다면 희생양으로서는 이류다. 신성시되는 토템 동물이 흔히 희생제물로 선택되는 것도, 그것이 인간과 유사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상관계론적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동일시에는 투사적 동일시와 내사적 동일시의 두 방향이 있다. 투사적 동일시는 자신의 내적 요소들을 대상에 투사해 자신과 동일시한다. 이런 식의 환상은 순간적이고, 희생물을 제거하는 순간 실재와의 관계는 끊어진다. 그러나 내사적 동일시는 다르다. 유아는 대상을 입으로 가져가 먹으면서 대상과의 동화를 시도한다. 그리스도교적인 희생제의인 성만찬에서 신자들은 주기적으로 예수의 피와 살을 ‘먹는다’. 이것은 이 환상을 주기적으로 재생시키면서, 주체가 끊임없이 실재와 관계하도록 이끈다. 이런 환상을 사는 이들은 통과제의 신화의 영웅이나 칸트의 천재와 같이 신적 존재에 대한 모방자로부터 시작해, 결국은 모두가 ‘세계의 배꼽’으로서 체계에 새로운 형식을 가져온다.



나오는 글


 이 글에서는 정신분석학의 방법으로 통과의례와 희생제의를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체계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희생제의는 공동체 내의 주체들의 욕망을 착취하며, 통과의례는 그러한 체계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의례는 체계를 유지시키고 내외의 충격으로부터 방어하는 역할을 한다. 즉, 희생제의는 내부의 파괴적인 욕망을 공동체 내부 혹은 공동체 외부의 특정 대상에 집중 투사함으로써 체계를 붕괴시킬 수 있는 폭력을 방지한다. 그러나 이렇게 잘 짜여진 종교적 세계를 균열시키는 열린 의례구조가 종종 발견된다. 그것을 여기에서는 글쓰기적 의례라고 불렀다. 글쓰기적 통과의례는 체계 밖을 향하는 여행이며, 이 통과를 지나온 주체는 체계와 바깥 사이를 열어 세계를 갱신시킨다. 또한 글쓰기적 희생제의는 희생된 대상을 내사적으로 동일시함으로서 주체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욕망에 따라 체계를 열 수 있게 이끌어 준다.

 이처럼 의례에는 해체적 측면과 구축적 측면이 모두 있다. 그런데 선후관계를 따지자면 해체적인 글쓰기적 의례가 먼저 있었고, 그것이 체계 속으로 번역되어 구조화된 것이 통상적인 의례이다. 그런데 현대의 세속화된 사회에 남아 있는 의례들은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실재와 관계하는 유용한 장치로서의 글쓰기적 의례는 그 수도 줄고 상징도 약화되고 있다. 한편 국가와 언론에 의해 유지, 관리되는 이데올로기적 기구에서의 통과의례와 여론에 의한 희생양 죽이기는 여전히 건재하며 더욱 강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종말론적인 징후 같은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해체론적인 의례가 우세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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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프로이트, 이윤기 옮김,『종교의 기원』, 열린 책들, 1997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찬부 옮김,『쾌락 원칙을 넘어서』, 열린 책들, 1997

한나 시걸, 이재훈 옮김 『멜라니 클라인 :멜라니 클라인의 정신분석학』, 한국심리치료연구소,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