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학 잡담

[잡담발광] 데카르트적 명상

1. 생각의 역사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하나는 생각하는 사람들의 결론들을 모아 놓은 역사말하자면 철학사나 윤리교과서 따위에 있는 역사입니다다른 하나는 생각하는 방법의 역사나와는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이라는 동일한 조건 속에 처해 있었던 사람들이 경험한 생각의 모험을 다시 경험하려는 관점입니다.

 

 

2. 서로 다른 전공을 한 사람들이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글을 써 보자는 이 잡담” 기획에서우리는 맨 처음으로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기로 하였습니다근대 철학의 원점에 있는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제일철학에 대한 성찰여기서 신의 현존 및 인간 영혼의 불멸성이 증명됨(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in qua Dei existentia et animae immortalitas demonstrantur)>입니다보통 제일철학에 대한 성찰”, 혹은 성찰” 까지만 불러 주니 서구에서는 보통 <Meditation>이라고 불렀고일본 학자들에 의한 번역 제목이 <성찰록省察錄>, 한국에서는 이걸 따라 <성찰>이라고 불르고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성찰>에 대해서 흐느적흐느적 주절주절 잡담을 하는 것이 목적인 이 글의 제목은 데카르트적 명상입니다사실 이것은 에드문트 후썰Edmund Husserl의 글인 “Méditations cartésiennes (Cartesian Meditations)”의 제목을 그대로 따온 것입니다보통 이 제목은 데카르트적 성찰’”로 옮깁니다하지만 나는 성찰이라는 번역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자신의 내면을 반성하고 살핀다는 의미에서 성찰은 충분히 좋은 번역일 수 있습니다그러나 현대 한국어 속에서 명상이 가지는 의미즉 내면의 의식과 경험적 세계그리고 그 너머의 초월에 모두 관여하는 뉘앙스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Frans Hals - Portret van René Descartes.jpg

 

3. “생각한 결과의 역사와 생각을 경험하는 역사를 대비시킬 때데카르트를 보는 관점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전자의 경우데카르트는 근대적합리적 이성인 코기토cogito를 철학의 제일원리로 삼았으며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확립한 사람으로 이해됩니다그러나 후자의 관점으로 보면데카르트는 자기 시대의 위기를 모든 선입관을 배제하고 해체하는 통찰을 통해 돌파하려고 했던 사람이 됩니다.

실제로 현대의 위기를 돌파하려고 시도한 20세기의 사상가들은 데카르트로 돌아가는 일이 많았습니다.그건 데카르트가 성찰한 결과를 받아들이거나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데카르트처럼’ 세계를 보는 자연적 태도를 넘어 세계의 실상을 파악하고자 한 것입니다대표적인 예만 들겠습니다.

후썰을 비롯한 현상학자들은 데카르트가 방법론적 회의라고 불렀던 것을 더 세련화해서 현상학적 환원이란 걸 합니다데카르트가 오성에 명석판명하게 떠오르는 확실한 것 이외의 것을 의심하고 지워버렸다면이들은 그런 것들에 괄호를 치거나, “판단을 중지해서 투명하게 만듭니다그랬더니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데카르트의 시도를 끝까지 몰아갔더니데카르트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납니다.

데카르트는 자신을 속일 가능성이 있는 외적 감각을 의심하면서 물질적 기계인 신체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코기토에 도달합니다그런데 현상학자인 메를로퐁티Merleau-Ponty는 감각도 몸의 운동을 통해 이루어지고 주관 역시 몸을 가지고 이루어진다는 걸 발견합니다같은 자리에서 출발했는데데카르트는 순수한 생각(코기토)”메를로퐁티는 상황 속의 몸”. 마치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한 것처럼 보입니다.

현상학자들이 데카르트의 시도를 끝까지 밀고 갔다면데리다Derrida는 데카르트가 무엇을 기획했느냐를 생각해 보았습니다데카르트는 단순히 확실한 걸 찾으려고 한 게 아니라생각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뛰어넘어 무한한 것을 향했다는 점에서 해체론의 모범이라는 거지요데카르트는 현상학의 모범이기도 하고,해체론의 모범이기도 하네요.

 

 

4. 철학전공자가 아닌 내가 데카르트의 철학사적 의미를 더 쓰는 건 틀릴 가능성만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이제 본래 하려고 했던 잡담으로 돌아오겠습니다잘 짜인 글의 주제와 잡담의 화제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제는 처음에 던진 문제이자이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이야기가 모이는 지점입니다.한편 잡담은 화제라는 원을 둘러싸고 이야기를 놀게 합니다이 잡담의 화제는 데카르트가 시도한 걸 우리 각자의 시각에서 어떻게 다시 볼 수 있을까하는 겁니다좀 더 유연하게 말하자면술자리에서 데카르트 얘기를 하고 논다면 우리는 무슨 얘기를 할까하는 거지요.

데카르트는 많은 거짓된 것들이 참된 것으로 착각되고그 위에 세워진 학문도 의심스러운 걸로 보았습니다그래서 이 모든 걸 무너뜨리고 처음의 토대에서 새로 시작하려는 기획을 합니다잘 알려진 <성찰>의 첫 부분입니다.

데카르트가 확실한 토대를 찾고자 하는 마음을 먹은 것은 몇 해 전의 일이지만그는 이 일을 오랫동안 미루어 뒀습니다이걸 적절하게 실행할 수 있는 성숙한 나이가 되기를 기다렸다는 거지요그러다 다행히 오늘 내 정신은 모든 근심에서 벗어나 있고은은한 적막 속에서 평온한 휴식을 취하고 있으므로내가 지금까지 갖고 있던 모든 의견을 진지하고 자유롭게 전복시켜 보겠다면서 글을 시작합니다.

데카르트의 의심이 흥미로운 것은 크게 세 가지 가설 때문입니다하나는 광인의 가설”, 다음은 꿈의 가설”, 마지막으로 악령의 가설이지요감각은 의심하기 어려워 보이지만광인들은 감각을 엉뚱하게 착각하고 우겨댑니다그리고 꿈을 꾸는 동안에는 모든 사람이 마치 광인처럼 엉뚱한 것을 감각하면서 그게 꿈인지 아닌지도 알지 못합니다그러니 물질적인 것장소시간 등은 모두 적어도 의심해 봐야할 것이 됩니다한편 일반적인 것을 다루는 대수학이나 기하학 같은 것들은 확실해 보이지요과연 수학은 진리가 될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데카르트의 마지막 가설인 악령의 가설이 등장합니다데카르트가 사는 시대에서 의심해 볼 수 있는 마지막 의견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세계를 창조한 신이 존재한다는데만약 이 신이 선하고 완전한 존재가 아닌 유능하고 교활한 악령(genium aliquem malignum)"이라면이를 테면 우리가 2+3=5라고 생각하거나사각형의 변이 네 개라고 생각하는 등도 모두 착각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합니다혹 악령이 을 만들어 내가 광인처럼 세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는 거지요이렇게 하면 참된 걸 인식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거짓된 것에 동의하는 일은 없어진다는 겁니다하늘도 땅도자신의 몸감각기관도 모두 환상이라고 믿어 보는 거지요.

첫 번째 성찰은 이렇게 끝납니다만데카르트는 두려움에 빠집니다이 세 가지 가설을 계속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든 일입니다조금만 긴장이 풀어져도 일상적인 생활 태도” 혹은 달콤한 환상으로 돌아올 것이고자신을 진리로 이끌지 어떨지도 모르는 가정을 가지고 악령의 세계 속에서 살아야 하니까요.

 

 

5. 첫 번째 성찰을 정리한 앞의 절에서 나는 의도적으로 잘 정리된 교과서적 방법을 피했습니다그리고 보통 잘 언급되지 않는 첫 부분과 끝 부분을 강조했습니다데카르트의 의심은 마치 빨간약을 먹은 매트릭스의 탈주자들을 떠올리게 합니다어떤 시스템이 만든 달콤한 환상을 가정하는 거니까요데카르트는 영지주의적 신비주의자나 불교적 유식사상가가 아니지만마치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된 척 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데카르트의 악령은 마치 영지주의자의 데미우르고스나 매트릭스처럼 보이거든요.

석가모니가 마라의 방해를 받거나 예수가 사탄의 유혹을 받은 것은 일상적/사회적 삶의 자리에 있을 때가 아니라보리수 아래거나 광야즉 외부세계와 단절된 고행의 자리였습니다데카르트는 고행을 하지는 않았지만, “은은한 적막 속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할” 필요는 있었습니다외부세계나 사회적 관계(데카르트는 근심이라고 표현합니다만)에서 분리되려 했던 것이지요인간을 무지와 착각 속에 빠트리는 원리로서의 악령에 대한 모티브가 데카르트에게서 이처럼 독특한 방식으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감히 신을 악령이라 불러놓고도 데카르트는 이 글을 소르본느 대학의 신학자들에게 보내면서 이 책을 인정해 주고자기를 보호해 달라고 요청합니다그는 사실 이 글은 신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며신의 현전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바탕으로 모든 학문을 정초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성찰>에서는 행위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니까 아무리 불신해도 상관없다고도 하지요그래봤자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6. 데카르트의 의심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습니다그의 의심은 확실한 것을 발견하기 위한 방법적인 거였지요조금이라도 확실하지 않은 것은 소거해 가면서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를 보는 거지요그렇게 기억도감각도물체도형태도연장도운동도장소도 모두 사라져 갑니다그러자 단 하나의 참인 명제가 남습니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부터 데카르트가 나아가는 곳은 논리적 연결보다는 일련의 발상 전환입니다.

① 이 유일한 참의 명제를 나는 어떻게 아는 것인가신이나 그런 비슷한 것이 있어서 나에게 이런 생각을 주는 것인가?

② 아니왜 내가 신이 그랬을지 모른다는 가정을 하고 있는 것일까나 자신이 이런 생각들을 만든 게 아닌가?

③ 그렇다면 나는 적어도 무언가이지 않을까그런데 난 이미 감각기관이나 신체를 다 부정했잖아?

그리고 데카르트는 잠시 주춤합니다.

④ 혹시 나는 신체와 감각기관에 묶여 이것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건 아닐까근데 난 이미 세계에는 하늘,정신물체가 없다고 를 설득했잖아이때 ” 역시 없다고 나를 설득한 거 아닐까아니지내가 나에게 뭔가 설득했다면 설득당하는 내가 있었겠지.

⑤ 또 어떤 기만자(악령이든 뭐든)가 있어서 나를 계속 속이고 있는 거라고 쳐그럼 걔가 속이는 나는 역시 존재하는 거잖아? “나는 있다고 생각하면 기만자는 절대 나를 무로 만들 수 없어.

그렇게 해서 나온 명제가. “나는 있다나는 존재한다.(ego sum, ego existo)"라는 겁니다데카르트에 의하면 이 명제는 내가 발언할 때마다 항상 참입니다.

 

 

7.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겠다는 이 글에서 엉뚱하게도 나의 존재를 증명한 것입니다사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이 증명도 완전하지 않습니다자크 라캉Jacques Lacan만 해도데카르트가 발견한는 육체에 대한 거울이미지에서 유래한 상상적 자아이며실재적 주체 역시 내가 발언할 때마다 오히려 언어 속에서 분열된다고 보았습니다그러나 데카르트는 프로이트를 몰랐습니다무의식적 주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지요.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확실히 존재한다고 본 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마찬가지로 그는 의심하면서 확실하지 않은 건 지워나갑니다나는 무엇인가?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것은 데카르트 이전부터 있었던 말입니다그러나 이건 복잡한 개념인 이성적”, “동물” 등이 무엇인가를 다시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대신 데카르트는 자신의 자연스런 경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를 소거해 나갑니다먼저 얼굴발 등으로 되어 있는 기계즉 신체”. 이건 시체에도 있는 겁니다다음으로 밥 먹고걷고느끼고생각하는 것이건 영혼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에게는 마지막 가정즉 전능한 기만자인 악령이 있습니다몸이 있다는 게 착각이라면몸이 없다면 밥 먹는 거걷는 거느끼는 거 다 착각이 됩니다꿈은 몸과 관계없이 느끼지만이거 사실 느낀 게 아니었습니다그렇다면 남는 것이 바로, “생각입니다.

데카르트의 의하면, “생각만이 나와 분리될 수 없는 무언가입니다나는 내가 생각하는 동안 분명히 존재합니다속이면 속일수록속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나의 존재는 오히려 더더욱 확실해집니다여기서 데카르트는 외칩니다. “무엇이든 나를 속이려면 얼마든지 속여 봐라내가 생각하는 한나는 존재한다!”

 

8. 데카르트는 적어도 생각하는 나(코기토)는 확실히 증명했다고 믿었습니다정확히는 나는 생각입니다그럼 이제 코기토라는 확실한 토대 위에 지금까지 의심하고 소거했던 세계들을 다시 쌓아가기만 하면 되는 걸까요당장 비교적 확실한 지식처럼 보였던 대수적기하학적 지식들은 믿어도 되는 걸까요데카르트는 이제 신을 증명하기로 합니다. “는 있습니다그렇다면 나를 속이는 악령이라는 가정에서 해방되면 이제 세계에는 믿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여기서부터 명백하게 자기 시대의 한계에 부딪힙니다. “를 발견할 때까지 데카르트는 모든 선입견을 제거하고 끊임없는 물음표를 던지면서 사고의 극단까지 모험을 합니다그런데 코기토를 발견한 후로는 명백하게 증명되지 않은 근거들을 동원합니다. “자연의 빛이 나에게 명시해 준다는 이유로요.

자연의 빛은 데카르트에 의하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이성에 의한 직관입니다그는 이성의 힘에 의해 너무나 확실하게 증명된 코기토의 발견에 감탄한 나머지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를 남용하기 시작합니다신의 관념을 증명하는 부분을 보겠습니다그에 의하면 관념들 사이에는 위계가 있습니다이 스펙트럼의 한편은 형상적인 실재이며 다른 한편은 표상적인 실재입니다.좀 더 형상적인 관념에서 표상적인 관념이 나옵니다형상적인 관념일수록 원인이고 표상적인 관념일수록 결과입니다게다가 형상적인 관념은 표상적인 관념보다 더 크고완전하고우월합니다.

데카르트가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 눈치 채셨을 겁니다데카르트가 인식하기로신은 전지전능하고나를 만든 원인이며영원하고무한하며여튼 라는 관념보다 훨씬훨씬 크고대단하고더 형상적인 관념입니다그러니까 가 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 를 만들어야만 한다는 거지요그러니 확실히 존재하는 ” 안에 의 관념이 있으니신도 확실히 존재한다는 거지요그리고 궁극적인 원인인 신의 관념이 내 안에 있는 것은 신이 나를 창조할 때 내 안에 그 관념을 심어놓은 게 분명하다는 겁니다그리고 당연히 신은 기만자즉 악령이 아닙니다기만은 뭔가 부족한 사기꾼들이 하는 짓인데(이 역시 자연의 빛이 알려줍니다신은 완전무결하기 때문에 나를 기만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토록 철저하게 의심을 해 놓고는좀 싱겁다 싶은 신 증명이걸로 데카르트의 의심은 끝이 납니다분명히 존재하는 생각하는 내가 지식과 지혜를 모두 지니고 있는 참된 신을 관상하고 있습니다이제 나머지 모든 사물을 인식하기만 하면 됩니다서구정신사의 전환을 이룬 이 지점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황홀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것에서 도출되는 다른 진리를 고찰하기 전에나는 여기서 잠시 머물러 이 완전한 신을 명상하고 그의 속성을 음미하며황홀감에 눈을 먼 정신이 그 힘이 닿는 데까지 이 비할 수 없는 장대한 빛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찬양하며 숭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장엄한 신의 명상 속에 내세의 더할 나위 없는 지복이 있음을 우리가 신앙을 통해 믿듯이이와는 비할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런 성찰을 통해 현세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을 누리고 있음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이런 고백을 신비주의자들에게서 발견합니다.

 

 

9. 실제로 데카르트는 신학교 시절에 꾼 세 차례의 신비로운 꿈을 기록하기도 하고군복무를 하던 젊은 시절 독일에서 비밀결사인 장미십자회(Rosenkreuzer)와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신비주의자라고 규정하기는 힘든 사람입니다그는 단순히 모든 인식의 기반이 될 확실한 것을 찾아 의심스러운 것들을 지워가다가 그야말로 우연히 신비적 직관에 도달한 것입니다.

우선 그의 신 증명은 오류투성이입니다우리는 <성찰>의 원래 제목에도 불구하고데카르트를 신 증명을 한 사람이 아니라 코기토를 발견한 사람으로 기억합니다이 증명은 이전 시대의 토마스 아퀴나스나 안셀무스의 증명보다도 허술해 보입니다그러나 그가 틀린 지점들을 검토함으로써 우리는 그의 성찰-명상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전지전능하고 무한하며 영원하고 완전하며 모든 것을 만든 원인인 신이란 관념은 그의 생각과는 달리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는 관념이 아니라그리스도교라는 전통 속에서 축적되고공유되며재생산되는 문화적인 관념입니다다른 문화권그리고 현대 사회에 이런 관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는 매우 많습니다.

한편 데카르트는 우리와 같은 종이며 지구라는 행성에 살았던 인간입니다사고를 위한 하드웨어도 같으며문화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많은 면에서 우리와 대단히 유사한 세계에서 살았던 인물입니다자신의 일부라고 믿어지는 신체적정신적 요소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면서 영원한 실재를 경험하는 실천은 대단히 일반적인 인간 현상입니다힌두교와 도교의 체계화된 수행법들을 보면 이런 현상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데카르트가 자신의 전통에 축적된 언어를 통해 이름 붙였을 뿐그의 황홀감은 분명 자신이 속한 문화를 초월해 있습니다.

어쩌면 데카르트가 발견한 것은 경험적인 세계를 뛰어넘은 초월일 수도 있습니다어쩌면 무한일 수도 있습니다노군이 자세히 검토하겠으나무한은 일상적 언어로 표현하면 뭔가 일그러지고 헝클어지는 묘한 기표입니다. “초월이나 무한”, “” 등은 언어나 경험혹은 그런 것들로 인식되는 세계를 벗어나 있는 것에 대해 붙인 가상의 이름들입니다사실 우리는 이런 것에 대해 이름을 붙일 수 없는데이름을 붙이는 것개념화하는 것은 상징의 세계 속에 무언가를 제한하여 고정시키는 행위입니다우리는 초월적인 것을 논의하기 위해 초월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만말하는 순간 그것은 사라집니다그러므로 <도덕경道德經>의 첫 문장은 도를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게 된다(道可道 非常道)”이며불교에서는 아예 이름 붙이길 포기하고 비었다()”고만 말한 겁니다마찬가지로 신 관념은 없습니다관념이 되는 순간 신은 사라지는 까닭입니다실제로 모세 앞에 나타난 신은 이름을 말하길 거부하였습니다야훼혹은 여호와라 읽는 YHWH란 사실 유대교 전통에서는 발음할 수 없는하나의 기호였습니다바울은 예수의 신이 어떻게 생겼냐는 아테네 시민들의 물음에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에게 바쳐진 빈 제단을 가리켰습니다나는 편의상 이 불가능한 이름을 ( )라는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데카르트가 확신한 의 존재방식이 정확히 그 반대라는 겁니다데카르트는 는 내가 존재한다고 발언할 때마다”, “얼마동안내가 생각하는 동안” 존재한다고 말합니다만약 생각을 멈춘다면나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라고 하는 관념은 생각하거나, (그 자신을 포함한관념이 떠오르거나그 이름이 발언될 때 존재합니다한편 ( )은 사실 그 관념을 떠올리거나 발언하는 순간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결국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결국 데카르트적 언어에서의 은 의 원인이 아니라, “(생각)”의 역일지도 모릅니다그래서 라캉은 진정한 주체실재를 표현하기 위해 데카르트의 명제를 뒤집습니다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지만라캉은 나는 생각하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고존재하는 곳에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 겁니다데카르트는 실제로 코기토를 초과하는 ( )로의 침잠을 경험했지만그것을 하나의관념으로 제한하면서 실제로는 신의 존재가 아니라 신이라는 이름의 존재를 증명하고 만 것입니다. ( )은 데카르트가 붙잡고의지하고그것만은 의심하지 않으려고 전력을 다했던 나의 존재라는 선입견을 포기하는 순간 절대적인 비어 있음” 속에서 진정으로 자기 모습을 드러냅니다.

 

 

10. 데카르트의 명상을 따라가면서 주절거린 이 잡담을 통해나는 데카르트의 언어를 재구성하기보다는 데카르트의 경험을 재현하려고 했습니다눈치 채셨을지 모르겠지만나는 데카르트의 의심에는 뛰어들어 참여하였고데카르트의 확신에는 거리를 두었습니다그리고 의심을 멈추고 확신으로 넘어가는 간극에서 그가 시대적 한계 때문에 발견하지 못한 것을 드러내 보려고 하였습니다.

글을 함께 읽으면서 나는 노군에게 “(의심하는데카르트는 미친 놈 같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광인의 가설”, “꿈의 가설”, “악령의 가설을 가지고 자기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의심하고 부정하는 데카르트는 확실히 어떤 의미에서는 광기를 보이고 있습니다데리다 역시 <글쓰기와 차이속의 푸코론에서 비슷한 주장을 합니다. “광인은 데카르트의 첫 번째 가설에서 잠깐 등장했다 사라지지만사실은 성찰의 주체 속으로 내면화하여마침내 그 내재적 광기로부터 이성적 사유가 구성된다는 겁니다이런 광기 내지 과장을 통해서 마침내 철학자는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것들문화적으로 구성된 것들그리고 자신의 세계마저 초월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후설과 데리다의 공통된 의견은 데카르트가 그런 엄청난 기획을 세워 놓고는 철저하게 추구하지 못하고 자기 시대의 벽에서 멈춰 섰다는 겁니다과연 그렇습니다데카르트는 자기를 구성하는 신체를 모두 부정하고영혼에 속하는 요소들도 하나하나 소거해 갔지만, “를 모두 없애진 못했습니다사실 코기토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광기가 구성한 하나의 결과물이며 고정점입니다만일 그것마저 부정했다면 그는 그 너머의 말할 수 없는 진리에 다다르거나그대로 정신이 붕괴되었을 겁니다결국 그는 그 너머의 영역에 다다르기 위해 코기토라는 옷으로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그리고 코기토라는 옷은 관념이기 때문에규정될 수 없는 ( ) 역시 신 관념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 ). 지금 막 시작하는 이 팀 블로그의 이름은 두 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하나는 내가 제안한 잡담이고다른 하나는 노군이 제안한 발광입니다. “잡담은 특정한 분과학문의 관심영역이나 글쓰기 방식에 갇히지 말고자유롭게 얘기를 나누면서 공부해 보자는 취지입니다주제와 목적을 가진 학문적 글쓰기와는 달리화제만을 두고 놀아보자는 마음으로 하는 글쓰기는 서로 다른 분야를 공부하는 우리들(그리고 앞으로 더 참여할 사람들)에게 자극적인 시도입니다.

발광은 원래 發光이었습니다만이 첫 잡담을 하는 동안 發狂이라는 의미가 들어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데카르트가 시도한 자기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유의 모험그것은 일종의 광기입니다그 야생적 광기를 마음껏 언어화할 수 있는 게 바로 잡담이라는 방식이라고 봅니다. <성찰>이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같은 글은 논문과 같은 제도적 글쓰기가 아니었습니다또한 여전히 그건 빛을 발하는 일입니다나는 물리학적 발광현상이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의미 있는 상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만데카르트의 길잡이였던 자연의 빛과 같은 빛이 광기에 사로잡혀 모험하는 방랑자들을 인도해 줄 거라고 믿습니다그리고 그들은 (두 가지 의미 모두에서발광할 겁니다.




이글은 @HansHoon @anspruch @No_Goon 이 함께 하는 잡담-발광의

제 1주제에 대한 글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다른 글은 여기 - http://luminescence.tistory.com/3를 참고 하세요


성찰 - 자연의 빛에 의한 진리탐구 프로그램에 대한 주석
국내도서>인문
저자 :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 이현복역
출판 : 문예출판사 1997.09.30
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