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학 잡담

막스 뮐러의 하늘과 엘리아데의 하늘

막스 뮐러의 하늘과 엘리아데의 하늘



 막스 뮐러는 언제나 종교학사의 첫머리, 혹은 몇몇 ‘선구자’들에 이은 본론의 첫머리에 위치한다. 동시대의 틸레나 드 라 소세이 역시 그를 종교학의 창시자로 여겼다는 사실도 지난 시간에 확인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뮐러식의 종교학은 거의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못하다. 우선 그가 주로 의지하였던 언어-어원학적 방법이 (주로 타일러와 랑 등의 비판에 의해) 설득력을 잃었고, 그 방법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후계자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언어질병설’로 대표되는 막스 뮐러의 이론체계 전반은 오늘날 종교학도들에게 별다른 흥미를 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특정한 주제에 대한 막스 뮐러의 한 가지 설명을 동일한 주제에 대한 후대의 종교학자 엘리아데의 설명과 비교함으로써, 그 의미를 재평가해 보려고 한다.

 『종교학입문』의 4장에는 그의 ‘언어질병설’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이 있다. 그는 “반은 물질적이고 반은 정신적인” 고대의 종교 언어에 대해 “두 가지 분명한 경향”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언어의 물질적 성격을 벗겨내고 추상적 사고에 적합하게 하려는 시도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물질적인 것으로 되돌아가려는 “퇴행”이다. 이것은 최초기의 종교언어로부터 지금까지도 작용하는 작용과 반작용이다.(180)

 우리는 이 구도에서 엘리아데의 형태론에 대한 조나단 스미스의 서평을 떠올릴 수 있다. 바로 성스러움의 “구체적인 것으로의 타락”과 종교적 테크닉의 “초월성을 향한 방향성”의 두 방향이다.1) 막스 뮐러의 것은 언어적인 부분에 한정되어 있고, 엘리아데의 것은 그가 성현(hierophany)라 부른 종교현상 전반에 대한 이론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우주론적인 보편화”와 “인간학적 특수화”의 두 가지 경향이 종교사를 통해 반복되었다는 통찰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두 사람이 ‘하늘’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비교해 보겠다. 막스 뮐러는 하늘이라는 이름이 그 물질적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자연적 하늘과는 다른 무엇인가의 이름으로 사용되는 순간을 지적한다.(181~183) 하늘이라는 이름은 ‘무한한 관념’을 충분히 파악하거나 충분히 상상하기 위해 선택되었다. 이 선택을 통해 사람들은 하늘이 표상하는 무한에 대해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 하늘 자체에 대한 신격화는 아니었다.

 그러나 하늘이라는 이름이 대중적으로 제공되고 수용될 때, ‘오해’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그 이름의 배후에 있는 무한한 무언가에 대한 것을 잊고 비를 내려주고, 밭과 가축, 곡식을 보호해 주고, 빵을 주도록 머리 위의 하늘을 향하여 탄원하게 되었다. (183) 또한 언어의 다의성 때문에 하늘에 관한 다른 이름들이 발견되어 이들이 독립된 존재성을 가지게 된다. 이 지점에서 디아우스, 바루나 등 하늘에 대한 다신교가 발생한다.(185) 또한 이 이름들이 신성의 무한성을 표현하기에 불충분하게 여겨지면서 새로운 이름들이 탐색된다. 바람, 지진, 불 등이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이름들로 등장한다.(186)

 엘리아데의 경우, 하늘-그 자체는 그 높고, 무한하고, 영원한 속성 때문에 직접적인 초월성(성스러움)을 드러낸다. 이윽고 인간의 신화적인 상상력에 의해 하늘은 지고신으로 인격화된다. 그러나 지고신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많은 문화에서 “의례의 부재”가 발견된다. 그래서 이 지고신은 데우스 오티오수스(deus otiosus)가 되어 물러난다. 한편, 농경의 출현을 통해 하늘신은 ‘대체’와 ‘융합’을 통해 다시 현실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태양과 달의 신들, 여신들, 천둥신과 폭풍신 등이 그 예로 제시된다.2) 이것은 형태론의 2장에서 막스 뮐러의 설명과 대응되는 부분만을 추려낸 것이지만, 두 학자의 공통적인 인식을 드러내기엔 충분할 것이다.

 막스 뮐러의 종교 언어에 대한 이론은 엘리아데의 형태론과의 비교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 글에서는 그 작업을 정교하게 진행하지는 않았다. 우선 막스 뮐러의 “언어질병”을 엘리아데의 “인간학적 특수화”에 대응시켰지만, “우주론적 보편화”와의 관계는 다루지 못했다. 이 ‘두 방향’에 대해 이번에 읽은 텍스트에서 막스 뮐러는 흥미로운 설명을 하고 있다. 언어 수용에 따른 변용은 한편으로는 종교의 쇠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의 변증법적 생명”이기도 하다. 어른-아이의 방언, 성직자-평신도의 방언은 끊임없이 상호 번역되며 “진자운동”을 반복해야 한다. 아이들의 능력에 순응시키고, 성인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면 종교는 “단순한 미신”이거나 “단순한 철학”이 된다. 이것이 막스 뮐러로부터 재발견할 수 있는 통찰이다.


1) J. Z. Smith, "Acknowledgements: Morphology and History in Mircea Eliade's Patterns in Comparative Religion(1949-1999), Part 2: The Texture of Work", Relating Religion(Chicago :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4), 85-89.

2) M. Eliade, Traité d'histoire des religions : R. Sheed trans., Patterns in comparative religion(Lincoln :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96), 38-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