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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잡담

1980년대 한국의 '민중무당'

1. 연구실에 김동규 선생님의 2012년 논문 "한국 무속의 다양성"(종교연구 66, 2012)이 굴러다니기에 펼쳐봤다가 재밌는 부분을 봤다. 80년대에 '민중무당'으로 불렸던 '다니'의 인터뷰다. 이 사람은 80년대에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이런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정말 새로운 경험이고 새로운 문화였어요. 그때까지 나는 '굿은 그냥 집이나 굿당에서만 돈받고 하는 것'이었죠. 그러나 학생들과 함께 하면서, 나는 굿 안에 있는 정치적인 무엇을 느끼게 된 것죠. (...) 정치적 의미를 포함하는 굿을 하기 위해서, 나는 책을 많이 읽었어요. 어느날, 나는 한 오빠한테 이렇게 물었죠. '민중이 뭐에요?'라고. 그 선배오빠는 '민중은 무당하고 비슷한 것이다...무당은 삶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거야. 무당은 무시당하는 사람을 위해 굿을 하는 거고. 굿을 통해서 무당은 산자와 죽은자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더라구요. 나는 내가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참 행복했어요. 나중에 그 오빠가 많은 책들을 추천해 주기도 했구요.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당시 독재에 대해 비판적인 마음도 가질 수 있었죠(후략)" (210-211)

80년대니까 이런 일도 있었구나...하고 넘어가려다 조금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민중은 무당하고 비슷한 것이다'라고 해 놓고는, '무당은 산자와 죽은자의 한을 풀어주는 거'라고도 한 '운동권 오빠'의 발언 말이다. 민중과 지식인(또는 활동가)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해 놓으면,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무당은 민중이 아니라 '지식인'과 비슷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다니가 접촉했던 활동가들은 민중을 사회적 구원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주체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이런 식의 역설적이지만 역동적인 민중관은 사회과학적이라기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학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90년대 이후 '민중' 개념 자체가 학계에서 점점 인기를 잃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소멸해 간 관점이기도 하다. '민중무당'이라는 예외적이지만 흥미로운 사례를 이해하는 데 이 민중관은 꽤 재미있는 지점이 될 거 같다.

2. 다니의 이후 행적에도 눈길을 끄는 부분은 많다. 어느 날 시위현장에서 하는 굿을 앞두고 목이 심하게 잠겨버린 다니는 이것을 신의 분노로 해석하고 이후 민중무당으로서의 활동을 그만둔다. (211) 그러나 그때까지 관계를 맺고 있었던 학자들, 특히 여성신학자들과의 교류는 지속하면서 '종교 간 대화 ' 성격을 띤 명상모임에도 다니게 된다. 거기에서 다니는 이런 발언을 했다고 한다.

"나는 참 이상한 무당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무당이잖아요. 그런데 베드로, 십자가, 십계명을 보는 무당을 생각해 보셨어요?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십자가가 제 치마로 내려오는 거에요. 그리고 다른 꿈에서는 베드로가 지팡이를 짚고 와서는 '저 사람들과 같이 공부해라'라고 말씀하시는 거에요. 또 다음 날 꿈에는 하늘에서 어떤 글자가 막 떠다니다가 돌판에 박히더라구요. 처음에는 그 판에 있는 글자들이 뭘 의미하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십계명인거에요. (...) 그런 꿈들을 꾸다가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내가 사제자로서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 걸까?' (후략)" (212)

무당에게 현몽한 십자가, 베드로, 십계명이라니!


(2014. 2. 23.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