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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잡담

슈퍼히어로 번개맨

 사정 상 TV 유아 프로그램을 자주 보게 되었는데, 이번 EBS 개편을 보니 힘이 많이 들어가 있는 걸 알겠다. 매번 느끼지만 이 유아용 3D 애니메이션들의 질은 훌륭하다. 한국의 애니메이션 제작 역량은 죄다 여기에 몰려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설명이 필요 없는 뽀로로의 새 시즌이 시작되었고, 꼬마버스 타요는 학원물이 된 모양이다. (아무리 의인화되었다지만 왜 버스나 택시들이 학교에 다녀야 하는지는 묻지 않기로 하자.)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매일 아침에 하는 뽀뽀뽀 유형의 <딩동댕 유치원>을 주말공개프로그램인 <모여라 딩동댕>의 '조이랜드'팀이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걸로 한국의 어린이들은 매일 아침 '번개맨'을 만나게 되었다.


 일반에는 저평가되는 사실이지만, 번개맨은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히어로쇼다. 세계적으로도 이런 예가 얼마나 있을까 싶다. 특촬물 히어로쇼가 공개방송으로 매주 이루어지고, 뮤지컬로도 제작되고, 그게 또 공중파를 탄다. 게다가 그 역사도 10년을 훌쩍 넘었다. 올해 대학 신입생들이 취학 전에 봤을 테니.


 기본적으로는 토이스토리를 연상케 하는 설정으로, 장난감 나라의 평화를 슈퍼히어로인 번개맨이 지킨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이런저런 뒷설정이 붙어서 꽤 전형적인 특촬 히어로물식의 이야기가 되어 있다. 


(2014. 5. 12+ 이 글을 쓸 당시에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번개맨의 설정은 정기적으로 '리부트'된다. 현재의 조이랜드 설정은 2013년 편성 이후의 것으로, 이 설정은 2014년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주인공인 번개맨부터가 사실은 외계인이다(...) 일종의 울트라맨 오마주가 아닌가 싶은데, 고향인 번개별에서 스승인 마루와 누리에게 각각 '육체의 힘'과 '마음의 힘'을 수련받고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라는 설정이다. 최근 에피소드에서는 두 스승 사이의 세력 싸움으로 결과적으로 두 사람 모두가 죽어버렸다. 번개맨은 아버지격인 마루를 퇴치하고, 어머니나 다름없는 누리의 뒤를 이어 번개별을 지키게 되었다.


 이게 작년에 13년 동안 번개맨 역을 했던 배우가 하차하면서 둘러댄 뒷설정이다; 나름 감동적인 마무리인 셈인데, 작가들 사이에 손발이 안 맞았는지 연달아서 보지 않으면 스토리 전달이 잘 안 된다. 아이들 눈에는 어느날 갑자기 무지 진지하고 비극적인 이야기가 나오더니, 다음주에 갑자기 번개맨이 키 크고 몸 좋은 아저씨로 바뀐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특촬물의 역사에서 배우 교체 둘러대기의 전형적인 사례가 초대 가면라이더의 1, 2호 교체다. 1호 가면라이더역의 배우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갑작스레 배우가 바뀌었다. 2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해 "1호는 더 큰 악을 물리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고 둘러댄다. 나중에 1호가 복귀하면서 시리즈 전통의 '더블라이더' 체제가 된 것은 이처럼 순전히 우연이다.
번개맨의 경우는 이런 식의 둘러대기가 거의 한 달이 지난 다음에야 이루어졌다. 고정 빌런인 '나잘난'과 '더잘난'이 배후 흑막인 '잘난마왕'의 명령을 받고 번개별을 공격한다. 어느새 '번개별의 번개맨'으로 명명된 1호 번개맨은 오랜만에 등장해 처참하게 발린다. 2호 번개맨은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결국 1호를 구하고 정식으로 일종의 '계승의식'을 치룬다. (이때의 노래나 대사를 보면 작가들이 교회다닌다는 걸 알 수 있다.) 


 예전에 안보이는 라디오에서 왜 한국에는 히어로물이 발달하지 않았나 하는 걸 잠깐 다룬 적이 있는데, 사실 꽤 좋은 예가 생긴 셈이다. 한국의 아동청소년 대상 대중문화 가운데 이 정도의 영웅신화적 서사를 갖춘 게 얼마나 되겠는가. 

 매체가 매체니만큼 별로 티가 나지 않지만, 가면라이더나 울트라맨류의 전형적 요소들이 깨알같이 들어가 있기도 하다. 자코들과의 일대 다 전투라든지, 악역간부는 개그캐릭터라든지, 선배히어로와의 공투라든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강해지는 모티브라든지.

 게다가 미국식 히어로물에서 많이 나타나는 사이드킥인 '마리오'도 있다. 자동차 변신 기믹이 있어서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캐릭터다. 초창기에는 그냥 골판지 자동차 속에 앉아있다가 일어서면서 변신이라고 우겼다는데(...) 지금은 자동차 상태로 움직이기도 하고, 인간형에서 자동차로 변신하기도 하는 등 완벽한 가변형이 됐다. 게다가 광역딜이 되는 '마리오 라이트'라는 맵병기도 있다. 번개맨의 필살기인 '번개파워'가 워낙 사기적이라 위력은 약해 보이지만.

 그럴 듯하게 써놨지만 이런 설정들은 서서히 만들어진 거고, 내 첫인상은 '왜 이런 조잡한 공연에 아이들이 그렇게까지 열광하는가?'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히어로물의 기본적인 패턴들이 꽤 충실히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질문은 '왜 히어로물에 열광하는 취향이 그렇게 어린 나이에 형성되는가?'로 바뀌었다. 이건 꽤 진지하게 다룰 수 있는 문제다.


(2014. 3. 5.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