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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잡담/한국기독교

개고기와 미카엘, 그리고 천지개벽(天地改闢)

주교요지황사영백서는 각각 교리문답과 박해기록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거기에는 저자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당시 종교문화의 구체적인 단면 또한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조선의 초기 천주교인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방법, 그리고 그 바탕에 있었던 조선후기 한국종교의 모습이기도 하다.

 

1. 기존 문화와 천주교의 만남이 가장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장면 중 하나가 황사영백서에 묘사된 경신년(1800) 부활절의 모습이다. 여주의 천주교인들은 개를 잡고 술을 빚어, 길가에 앉아 희락경(부활 삼종경)을 외고는 술통을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다. 이것은 엄숙한 부활절 미사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마치 동제(洞祭)의 풍경 같다.

오늘날에도 한국 가톨릭에서 개고기는 종종 순교자의 음식이라고 불린다. 신학생들의 특식으로 제공되기도 하고, 바자회 음식으로 개고기를 마련하는 성당과 동물보호단체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는 보도도 보인다. 현대인의 눈에는 부활절 음식으로서의 개고기가 대단히 부자연스럽지만, 소의 도살이 금지되어 있었던 이 시기 개고기는 값싸게 구할 수 있었던 잔치 음식으로 별 문제없이 받아들여졌다. 부활절의 개고기는 당시 한국 천주교 공동체의 토착성과 민중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2. 이 여주지역 천주교 공동체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김건순(요사팟)이었다. 황사영은 대부분 남인 출신인 당시 천주교 내에서 노론 명가의 젊은 명사였던 김건순에 대해 대단히 호의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특히 마테오 리치의 기인십편을 읽고 어린 나이에 천당지옥론을 썼다는 사실도 밝혀 놓았다. 기인십편은 이 세상의 무상함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다루고 있는 글이다. 이 시기 김건순은 이를 천주교와 연결시키기보다는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선()이나 육임(六壬), 기문(奇門) 등과 연결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고 주문모 신부를 만나게 된 것도 천주교신자가 가지고 있었던 총령천신상(總領天神像), 즉 미카엘상을 보고 기문술수와 천주교와 관련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미카엘은 타락천사인 루시퍼를 제외하면 주교요지에서 그 이름이 언급되는 유일한 천신(천사). 서학서와 성물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천주교를 접했던 조선의 일부 지식인들에게 있어 천주교는 일종의 술법, 심지어는 북벌(北伐)을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졌다. 신유교옥 당시 의금부에서 있었던 주문모 신부의 추국 기록에 의하면, 김건순은 신부를 협객으로 생각했으며, ‘큰 배를 만들어 중국을 공격하자고 선동했다고 한다. 김건순은 영세를 받기 전 고향의 동료들에게 천주교 신자들처럼 별호를 주고 그것을 칼에 새겨 지니게 다니게 했다는 진술도 있다. 그의 천주교에 대한 오해는 검을 들고 악마를 제압하는 미카엘상의 이미지와 묘하게 겹친다.

 

3. 김건순 외에 황사영백서내에서 ()을 배웠다고 묘사되는 또 다른 인물은 다름 아닌 정약종이다. 그는 천지개벽(天地改闢)’을 믿었다가 천지가 뒤바뀌면 신선 또한 소멸된다고 생각해 절망했다가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태초의 개벽(開闢)이 아니라 신선마저 소멸한 후 새로운 세상이 다시 열린다(改闢)’는 종말론적 관념은 19세기 말 신종교들에서는 흔한 주장이지만 이 시기의 문헌에서는 극히 드문 용례다. 황사영은 이것이 천주교를 알기 전에 정약종이 가지고 있었던 신념이라 서술하고 있으며, 신선조차 소멸하는 종말은 도교에서마저 낯선 것이다. 물론 18세기 후반에는 미륵신앙과 도참신앙의 묵시적, 종말론적 형태가 정교화되어 갔지만 이것이 엘리트 유학자였던 정약종에게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졌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어쩌면 정약종이 주교요지에 서술하고 있는 종말에 대한 묘사에는 그가 종래에 가지고 있었던 토착적 종말론의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