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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잡담

한국과 오키나와의 "물러난 미륵"

 한국에도 창조신화가 있는가? 서구의 신화학자들이 하도 세계창생신화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해대는 통에 새삼 주목받게 된 한국 무가(巫歌)들이 있다. 대표적인 걸로는 한반도 본토의 “창세가”류와 제주도의 “천지왕본풀이”류가 있는데, 양자는 많이 닮았다.

 『한국의 창세신화』(길벗, 1994)를 쓴 김헌선에 의하면 이들 무가의 내러티브 속에는 “일월조정” 신화소와 신들의 “인세차지경쟁” 신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일월조정”은 해와 달이 여러 개 떠 있는 상황을 태초의 신들이 어떻게 처리했는가 하는 거고, “인세차지경쟁”이란 인간세상을 차지하고자 두 명(가끔 세 명)의 신이 경쟁을 하는 이야기다.

 웹툰 <신과 함께> 때문에 이 이야기는 대중적으로 꽤 알려진 듯하다. 천지왕의 자식인 대별왕과 소별왕이 꽃 피우기 경쟁을 하는데, 소별왕이 계략을 써서 우세하던 대별왕 대신 인간세상을 차지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쪽은 제주도에서 우세한 이야기이지만, 사실 이런 류의 이야기가 먼저 채록된 것은 한반도 북부 쪽이다.

 일제 강점기의 민속학자였던 손진태가 함흥에서 68세의 무녀 김쌍돌이에게서 채록한 “창세가”가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인세차지경쟁”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미륵과 석가로, 미륵이 대별왕, 석가가 소별왕의 위치에 있다. 제주도 쪽 이야기랑 다른 것은 보통 미륵이 세상의 창조신, 혹은 태초에 세상을 다스리던 신이고, 석가가 시비를 걸러 와서 세상을 빼앗는다는 점이다.


창세가(링크)


 이 무가에 “창세가”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손진태였다. 손진태에 의하면 김쌍돌이가 이 무가의 일부를 들려준 것이며, “큰 굿”을 할 때에 불렀다고 한다. 손진태는 이후 평안도에서도 비슷한 무가를 수집했다.(「창세가」, 『신가정』, 동아일보사, 1936년 4월호) 그리고 6~70년대 문화재관리국에서 월남한 무당들을 대상으로 관북지방과 관서지방의 무가를 기록할 때에도 석가와 미륵이 세상을 차지하기 위해서 꽃피우기 경쟁을 했다는 무가가 2편 수집되었다. 그 후에도 무가나 민담 수집 작업을 할 때마다 미륵과 석가의 꽃 피우기 경쟁 이야기는 몇 개씩 튀어나왔다.

 일본 미륵신앙 연구로 유명한 미야타 노보루(宮田登)가 일본과 한국의 미륵신앙을 비교하면서 대상으로 삼은 게 바로 이 창세가였다. 그는 일본에서 “미륵의 세상(ミロクの世)”이라는 것이 풍년을 가리키는 반면, 한국에서는 창세가에서 나온 것 같이 석가의 세상과 미륵의 세상이 통시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동아시아 비교신화학 연구가 심화되면서 흥미로운 얘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반도의 창세가와 같은 “인세차지경쟁” 이야기가 오키나와, 중국 등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특히 오키나와 문화권의 여러 섬에서는 한반도 북부의 미륵과 석가 이야기와 세부사항까지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온다.

 오키나와 쪽 전승에 대해서는 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 타바타 히로코(田畑博子)라는 학자의 논문에 인용된 자료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오키나와 본토와 큐슈 사이에 있는 아마미(奄美) 제도의 민담집에 나오는 것이다.




불의 씨앗(火種子)


 옛날, 미륵부처와 석가부처가 “세상”을 빼앗는 싸움을 일으켜, 어느 쪽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미륵부처가 말했습니다.

 “자고 있을 때, 베갯머리에 꽃병을 놓고, 꽃병에 꽃이 빨리 피는 쪽이 세상을 가지자.” 그렇게 하기로 두 부처는 합의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각각 꽃병을 베갯머리에 놓고 잠들었습니다. 한밤중에 석가부처가 눈을 떠 보니 자기 베갯머리의 꽃병에는 아직 꽃이 피어 있지 않은데, 미륵부처의 꽃병에는 꽃이 아름답게 피어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석가부처는 몰래 자신의 꽃이 피지 않은 꽃병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미륵의 꽃병과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약속대로, 마침내 석가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석가부처에게 세상을 빼앗긴 미륵부처는 어쩔 수 없이 인류, 짐승류, 곤충류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눈을 감게 하고는 “불의 씨앗”을 숨기고, 아마미야(奄宮)로 떠나갔습니다. 그 뒤에는 불이 완전히 없어져서 석가부처는 아주 곤란해졌습니다. 석가부처는 인류, 짐승류, 조류, 곤충류 등 살아 있는 여러 것들을 모아서, 미륵부처가 불의 씨앗을 숨긴 곳을 물었습니다. 하지만 이 놈도 저 놈도,

 “눈을 감고 있었으니까 모르겠어요.” 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메뚜기가 나와서는,

 “제가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석가부처는 빨리 말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메뚜기는,

 “저는 날개로 눈을 덮고 있었지만, 제 눈은 아래 겨드랑이에 있습니다. 그래서 미륵부처가 돌과 나무에 돌과 나무에 불의 씨앗을 숨기는 것을 봤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석가부처는 매우 기뻐하면서, 나무와 나무를 비벼 불의 씨앗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석가부처는 메뚜기에게,

 “잘 봤다. 감사의 뜻으로 한 가지 말해 둘 것이 있다. 너는 죽을 때는 땅 위에서 죽어 개미 따위에게 먹히지 말거라. 나무 가지나 풀잎 위에서 죽거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거짓말을 한다거나, 가난한 자가 있다거나, 도둑이 나온다거나 하는 것은 석가부처가 미륵부처의 아름다운 꽃병을 훔쳐서, 자기 걸로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편 미륵부처는 정직했기 때문에 편안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栄喜久元, 『奄美大島与論島の民俗語彙と昔話』, 奄美社, 1971.

번역 : 한승훈




 이 이야기는 “인세차지경쟁” 이야기의 구조를 하고 있으면서, 그 세부사항은 제주도나 중국 남부의 것보다는 한반도 북부의 것에 훨씬 가깝다. (위의 링크 참조.) 타바타는 오키나와 문화권 전역에서 이런 류의 이야기를 24개나 수집해 놓았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 본토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일절 발견되지 않고, 한반도 북부와는 지리적으로 훨씬 떨어져 있는 오키나와 쪽에서만 나온다는 것이다.

 이후 몇몇 연구자들이 이 기묘한 신화 전파의 루트를 추적해 보려고 달려들었지만, 수긍할 만한 답은 아직 없는 거 같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석가의 성화에 못 이겨 떠나간 미륵이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에 대한 것이다. 미륵은 산속으로, 바다 건너로, 특히 니라이카나이나 아마미야로 도망간다. 그곳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조상이 건너온 신성한 땅이다.

 석가가 미륵의 세상을 속임수를 써서 빼앗은 결과는 배고픔과 거짓, 도둑과 같은 악이 가득한 석가의 세상이다. 미륵은 가끔 의례 속에서 “내방신(來訪神)”이 되어 풍요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만약 미륵이 완전히 돌아와 미륵의 세상을 이룬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바로 이런 상상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미륵의 세상을 기다리는 민중종교운동들의 동력을 찾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