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학 잡담

광화문 광장의 판테온

나는 그저 얌전히 시험 공부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느 뒷방 늙은이가 내게 떡밥을 던졌다.


JP “이순신·세종대왕 동상 뒤에 이승만·박정희 동상도 세워야”

[중앙일보] 2015.08.14.


http://joongang.joins.com/article/134/18449134.html?ctg=1000&cloc=joongang%7Chome%7Cnewslist1



"21세기 광화문 광장에는 국방의 이순신 장군, 과학문화의 세종대왕과 함께 대한민국의 거인들 동상을 모셨으면 한다. 이 나라 경제를 일으켜 세운 재계의 두 거물, 삼성의 이병철 회장과 현대의 정주영 회장이 그 주인공이 돼야 한다. 한민족의 긴 역사 흐름으로 볼 때 이들이 남긴 업적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언젠가 국민이 존경과 고마움을 가지고 두 분의 동상을 올려다볼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세종대왕 좌상 뒤에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와 조국 근대화를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지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되면 광화문 광장에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모두 모이게 되는 셈이다. 앞으로 세울 동상은 동(銅)을 잘 골라 천년이 가도 변함 없을 상징을 만들어야 한다. 이들 여섯 분 모두 천년은 가야 할 분이다."

진지하게 들어 줄 가치가 있는 주장은 아니지만, 판테온에 대한 국가주의의 욕망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세종과 이순신은 동상으로 만들어지면서 뒤르켐적 의미에서의 성(the Sacred)의 영역에 놓였다. 다시 말해, 이 사람들을 함부로 건드리면 혼난다. 심지어 이 사람들의 '인간적' 면을 다루는 대중예술도 최근에야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석규의 그 유명한 "지랄하고 자빠졌네"가 십 년 전에만 나왔어도 그냥은 안 넘어 갔을 거다)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은 이 사람들의 인격만이 아니다. 국가가 이 사람들을 통해 표상하고 싶어하는 가치들도 있다. 이 사람들은 충, 효, 군사주의 등의 상징이 되어서 효과적으로 사회를 통합시킨다. 이걸 자기가 기획했다고 자랑하는 김종필은 자기네의 의도를 꽤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국민은 영웅을 가까이 대하면서 그들과 정서적 일체감을 느끼고 조국의 역사에 자랑스러움을 갖게 된다. 나라의 위기 앞에 내부의 분열을 극복하는 국민정신은 이런 공공예술이 자극하는 역사적 상상력에서 잉태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노인은 이 영구까방의 성역 속에 이승만, 박정희, 이병철, 정주영을 넣자고 주장하고 있는 거다. 현시점에서 실현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지만 뭘 원하는지는 알겠다. 한국의 우익은 이 사람들과 그들이 대표하는 가치를 '인간적' 담론의 장 속에 두고 싶지 않은 거다. 하늘 높이 들어올려진 이 성스러운 표상들은 논의나 의심이 필요 없는 기본전제가 된다. 세종 이도를 '대왕'이라고 부르기 위해 별다른 설득이 필요없듯이, 이승만을 '국부'라 부르고, 정주영을 '거인'이라고 부를 때 아무런 방해를 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문득 실현되면 종교학자로서는 즐거운 일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대나 중세 종교사에서나 보던 성상(우상)파괴운동을 21세기에 눈앞에서 관찰할 수 있게 될 테니.


2015. 8. 14. 페북.





'종교학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근혜의 종교  (5) 2015.08.16
종교학적 관점  (0) 2015.08.16
『천주실의』에서의 ‘우상숭배’ 논의  (0) 2014.11.28
라마다경 38장  (0) 2014.05.12
슈퍼히어로 번개맨  (0) 2014.05.12